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인 Z Dec 21. 2020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 어려운 이유

일상적인 세뇌에 대한 고찰

영화 일은 "1주 7일 동안, 1주 40시간+휴일 및 연장근로(12시간)를 포함하여 최대 52시간까지 근로할 수 있다" 고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예외인 경우가 허다하다. 

계약서에는 스텝들과 협의 후에 조정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들어있고, 명시되지 아니한 상황은 영화계 관행에 따른다는 표현 또한 적혀있다. 


갑과 을이 평등한 관계에서 협의를 한다는 게 정말 가능한가?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단체협상을 하면 되지 않나고 하겠지만 많은 경우에 통상임금에 대한 협의만 하고 출근을 한다. 

계약서는 촬영 직전에 쓰기 때문에 계약에 대해 불만이 생기면 그만두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또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윗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퇴근을 안 하면 먼저 집에 간다고 말하기가 정말 힘들다. 이건 다른 직장인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나마 촬영에 들어가면 다른 스텝들의 반대로 당일 분량을 다 못 찍고 그만 찍는 경우도 생기지만, 

정말 드문 경우이고, 그래도 영화는 완성해야지 하면서 참고 일을 한다. 


프로덕션 단계에선 12시간 촬영 기준으로 보면, 

식사시간을 포함한 휴게 시간 2시간이 무급으로 주어진다. 

이걸 꽉 채워서 촬영하는 날엔 막상 현장에 나와있는 시간이 14시간이나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하면 앞뒤로 1시간씩 16시간. 

촬영 시간만 12시간이고, 뒷정리 시간은 짧게는 30분에서 1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이 시간은 노동시간엔 포함하지 않는다. 

보수적으로 30분을 잡아도 16시간 30분을 일을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24시간. 거기서 16시간 30분을 빼면 7시간 30분이 남는다. 

만약 촬영지가 숙소와 가깝다고 치고 1시간을 빼면 8시간 30분. 

개인에게 수면시간 포함해서 8시간 30분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빠진게 있다. 

연출팀은 다음날 촬영 계획을 위해 콜시트 (타임테이블) 같은 걸 짜는데 정말 짧게 잡아도 30분이 소요된다.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스크립터를 예로 들면 그날그날 촬영한 데이터를 정리해서 편집실과 후반 업체에 넘겨줘야 한다. 

업무에 능숙해도 2시간은 걸린다. 

아까 남은 8시간 30분에서 콜시트 작성 시간 30분과 데이터 정리시간 2시간을 빼면 

하루 중 내게 남은 시간은 6시간이다. 

그 시간을 수면으로 채워도 잠이 부족하기에 개인 시간을 가지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라는 게 없이 꾸역꾸역 참으며 닥치는 일들을 처리하기 바쁘다. 

이렇게 3~6개월 가량 보내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몸을 회복하느라 많은 돈을 병원비로 쓰게된다. 


물론 쉬는 날도 있다. 


제작사들은 최저시급으로 인해 높아진 인건비와 12시간 촬영으로 상승된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프리 프로덕션 시간을 줄여왔다. 첫 영화가 8개월을 준비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100억이 넘는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 기간은 5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촬영을 위한 장소 섭외를 다 끝내지 않고 촬영에 들어가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고, 

마지막 영화는 20% 정도의 장소만 확정을 짓고 촬영을 시작했다. 

그 부담은 사실 새로운 인력 추가로 채워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는 없다.

고스란히 프로덕션으로 넘어온 업무들로 인해 쉬는 날 노트북을 켜야 했다. 

새로운 헌팅지 확인을 위해 나가는 날은 거의 하루를 온전히 확인헌팅으로 보낸다. 

장소가 확정 되면 바뀐 장소로 인해 생기는 타 팀의 궁금증을 처리해야 했기에 업무 전화를 그 후로도 계속 받아야 한다. 


물론 이 시간에 일하는 건 불법이지만 다른 인력으로 대체할 수 없기에 추가 계약 시간을 50-100시간 정도로 협의해서 계약서를 하나 더 작성한다. 100시간은 정말 양심적인 경우고 대부분 50시간 내외인 것 같다. 

같이 일했던 연출부 친구가 시간이 부당하다며 더 올려야 한다고 나섰지만 계약서 상에 100시간을 채우면 정말 죽도록 일해야 할 것 같아서 피하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돈이라도 더 받을 걸 그랬다. 


한 달 동안 근무시간으로 인정받고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250-300시간이 된다. 

1년으로 계산하면 250시간으로 잡아도 3000시간이다. 

2017년 OECD 국가 연평균 노동시간 1등의 수치를 훨씬 웃돈다. (참고로 멕시코였고 2258시간이다.) 

실제 근무는 거기에 더해 매달 100시간 정도는 무급으로 일을 한다. 

정확히 모든 시간을 더해보진 않았지만, 2018년 전에는 계약서 상에 협의한 시간이 400시간이 넘는 경우가 대분분이었다. 전체 스텝을 기준으로 적용하는 촬영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하는 연출부의 업무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에 더 많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지은씨의 고백을 보고 많이 안타까워했는데, 

경제적 자유가 없는 사람이 맨몸으로 세상에 나오기란 정말 힘들었을 거란 걸 이제야 공감한다. 

나에겐 이 시스템에 대한 저항은 생계의 위협과도 같았기에 벗어 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완벽해야 내가 내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에 몰두했다. 

부당함을 발견할수록 흠이 잡히지 않으려 밤을 새우고 일을 해냈다. 

그래야 내가 내는 목소리는 그들과 다르게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그 정당성에 세뇌되어 추가 시간 계약을 다시 하자는 친구의 주장에 연대하지 못했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은 개인의 흠결 유무와 상관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했다. 


세뇌의 영문 표현인 'brainwashing'은 중국식 표현인 洗腦(씻을 세, 뇌 뇌)를 직역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습관처럼 써왔지만 뜻을 뜯어보면 정말 무서운 단어다. 


나는 부당함을 알았지만, 그건 그냥 안 거였다. 안다고 벗어날 의지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내려놓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회에서 습득하고 배워왔던 모든 걸 다시 뜯어볼 순 없겠지만, 이제부터라도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거나 내가 예민하게 굴거나 화가 나는 게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다시 뜯어볼 용기를 내어야 할 것 같다. 



이전 01화 영화인 Z의 고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