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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하원 시킨 후 데려온 공방이다.
채이는 자연스레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한다.
마음이 여전히 우울 가도를 달리는 중인 나는 귀찮은 듯 종이를 주고 내 할 일을 했다.
별 이유 없이 마음이 착잡한 게
며칠 동안 날 괴롭힌다.
슬쩍 뭘 하는지 보았다.
헉! 어디서 많이 본 실루엣을
흉내 내듯, 그리듯 쓰고 있다.
바로 박채이라는 이름을♡♡
와... 본인 이름을 자세히 봤었나 보다.
어설픈ㅇㅂ이지만 신기하고 기특하고 이쁘고 자랑스러운 내 딸!
여기서 팔불출 같이 드는 생각.
천재 아니야?
푸하하하
오늘도 채이 덕분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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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
드디어 채이의 인생 첫 캠핑 날이다.
마쉬멜로우를 가스불에 구워 먹인 날 sns에 올린 글을 보고 동생네가 함께 캠핑을 가자고 제안해왔다.
아이의 웃음소리와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
그리고 그 밤을 장식했던 파바박 펑펑 폭죽 소리.
이토록 행복할 수가!!
모든 걸 다 잊고 그 순간만 즐기면 되었던
그냥 긴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내가 이토록 행복한데 모든 게 처음이었던 우리 채이의 가슴속엔 어떤 것이 새겨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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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미용실 다녀왔는가?
채이: 엄마 머리 잘랐어?
찬혁: 엄마 머리 했네!
모두들 나의 변신을 보자마자 알아채 준다.
심경의 변화는 머리에다 푸는 게 최고지.
자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미련 없이 가위 들고 싹둑.
약 20센티미터가량 잘라낸
머리털을 쓰레기봉투에 털어내었다.
그래도 머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는 않는다^^
변신 성공?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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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해맑은 채이를 보며
"채이는 걱정 같은 거 없지?" 물었다.
속으로 '걱정'이 뭐야?라고 물을 줄 알았음..
채이는 "걱정하는데~?"
"읭? 무슨 걱정?"
"엄마 걱정!"
헉!
아이고 내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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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조르는 채이와
가을밤 마실을 다녀왔다.
시골마을에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는 모두에게 행복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아몬드 봉봉♡
채이가 좋아하는 건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오빠가 좋아하는 민트 초코는 깜박했네ㅋ
맛있게 먹었으니 이제 잘 시간.
세상 고요한 음성으로
"우리 아가 잘 자~~" 했더니,
너무도 낭랑한 목소리로
"별말쭈믈!"
"켁"
대응 속도가 5G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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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취!! 하잉 재채기하기 싫어!
재채기하려면 팔도 필요하고 손도 필요하잖아!!"
어휴~
너의 혼잣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그럼 팔, 손이 필요한 밥은 왜 먹니?
코로나 교육으로 재채기할 땐 손으로 가리거나 팔로 막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순간적으로 나오는 재채기에 팔과 손을 반 밖에
못 올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함을
저렇게 하소연함으로써 푸는 듯...
엄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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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다!
뼈뼈로!
채이 언어는 늘 신박하군!
또 네 덕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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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는 날이었을까?
열심히 운전을 하는데 채이의 낭랑한 목소리.
"우와! 방금 예쁜 멍멍이 봤어!! 개 같은 거!!!"
푸하하하하..
어째 내 귀에는 '개 같은 거'만 와닿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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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다음부터는 미용실 가세요.
하필 오늘은 남편이 고등학교 친구들과 각자 아들들만 데리고 여행 떠나는 날....
아들.
아빠 잘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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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필터 점검하는 날이다.
요즘은 점검원도 외국인이네~
그래도 진도에 16년 차 살고 있단다.
나보다 훨씬 선배다.
그녀는 아들이 둘이 있단다.
채이를 보더니 귀엽다며 말을 건다.
"이모 자전거 태워줄래?"
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왜 안돼~?"
채이는 낮고 정확한 음성으로 말한다.
"부서져요...."
속으로 푸학!
아놔 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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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가면~
엄마도 없고
어린이집 가면
장난감도 재미없고
어린이집 가면
친구들도 싫고...
엄마! 다은이가 나 미워해!!
다은이는 이불도 열 개 넘는대"
흐어.....
그 노래를 그렇게 부르면
어쩌자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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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귀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음성.
"엄마 채이 커서~ 립쑤키 사줄게 립수키"
아.. 침 튀기지만
"응 그래.. 꼭 사줘~" 하며 미소 지어 보인다.
고마운 내 딸.
기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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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시불 그려줄게! 시불!"
흠칫!
뭐야! 채이야~ 하고 스케치북을 보니
세상 크게 적힌 숫자 10.
그렇다.
삶에 쩔고 타락한 나는 그것을 그것으로 들은 것이다.
10을 그린 채이야..
오해해서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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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부러울 것 없는 투샷.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선생님께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인사 잘하고 다녀~"
"네!!!"
남매는 그렇게 제 갈길로 총총 떠났다.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돌아서니 다다다다다
일찍부터 이불을 보듬고 노예처럼 돌고 있는 세탁기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탈수를 시작했고 이제 거의 끝났다.
물기가 빠진 이불을 널고 두 번째 세탁 버튼을 누르고
자리를 벗어났다.
며칠 전 출판사에서 보내준 서포터즈용 책을 옆구리에 낀다.
어느 자리에서 읽을 것인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부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책을 보다가 그대로 잠들기 좋은 자리를 고르는가 싶기도 하다.
입에서 아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늘은 이대로 푹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