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신라 경순왕의 34대손이다. 엄마가 조상을 들먹이면 아버지는 꼼짝 못 했지만, 친할머니는 “망한 나라의 왕도 왕이냐!”며 대놓고 비웃었다. 진 씨인 친할머니는 벼슬한 조상 이름 하나 대지 못하면서, 마지막 왕손을 무시할 정도로 당당했다.
하긴 할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갔으면서, 유치원 교사였던 며느리를 우습게 알았으니 큰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반이나마 왕손의 피가 흐르는 게 은근히 자랑스러웠나 보다.
“와, 저기 경순 왕릉이 있네.”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올 7월 말이었다. 나는 친구와 연천 고랑포를 지나다 ‘경순왕릉’ 표지판을 보자 너무나 반가워 소리쳤다. 엄마가 경순왕 34대손이라고 했더니, 친구는 조상의 묘를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해서 선뜻 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팔팔 끓는 더위가 달려들었다. 데일 듯 따가운 햇볕을 모자로 가리고 주차장을 벗어나자 나무들이 호위무사처럼 서 있었다. 양쪽에 서 있는 나무들은 터널 같은 그늘을 만들어 햇빛을 막아주었다.
왕릉 해설사의 집 앞에는 작은 오토바이가 있었고, 안에는 노인이 한 분 계셨다. 언덕 위 왕릉은 장마 후라 그런지 풀이 무성히 자랐고, 흙이 보이는 곳도 있었다. 브런치에 역사 탐방글을 발행하고 있는 친구는 경순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역사탐방에세이: 예담작가)https://brunch.co.kr/@sisarang21/32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게 평화적으로 넘기면서 왕건의 첫째 공주인 낙랑공주와 결혼을 했다. 마의 태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던 낙랑공주는 태자가 끝까지 항쟁하며 금강산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뻘인 경순왕과 결혼했다. 경순왕은 개경 궁궐 동쪽에 좋은 집에서 살았다.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고려 5대 경종과 혼인하여 높은 지위와 식읍을 받기도 했지만,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우대에 불과했다.
경순왕이 죽어서 고향인 경주에 묻히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운구 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자, 고려 황실에서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라며 막았다고 한다. 경주에서 장례가 치러지면 자칫 민심이 동요할까 염려스러웠나 보다. 그래서 경순왕릉은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 지역을 벗어난 유일한 능이 되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개경에서 장례를 치를 걸 그랬나?”
내 말에 친구는 그냥 웃기만 했다. 경주도 개경도 아닌 고랑포 근처에 있는 경순왕릉을 보며 나라 잃은 왕의 비애를 느꼈다. 죽어서도 고향에 묻히지 못한 신라의 마지막 왕. 게다가 연천 고랑포는 한국 전쟁 중 격전지라 비석에 총알이 스친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너희 엄마 고향이 이북이니까 낙랑공주 후손이네.”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예전에는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으니 가족과 함께 1.4 후퇴때 피난 온 엄마는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후손인가 보다.
혼자 지내시는 엄마를 방문하며 경순 왕릉에 다녀온 걸 얘기하며 사진을 보여 드렸다. 여든이 훨씬 넘은 엄마는 왕릉 찍은 핸드폰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하셨다.
“왕릉이라 좋구나. 지켜주는 사람도 있고. 연천이니까 네가 가볼 수 있었네.”
그러고 보니 엄마는 경순왕의 후손답다. 낙천적이고 무엇이든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엄마. 무고한 백성이 힘들어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 한 경순왕. 온순하고 품위 있는 평화주의자인 게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