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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미술시간이 가장 좋았던 나는 그 시간이 가장 괴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림을 빨리 마치고 있으면 하나둘 구경을 온다.
우아~잘 그렸다 소리는 언제 들어도 부끄러우면서도 꽤 기분 좋은 소리.
하지만 몇몇의 아이들은
"아.. 나 너무 못 그리겠어. 내 것도 그려주라"며 징징거렸다.
슬쩍 종이를 보니 지우개 자국으로 표면이 너덜거리는 게 보였다.
그래 줘봐.
쓱쓱~~
한 명의 아이를 그려줬더니
둘셋 모여들어 다들
"나도 나도.."
"아 됐어! 미안~ 이제 나 마무리해야 돼! "
아이들은 삐죽거리며 자리를 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갖가지 부탁들에 허덕인다.
어릴 때는 거절이 그렇게도 쉬웠는데 지금은 그게 제일 어렵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림을 안 그려줬어도 금방 잊고 다시 신나게 놀았는데,
지금은 힘들겠다고 난색을 표하거나 혹은 돈이라도 요구하면 연락이 끊기거나 사이가 껄끄러워진다.
그렇다고 마냥 전부 들어줄 순 없지 않은가.
부탁하는 사람은 본인 하나지만 나는 수십 명이다.
찾아줌에 행복하라고?
흠...
어른이 싫다.
진짜 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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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에어즈_아이를 위한 글아이가 낮잠에 들었다.
큰 소파 스툴을 안방에 두었는데 자기 침대가 생겼다며
그곳에 인형과 이불과 베개를 갖다 두더니 뒹굴뒹굴...
어느새 잠이 들었다.
오전부터 필 받아 시작한 현관 청소에
가끔씩 엄마 뭐하나 왔다 갔다 하다가
아까운 너의 오전 시간이 다 가버렸구나.
자고 일어나면 인적 드문 길 찾아
산책이라도 다녀오자.
사랑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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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
아 진짜 사는 게 엿같네!
라고 드라마 극 중 여주인공이 한탄한 말이 생각난다.
요즘이 그렇다.
정말 엿같다.
맛난 엿이 무슨 죄냐만은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탈출하며 프리덤!! 을 외치고 싶다.
상황을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있음에도 징징거렸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이토록 내 의지라곤 털끝만큼도 용납이 안 되는 상황에 놓일 줄이야.
그냥 사니까 사는 것이고 견뎌야 하니까 견디는 중이다.
2020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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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도 사람 되면 좋겠다"
잉? 참 뜬금없다.
"키로키로처럼 사람 될래!"
훗...
"넌 이미 예쁜 사람이야~"
(버럭 하며) "아니야~!!!!!! 나 사람 아니야!!!!"
헐~~~~~~왜 성질을 내지.....
나도 삐뚤어져볼까..
"키로키로 아니거든? 피노키오 거든?"
(인상 쓰며) "키로키로거든!!!! 엄! 마! 미! 워!!!"
이 녀석도 집에만 있다 보니 속에 화가 많은가 보다..
다시 안아주며 말한다.
"넌 이미 예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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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내 속은 빨갛고 매운 김치찌개다.
그 속에 고춧가루 팍팍 끼얹는 채이 어린이.
"으이그.. 너 엄마 힘들게 하면 좋냐?"
과자와 우유를 사방에 흩뿌리고서도
"히히.. 응!"
"허얼!!"
부업으로 전단지 디자인 일을 하는 중이라 컴퓨터와 싸우는 동안
과자 먹으며 혼자서도 잘 놀던 녀석이 어느새 거실 한편에 누워서 잠들어 있다.
미워할 수도 없는 녀석.
왠지 짠하다.
오늘도 엄마는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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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면 잘 살고 있는 사람
뒤통수 후려치는 인간들이 있다.
시시덕대기 좋아하는 것들.
가만 보면 그들은 늘 무리 지어 있다.
모여서 생산을 한다.
헛된 망상 같은 떠도는 이야기를 부풀리고 씹어댄다.
비생산이다.
여기서 드는 생각.
나는 왜 무리 짓지 않는가?
무리 안에서의 비생산적인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팔다리 멀쩡함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눈 막고 귀 막고 그저 입만 살아서
줄줄줄 내뿜는 검은 속내.
정작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실실 웃으면서 덕담이랍시고
입에 붙지도 않는 말을 건네는 모습에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라도
제작해줘야 할 듯.
참 희한하게 그런 인간들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하나 무찌르면 또 하나 나타난다.
지랄 총량의 법칙을 지키기 위해서 사는 것들이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 갈 길만 가면 된다.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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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 꽃 이름이 뭐더라?"
꽃을 그리고 있던 채이가 묻는다.
"음~ 이 꽃은 해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아! 해바라!"
"......"
오늘은 초미세먼지까지 합세해서
신발 한 번 못 신게 하는구나..
나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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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채이는 이것저것 다 걸치는 걸 좋아하나 보다.
대체 저건 뭔 패션일까?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온다.
이윽고 손님 놀이를 시작한다.
옆에 다가오면
"어서 오세요 손님~"이라고 해줘야 좋아한다.
그러면
"아, 네네, 제가 좀 바빠가지고요"
총총 거리며 떠나는 예쁜 손님이다.
손님 놀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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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채이랑 아침 일찍 공방에 가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들어왔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간식거리도 사 왔다.
집에 들어오니 9시 05분.
늦은 아침을 챙겨 먹었다.
둘이서 냠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방 청소를 시작했다.
락스 뿌려 쓱쓱.
끝나고 나니 10시 20분.
창밖을 보니 진한 회색빛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바람도 함께 쌩 하니 불어온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 집이 날아가던
그때가 된 기분이 들었다.
꺄~~ 날아가고파~~!!
얼른 스케치북을 펴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업로드를 하는 중이다.
훗.. 아직도 10시 33분.
오늘은 하루가 더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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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조급해하지 마.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잖니.
퍼즐 그까짓 거 뭐.
빨리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천천히.
다만 지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