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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Jan 01. 2021

잘못 끼운 첫 단추

2021년을 시작하며 첫 단추를 다시 채워보자

"사모님, 안녕하세요. 1층 방입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 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면목없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1층 드림"


2011년 1월에 한 시나리오 작가가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지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죽었지만 며칠을 방치된 뒤에 발견되었다. 

'버티는 놈이 이긴다'라는 말이 공공연한 영화계에서 그도 미래를 위해 성실하게 버티면서 보냈다. 

뒤늦게 그의 이름을 딴 법이 제정이 되었지만 '인간 실격'의 시대에서 안전지대는 없었다.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생계는 결국 개인의 책임이라는 비난만 남았다. 


2005년 입학할 당시 한국 영화계는 소위 르네상스 시대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영화산업은 매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매년 최다 관객수를 갱신하는 영화들로 인해서 

그 외에 모든 영화가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사실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내 꿈을 펼쳐라고 종용하던 시기였다. 

거기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메시지까지 더해서 

20대에 겪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은 으레 겪는 통과 의례로 생각했다. 

오히려 전통적인 직장의 취업보다 영화계로 가는 게 

이미 양극화되어 버린 사회를 피해 가는 선택이라 생각했었다. 

거기다 정년이 없으니, 고령화 사회에 내 능력만 된다면 평생을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꾸는 꿈이 자본에 예속된 채 꾸는 꿈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꿈과 직업에 대한 구분조차 못했던 처지였다.

한 작가의 죽음은 운 나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 정도로 치부하고 잊어버렸다. 

사회는 영화계 스텝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듯했고,  

4년 간 배운 전공을 바꿀 정도의 각성을 하지 못했다.  


10년을 버틴 이 곳 또한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였다. 

어설프게 예술의 옷을 입고 제대로 된 체계조차 없어서 관행에 따른 심한 착취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걸 알기엔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의 나는 너무 순진하고 안일했다. 


당시에 나는 연이은 입시 실패로 인한 늦은 입학에도 불구하고 2년 간의 휴학을 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의 반 이상을 해외 체류를 하며 보냈다. 

그 기간 동안 2008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도 지나갔다. 

스마트 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고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불안했지만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경험했고, 그로 인한 살아있다는 감각들로 인해서 

무엇을 선택해도 열심히 노력하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복학했을 때는 가장 고령(?)의 학생이었다. 

2년 사이 학교에는 현장에서 감독을 하는 교수님이 수업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동안 상업 장편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은 교수들이 이론만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커리큘럼에 불만이 많았기에 너무 기뻤다.  

여전히 어린 나이이지만 4살이 어린 동기들보다 교수님과의 대화가 더 즐거웠다. 

그가 하는 수업은 학년이나 타 전공까지 가리지 않고 찾아서 들었다. 

1학년을 위한 '시나리오 작법' 수업 때의 일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을 재연하며 그가 책상 위로 올라갔다. 


"시나리오를 쓰는 법은 자신이 늘 보던 위치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가 요지였다. 


당시 유일하게 영화를 본 내가 먼저 책상 위로 올라갔다. 

이제 갓 영화과에 입학한 친구들이 1989년에 개봉한 영화를 보았을 리가 없었다. 

물론 불법 다운로드의 시대라 노력하면 볼 수 있었지만, 

그건 애초에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걸 알고 난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색해하며 뒤늦게 책상 위로 올라서는 후배들을 독려했고, 

내 인생에도 '키팅 선생님'과 같은 멘토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졸업 영화를 한창 만들 당시에 교수님이 곧 영화를 촬영한다는 소식이 맴돌았다. 

졸업 예정자 모두들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고, 나라고 뭐 다를 바가 있었겠는가? 

기대와 다르게 교수님은 그 어떤 확답이나 언질을 주지 않았고, 졸업이 다가오자 모두들 초조했다. 

그즈음 학생들 사이에선 경쟁이 붙었고, 서로를 감시했으며, 누군가 교수님과 시간을 보내면 시기했다.  


어느 날 진학상담을 위해 교수님 방을 찾아갔고, 그가 내 귀를 만졌다. 


만져도 가만히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했고, 빠르게 화제를 돌리고 그 방을 나왔는데 이후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가 나를 학생 이상으로 좋아해서? 아니면 딸 같은 마음에? 

그는 학생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애쓰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래도 되고, 아무런 뒷감당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영화과를 졸업하고, 몇 달을 백수로 보냈다. 

많은 졸업 동기들이 전공과 다른 선택을 하며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지만 나는 방황했다.

잠깐의 제주도 여행도 다녀오며 여유로 날 치장을 했고, 

불안하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며 그 시간을 견뎠다. 

영화 말고 다른 일을 한다는 걸 선택지에 올리지 않았다. 

하염없이 올레길을 걸으며 그 일을 곱씹었지만 해결방법을 몰랐다. 

몇 달을 흘려보내면서 교수님 방에서의 일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영화 만들기는 정말 즐거웠다.

공평하게 제작비를 내어 서로 품앗이를 해주며 작품을 완성해 나갔기에 그 과정들이 너무 즐거웠다. 

서로 작품을 위해 싸우고 함께 밤을 새우는 것 마저 미화시켜 낼 열정이 있었다.  

나는 열렬히 영화를 사랑했다. 

그 사랑을 버릴 수 없었기에 나를 버렸다. 


20대의 나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상적이었다.


그 해 여름 교수님 영화의 연출부로 일을 시작하였다. 

커리어는 쌓여갔지만 시작부터 내 능력으로 쌓지 않은 것만 같아서 끝없이 흔들렸다.

일을 잘한다는 칭찬은 더욱 나를 옭아매었다. 

좁은 영화계에서 나를 향한 그의 칭찬들이 들려올 때면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져 더더욱 운신의 범위가 좁아져갔다. 


누군가 내 시작을 알게 되면 어쩌나..

내가 잘해서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니면 어쩌나..


그 '어쩌나'들이 모여서 잘하기 위해 더 애를 썼다. 

그렇게 애썼지만 나에게 남은 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10년 전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외면했고, 선택의 자유를 눈 감아버렸다. 

내가 나를 버렸고, 그런 나를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늘 시달렸다. 

선택의 자유로 느낀 살아있다는 감각은 빠르게 잊혀갔다.  


뒤늦은 미투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나는 나를 돌려놔야 했고, 그 첫 단추를 다시 채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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