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땀이 차올랐다.
눈을 꼭 감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읽기 1-2(1989.9.1.) 지은이 : 문교부, 연구한이 : 한국교육개발원, 펴낸이 :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초등학교 1학년 국어시험을 볼 때였다.
둥근 달, 남산은 알겠는데 네모 안에 말은 뭔지 모르겠다.
입을 달싹거려도, 머리를 아무리 갸웃거려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다른 문제를 풀었다. 그러다가 생각나는 수가 있으니까.
다 풀고 다시 그 문제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안개처럼 흐릿했다.
번호로 나왔으면 좋았을걸.
1) 호빵 2) 접시 3) 찐빵 4) 쟁반
이렇게 나왔으면 정답을 고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네모 안에 직접 써야 했다.
'뭐지? 뭐였더라.'
시험인데 빈칸으로 낼 수는 없었다.
나는 두 글자를 찾기 위해 책상 속을 더듬었다. 국어책이 손에 잡혔다. 번개같이 책에서 보름달 그림을 찾아서 정답을 썼다. 처음으로 ‘커닝’을 했다. 손뿐 아니라 얼굴에서도 땀이 났다.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내 귀에 들렸다.
그날 이후, 보름달만 보면 바르르 떨며 서랍 속에서 달 그림을 찾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 제대로 ‘달’이 들어온 날이었다.
그 뒤로 달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어두운 밤하늘에 하얗게 빛나는 달은 장난꾸러기같이 내 뒤를 쫓아왔다. 그러고 보니 달의 모양도 바뀌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떤 날은 둥글다가, 반쪽이었다가 손톱만 했다. 나는 반달이나 초승달에 더 끌렸다. 아무래도 보름달을 보면 ‘쟁반’이 떠올랐고, 그건 잊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사 가는 전날이었다. 이삿짐을 미리 싸서 휑한 방에 누웠다. 마지막 밤이라 잠은 오지 않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옹달샘처럼 퐁퐁 떠올랐다.
감나무에서 떫은 감을 미리 따서 먹던 일
친구가 우리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애매하게 우리 집 옆 2층 양옥집을 가리킨 일
동네 아이들이랑 몰려다니며 눈싸움과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일
그러다 갑자기 내일은 어떨지 하는 마음이 들자, ‘쿵’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 울렁거렸다.
전학 가서 만나는 반 아이들은 어떨까?
선생님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처음 만나면서 뭐라고 인사를 하지?
짝꿍은 누가 될까?
전학생이라 텃세 부리며 안 놀아주면 어쩌지?
도심 아이들이라고 공부를 잘할까?
너무 떨려서 친구에게 인사를 못 하면? 가자마자 시험을 보면 어쩌지?
떨어져서 넘어졌는데, 그 위로 바위까지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다.
달은 여전히 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말이야.
내일 저 달을 바라볼 때 나는 어떨까?
지금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다 알게 되겠지.
내일도 여전히 저 달은 떠 있을 거고.
나는 이사한 집에서 저 달을 보고 있을 거야.
낮에는 전학 간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첫인사도 잘했을 거야.
울렁거렸던 내 마음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어릴 때 나는 잘하고 싶었다.
시험을 보면 백점을 맞고 싶었고,
전학간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었다.
안 그래도 됐는데 그냥 내 모습 그대로 잘 있기만 해도 되는데
그때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요즘은 보름달도 반달도 그믐달도 다 아름답게 보인다.
살다보면 어떤 때는
보름달처럼 꽉 찰 때도
그믐달처럼 다 비울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
원하는 걸 얻을 수도,
다 된 줄 알았는데 놓칠 수도 있다.
실수하는 구멍투성이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준다.
오늘의 실수로 내일의 나는 조금 더 지혜로울 테니까(아니면 말고)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멋지다고 인정하면서
그냥 지금을 즐겁게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