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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준호 May 03. 2024

내 가슴 깊게 새겨진 영상들

     우리가 경험하는 삶은 대부분 시간이 흐를수록 어렴풋해지다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더러의 순간들은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영상으로 생생하게 새겨진다. 그리곤 때에 따라 영상을 그리움이나  아픔으로 비추며 삶의 푯대와 동력이 되기도, 좌절하게도 한다. 어떤 순간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가슴속에 그렇게 새겨지는 것일까? 호기심에 빠져있다가 땀에 관한 한 순간이 떠올랐다.   

    예배 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올 때면 어린이들이 우르르 나를 따르곤 했다. 그럴 때 난 준비해 두었던 캔디를 선한 표정을 하고서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땡큐, 해야지" 하곤 "하나만이야"를 덧붙이면서. "네"하고 달콤한 캔디를 받은 어린이들이 행복에서 나온 수다로 사무실이 떠들썩했다. 그러다 자신의 욕구를 채운 어린이들은 제각각 손을 흔들며 "빠이" 하고 그들의 놀이터로 향했다.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내고 정신이 멍해져 홀로 망중한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한 어린이가 사무실로 들아와 캔디가 들어 있는 서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캔디 먹고 싶은 욕망이 눈과 입에 어려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하나씩만 먹어야 해" 소리에 "네" 했던 기억이 그를 주춤거리게 하는 듯했다. 난 짓궂게 놀라 듯 "하나 더 먹으려고?" 했다. 어린이는 볼이 빨개지다 "엄마가 캔디 먹고 싶대"라고 주눅든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난 "엄마도 캔디를 좋아해?"라고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겨우 고개만 끄덕이는 어린이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비쳤다. 그리고 콧등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작 캔디 하나 더 먹으려 한 거짓말 때문에 나는 콧등의 땀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리곤 가슴속에 있던 영상하나가 불현듯 재생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외갓집에 갔을 때였다. 외할머니와 난 자루를 둘러메고 머루와 다래를 따러 평창강 건너 높이 솟은 백덕산을 오르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비 오듯 땀이 흘렀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할머니 괜찮아?"라고 물었다. 외할머니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너도 땀으로 목욕한 것 같구나." 했다.  '손자의 얼굴에 흐르는 땀이 자신의 피붙이 임이 확인되어서일까? 자신을 닮은 모습에서 하나 됨을 느껴서일까?' 행복에 겨워 힘든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외할머니와 하나임을 느끼며 "학교에서 청소를 할 때면 선생님에게 늘 칭찬을 받곤 했어요. 그러나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엔 친구들이 내게 불평했어요. 똑같이 청소를 했는데 나 혼자만 칭찬을 받는다면서... 그래도 억울하지는 않았어요. 미운 마음보다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청소를 하려고 했어요” 했다. 할머니는 대견스럽게 여기는 얼굴로 "성실하게 열심히 했으니 땀이 나고 칭찬을 받은 것이지." 하고선 미래를 기대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인적 없는 산에는 칡, 머루, 다래 넝쿨들이 어린 참나무를 기둥 삼아 서로 엉켜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 가득한 숲은 태초의 자태를 드러내듯 두려움과 위엄 그리고 평안을 모두 품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비밀스러운 넝쿨의 터널 속을 헤치고 들어가고 나는 이를 안쓰럽게 지켜보며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살지 못할까?' 질문하며 가슴이 아렸다. 

    외할머니는 넝쿨 속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머루와 다래를 떠서는 손을 뻗어 터널 밖에 있는 나에게 주었다.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이를 받아 자루에 담았다. 그러다 터널에서 나온 외할머니는 자루에 담긴 잘 익은 머루와 다래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행복하게 다래를 받아먹는 나를 바라보는 땀과 나뭇잎으로 범벅이 된 외할머니를 안쓰럽게 처다 보며 나는 "할머니 괜찮아?" 했다. 외할머니는 "너와 나는 똑같이 땀으로 목욕을 했네." 하시며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듯 행복한 모습이었다.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살랑거리는 산 등성이 밑 옹달샘 옆에 우리는 앉았다. 할머니는 아침에 준비한 도시락을 풀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친 듯한 할머니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이때 자신의 입을 벌리며 김밥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참나무 잎으로 만든 컵으로 맑은 샘물을 떠 나에게 자신의 턱을 들며 마시게 했다. 오물거리며 김밥을 씹는 나를 지켜보다가 다시 내 입속에 김밥을 넣어 주고 자신은 옆구리 터진 김밥을 얼른 입에 넣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할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와 둘만 사는 것이 외롭지 않아?"

"조금은...  그러나 밤엔 찬란한 별들, 낮엔 파란 하늘과 구름들, 들의 풀들과 꽃들 나무들 그리고 흐르는 강과 온갖 보물을 품고 있는 듯한 이 산. 모두 소꿉 동무들 같아. 그리고 너희들 만날 날을 손꼽으면 행복해져. 네가 오면 먹일 음식을 땀 흘리며 준비하는 동안 몸과 마음에서 못된 것들이 모두 빠져나오는 것 같아. 목욕하듯 땀을 빼고 나면 몸과 마음이 더 가벼워지거든.  그럴 때 네가 창의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세상에 필요한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면 더욱 신바람도 나." 외할머니는 먼 곳을 바라보듯 아련하게 이야기했다.  

    뿌리 깊은 진실과 사랑은 가슴 깊이에 영상으로 새겨지는가 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불러내 교감을 하는가 보다. 난 영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콧등에 송골송골 땀방울 맺힌 어린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캔디를 손에 쥐어 주며 이야기했다. "거짓과 싸우느라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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