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르게 하는 질문을 향해 인생을 걸고 도전하게 한 것
송집사는 목이 말랐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부지런히 선술집을 향해 걸었다. 술집에 다다라 미닫이 문을 활짝 열자 주인아줌마가 의아한 눈초리로 송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어쩐 일이에요, 집사님이."
"막걸리나 한 잔 줘요."
송집사가 의자에 앉으며 퉁명스럽게 반응을 했다. 아줌마는 괜스레 주눅 들어 주전자에 막걸리를 얼른 담아와 대접에 한가득 따랐다. 송집사는 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고개를 뒤로 제켜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켜곤 "아, 시원하다. 한잔 더요." 했다.
아줌마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송집사를 훑어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이 대낮에."
"철길 건너에 있는 땅을 팔아먹었어요."
"아니, 그 땅을 왜? 효자 노릇하는 땅인데..."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뭐 하느라 빚을 그렇게 졌어요. 성실하게 일만 하는 양반이."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해도 농사로는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를 감당할 수가 없네요."
"하긴. 농사지어서 자식 대학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이지요. 특수한 농사를 지으면 몰라도."
"땅문서를 내주는 일은 자식을 내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깟 땅을 자식에 비해요? 그것도 집사님이."
송집사는 막걸리 한 사발을 스스로 따라 단숨에 또 마셨다. 이를 본 아줌마는 어머니의 본성이 동해 "천천히 마셔요. 체하겠네!" 눈을 흘기며 말하고는 빈 잔에 술을 차분하게 따랐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농사지으며 땅과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땅은 땀 흘린 대가를 항상 탐스러운 열매로 보답을 했어요. 날씨가 고약하게 심술을 부리지 않는 한에는."
"그런데 왜 빚을 졌어요."
"팔아먹을 것이 많으면 똥값이 되고, 팔아먹을 것이 없으면 금값이 되는데, 탐스러운 열매를 많이 맺으면 뭘 해요."
송집사는 말을 마치자 다시 막걸리 한 대접을 꿀꺽꿀꺽 단숨에 마셨다. 그러곤 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아줌마에게 건네며 "아줌마도 한 잔 해요." 했다.
송집사와 아줌마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고 또 마셨다. 둘은 술을 술 술 술 목구멍으로 잘도 넘겼다. 그러자 깊은 가슴에 숨어 있던 이야기들이 술술술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튀어나온 말들은 허공을 떠돌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마시고 떠들고 하는 사이 송집사는 세상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과 혀는 둔해졌고 다리의 긴장도 풀어져 버렸다. 그리고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우울했다, 기분 좋았다, 흥분했다, 변덕을 부리고 머릿속에 있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뒤죽박죽 되었다.
문득 송집사는 복덕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젊은이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어르신은 좋겠어요. 아들 딸들 모두가 공부를 잘하니... 게네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몇 배의 땅을 사서 아버님께 드릴 거예요." 잊고 있던 돈 달라고 온 아들 생각이 났다. 양손으로 기둥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서둘러 술집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넓어졌다 좁아졌다, 꺼졌다 일어섰다 하는 길이 송집사에게 마치 연극 무대 같았다. 송집사는 때로는 재판관이, 때로는 반항아가, 때로는 힘없는 불쌍한 농사꾼이 되었다. "나쁜 놈들. 이자를 그렇게 비싸게 받아 처먹어!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존재야. 정직하게 근면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는데 왜 빚만 늘어나게 해. 빚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일할 시간은 주어야 할 것 아니야. 밤과 겨울에 억지로 쉬게 해서 쉼 없이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들면 어떻게 해. 공평하게 세상을 운영해야 할 것 아니야. 더러운 세상."
남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호령과 불평을 하고 또 하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다리와 팔과 마음을 힘겹게 이끌고 집에 겨우 돌아온 송집사는 아들을 얼싸안고 “내 새끼” 하며 볼을 비볐다. 술 냄새가 역겨워 품을 빠져나간 아들을 보고 "자-식" 하고 미소를 짓다 부인에게 "그래도 팔아먹을 땅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이것마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너털웃음을 웃다 중얼거리다 화냈다 호령하다 넋두리하기를 반복하고 또 했다.
이를 짜증스럽게 지켜보던 유천이 "우리 농사짓지 말고 땅 다 팔아서 시내로 가서 장사해요." 했다.
"하하하하 이놈아. 내가 그 생각을 몇십 번, 몇 백번을 한 줄 알아? 그럴 때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누에는 뽕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거야' 하는 소리를 가슴속으로부터 듣고 또 들었다. 너의 삼촌이 장사하는 것을 늘 본다. 물건을 살 때도 팔 때도 저울에 속지 않으려 속마음으로는 눈에 불을 켜고, 겉으로는 간과 쓸개 다 빼놓고 아부하는 것을... 너 그런 것 알기나 알아?"
