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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Jan 02. 2021

첫 영화의 추억

라때 같은 소리지만 정말 그랬다.

"지금 내가 하는 기록들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쓰일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또는 최소한 먼 훗날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기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식으로 적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느낌들이나 나중에 돌이켜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이나
잊히면 아쉬울 법한 순간들에 대한 예민(?)한 기록들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의 감정은 꿈속을 걸어가는 듯하다.
새롭고 낯설고 약간의 설렘과 흥분과 함께
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낯선 기대감이 뒤섞여
전혀 다른 내가 되어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11년 6월 출근 첫날 내가 썼던 일기의 일부분이다. 

그해 졸업생 중 남학생, 여학생 한 명씩 뽑아서 교수님이 감독을 하는 연출부로 데려갔다.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계에서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학과장은 그런 특혜를 감사해하고 '연출부 일기' 같은 걸 기록으로 남기라고 했다. 

좋게 포장했지만 결국은 학교 측도 성과에 대한 기록이 필요했다. 

결국은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저임금으로도 특혜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일기를 쓰며 열정을 불태우는 노동력이 필요했던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이 뽑힌 P군은 쓰지 않았고, 나만 쓰고 있었다. 

억울한 감이 있었지만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던 내 감정이 

기록으로 남아 나를 돌아보게 해 주었으니 

결과적으로 고마운 일이다. 


일기는 앞으로 펼쳐질 영화계에서 버터내야 할 나의 운명의 복선이었다.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교수님 방에서 일어났던 일은 없었던 일로 잊어야 했다. 


시작부터 나 답지 못한 생활을 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땐 나도 부러움과 질투 섞인 동기들의 시선 속에 

우위를 선점했다는 알량한 우월감과 기쁨에 나의 감정들을 외면했다. 


첫날은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다. 

사무실의 모든 책상을 닦고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커피를 탔다. 

이젠 너무 뻔한 클리셰 같지만 정말 그랬다.  

오후에 시나리오 회의를 했고, 난 내 쓸모를 증명하려 열심히 의견을 피력했다. 

저녁을 먹고 미술 파트를 담당했던 연출부가 나와  P군을 불러냈다. 


그의 첫마디는 "어디서 감히 연출부 막내가 감독님 앞에서 입을 떼냐?"였다.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대답도 못했다. 

그 후로도 시나리오 회의 때마다 감독은 연출부 의견을 물었지만

다들 문제 제기하는 걸 매우 어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럼 감독은 상대적으로 편한 나를 콕 집어 의견을 물었다. 

발언권을 얻었다고 생각한 나는 내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런 나에게 돌아온 평가는

"이래서 여자는 눈치가 없어.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개념이 없네"였다. 


이때 그냥 썅년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럴 깡다구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감독과 친했고, 감독이 나를 편애할수록 더 괴롭혔다. 

그렇다고 나는 내 고민을 토로하며 감독과 둘만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P군은 꼬박꼬박 그들과 담배를 태우러 나갔고,

퇴근 후 술도 함께 마시며 그들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해갔다. 

P군은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고, 시키는 일만 했다. 

그들을 거스르는 행동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P군을 친구로 좋아했지만,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괴롭힘을 당했지만, 일을 잘하면 괜찮아질 줄 알고 더 창의적으로 열심히 했다. 

수동적으로 시키는 것만 하는 것도 어쩐지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 싫었다. 

그 창의적인 걸 그들이 싫어한다는 건 정말 뒤늦게 알았다. 

그들을 오빠로 부르고, 알아도 모른 척 물어보면서 의지하라는 P군의 조언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담배도 안 피우는데 비위를 맞추며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갈 수도 없었다. 

매번 지적질로 끝나는 술자리는 더더욱 가기 싫었다. 

어쩌면 이런 나를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불만만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남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군대를 안 다녀와 눈치가 없는 여자라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 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걸까?


첫 영화 현장은 내가 알 던 영화 만들기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고,

군대에서의 일화를 예로 많이 드는 걸 보면 군대 문화와 비슷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가 끝나고 그때의 연출부 중에 아직도 영화를 하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다. 


친구들과 단편을 찍을 때 정말 행복했는데, 

시작부터 스텝이 꼬였던 지난 10년 간을 곱씹어 보니 정말 미련했다.  


영화를 사랑했지만, 그걸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장 견디기 힘든 곳에서 찾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을 이 곳에서 보내면서 어느덧 영화를 보는 것조차 즐겁지가 않았다. 


이 글은 아직도 관두는 걸 망설이는 나에게 보내는 유서다. 


시스템을 벗어나 즐겁게 영화를 만들 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한국 상업영화 시스템의 종말 선언과 함께 

지금껏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이 보내는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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