"아무리 그래도 농사짓는 것보단 낫겠지요."
"네가 몰라서 그렇지, 신뢰하는 친구에게 고추를 사 가지고 와서 달아보면 근수가 터무니없이 모자랄 때가 많대. 사온 고추를 쏟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도 허다하고. 그런 속에서 너 살 자신이 있어?"
"어디든 그런 인간은 다 있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어디 인간만 그래요? 땅도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좋은 땅 덕으로 우리가 사는 것 아니에요? 세상이란 그렇게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만족시키기도 하며 우리를 먹여 살리는 거예요. 그런데 농사는 풍년이 들면 농산물 값이 폭락하고, 흉년이 들면 값은 오르지만 팔아먹을 것이 없어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해마다 야금야금 땅을 팔아먹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도 땅은 열심히 일한 만큼 열매를 맺어. 날씨만 심술을 부리지 않으면. 그런데 인간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는 선한 척, 친한 척하지만 돈이나 이해관계가 얽히면 배신자도, 도둑놈도 사기꾼도 쉽게 되어 버리는 것이야. 그런 인간들이 깊숙한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고 있는 돈을 꺼내게 해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너 상상이나 해 봤어? 난 자신 없다. 비록 해마다 땅을 조금씩 팔아먹었어도 너희들 이렇게 공부를 시킨 건 농사야."
"그래서 농사보다 장사가 낫다는 거예요. 장사는 돈 때문에 이렇게 땅을 팔아먹거나 돈 꾸러 이 집 저 집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단 말이에요."
"장사가 땅 팔아먹지 않고 돈 꾸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삼촌이 장사하다 감옥에 간 것 너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해. 넌 그런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억울하고 불공평한 삶을 내 대에서 끝내려고 발버둥 치는 거니까."
유천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버지가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하면 하늘이 도와야 하는 것 아니야?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십일조는 꼬박꼬박 받아먹으며..."라고 구시렁거리다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유천은 밖으로 나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신비한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은 왜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것일까?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것을 보고도 왜 잠잠히 계시기만 하는 것일까?' 유천은 목이 말랐다.
이튿날 아침 송집사는 지난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벽 일찍 밭으로 나가고 유천은 아버지가 준 기숙사비와 학비를 받아가지고 학교로 돌아왔다. 땅을 팔아먹고 괴로워하는 아버지, 골병드는 줄 모르고 죽어라 일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질문이 일었다. '농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열매를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배운 것이 일하는 것밖에 없으니 운명이라 여기고 그냥 하는 것일까? 잘못되면 가족 모두가 쪽박 찰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땅을 팔아먹으며 십일조는 왜 꼬박꼬박 내는 것일까, 십일조를 하면 10배 20배 30배로 갚아준다는 성경을 믿어서일까? 하지 않으면 이보다 못한 궁핍의 벌이 내려질까 두려워 뇌물처럼 바치는 것일까?' 유천은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때 영철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만나 술이나 한잔 하자."
유천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버스 안에서 '무슨 일일까? 목소리가 밝지를 않았는데....' 선배가 걱정이 되었다. 타고 내리는 손님이 없는데도 버스는 정차장마다 쓸데없이 서고 여기저기 빙빙 돌아다니는 것 같아 유천은 조바심이 났다. 한 시간이나 지나 술집에 도착했을 때 선배는 혼자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혀가 살짝 꼬인 말투에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
"무슨 일인데."
"간과 쓸개 다 빼놓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왜 간과 쓸개를 다 빼놓았어?"
"사실, 친구들로부터 이기적이라는 소리, 쫌생이라 비아냥거리는 자존심 상하는 소리를 들으며, 외톨이 된 외로움을 힘겹게 이기며, 죽어라 공부만 해서 시험에 합격한 것 너는 아는지 몰라. 나도 서클 활동도 하고 싶었고, 불의에 항거해 정의로운 기사처럼 대모도 하고 싶었고, 연애도 하고 싶었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고도 싶었어."
"알지. 형의 그 사정과 진심을. 가난한 농사꾼을 아버지로 둔..."
"그렇게 해서 힘겹게 공무원이 되었는데 양심에 따라 살고 싶은 최소한의 욕망까지 빼앗는 거야.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죄 있는 놈은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죄 없는 사람은 억울함을 풀어주려는데, 위에 있는 놈이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에 맞추라는 거야. 그러려니 내 속에서 또 반항을 하는 거 있지. '네가 인간이야?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너 임용될 때 선서한 것 벌써 잊었어?' 하면서."
"형의 진심을 위에 있는 놈에게 이야기해 보았어?"
"해 보았지. 그때 돌아온 말이 무엇인지 알아?"
"뭔데?"
"'이 새끼 혼자 성직자 된 척하네. 세상은 간과 쓸개 다 빼놓고 사는 곳이야 인마. 정신 차려.' 그러는 거야. 처자식 먹여 살릴 방법만 있으면 벌써 때려치웠어. 간과 쓸개 다 빼놓고 어떻게 살아! 술이나 마시자. 어차피 세상을 바꿀 힘이 없는데."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고급 공무원 된 형을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윗놈을 잘 만나야 해. 윗놈을 잘못 만나면 사기꾼도 되고, 깡패도 되고, 도둑놈이 되다 결국 짐승보다도 못한 놈이 되고 만다니까. 윗놈만 잘 만나면 되는 것도 아니야. 갑과 을이 질서에 따라 정해지는 것만이 아니거든. 낮은 놈이 오히려 직위가 높은 놈에게 갑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위에 있다가 낮은 놈에게 갑질을 당할 때는 돌아버린다니까."
유천은 숨쉬기가 힘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고생하시는 부모님이 어깨를 펴고 갈지자걸음으로 동네방네 돌아다닐 것을 상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걱정이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해 마음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때 선배가 '공부를 포기해'라고 쐐기를 박는 듯한 이야기를 더 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학교 동창, 선배, 후배, 사돈에 팔촌, 이 끈 저 끈, 별의별 끈으로 엮어 부탁이 들어오고,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의리 없는 놈이라 뒤통수에서 비난을 퍼부어. 귀로 들리지 않는 험담을 듣는 일이 얼마나 살맛 나지 않게 만드는 줄 알아? 그래도 그것은 약과야. 꼬투리를 잡아 '고발한다' 협박도 하거든. 이런 일로 징계를 받고 사표를 내고 좌천되는 동료들을 볼 땐 삶의 회의를 느껴."
유천이 소주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먹고사는 것이 쉬운 곳이 없네요." 했다.
"출세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어. 그런데 허구이더라. 올라갈수록 더욱 짐승처럼 생명을 건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고, 진실한 우정도 정의도 내팽개쳐버려야 하고, 그래서 허탈해지고... 그래도 너도 나도 올라가려고 목숨을 걸고 있으니... 그래서 세상 꼭대기에 무엇이 있나 자세히 살펴보았어.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돈과 명예와 육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이 있더라. 그리고 그곳을 오르기 위해 줄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적당히 입도 손도 발도 잘 비빌 줄 알아야 하고... 이때부터 길을 가다 자영업 하는 사람들, 막노동하는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들을 보고 멍하니 서서 부럽게 바라보곤 하는 버릇이 생겼어."
"그들은 선배를 부러워하는데..." 유천은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온 유천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먹고 살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중에서도 공무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못된 윗놈을 만날 운명이 내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려 해도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줄을 잡으려 비비며 산다면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살아계실까, 계시다면 왜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것일까? 나쁜 놈들 쓸어 버리면 될 것인데... 아니, 다 쓸어버릴 것이 아니라 본보기로 몇 명만 처리해도 될 텐데... 인간이란 무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다.
할머니를 뵈러 갈 겨를도 없다. 잠재의식 중심에 자리하고 계시면서 문득문득 그리워 가슴을 아리게 하는 외할머니,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떠 오르게 하는 외할머니. 아들 다섯을 품에서 먼저 보내고 외손자를 아들 삼아 사랑하는 외할머니, 언젠가 쓴 미소를 지으며 하시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외손자를 섬기느니 방아공이를 섬기는 것이 낫다.'라고 동네 사람들이 그러더라. 난 콧방귀를 뀌고 말 같지 않아 대꾸도 안 했어."
유천이 집중을 하지 못해 세월을 까먹고 있는 동안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연락이 평창 이모부로부터 왔다. 의리가 발동되었는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인지, 친구가 운전하는 택시를 대절하여 서둘러 외할머니에게 갔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니 외할머니께서 아랫목에 반듯하게 누워 계셨다. 정신이 멀쩡하지만 여윌 대로 여윈 외할머니가 외손자를 보고는 반가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쁜데 뭐 하러 왔어!"
유천은 할머니를 보는 순간 울음이 왈칵 터져 나오는 것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 이때 옆집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녁에 할머니 집 앞마당을 지나는데 쓰러져 계시더구나. 얼마 동안 땅바닥에 누워 계셨는지는 모르겠어. 할머니도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르시고. 지나가는 길에 못 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날씨도 찬데..." 할머니께서 가냘픈 음성으로 "정신이 핑 도는 것을 느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겠어. 깨어 보니 방이야. 가끔 이럴 때가 있어. 이러다 괜찮아지곤 해.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왜 왔어!" 유천은 외로움 가운데 사시는 외할머니의 어려운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져 가슴이 아렸다.
"아픈 데는 없어요?"
손자의 돌봄을 느끼는 할머니는 행복한 눈으로 외손자를 바라보며 "아픈 데는 없어. 기운만 없지" 했다.
"식사하셔야지요."
"배가 고프지를 않아. 그냥 자고 싶어."
사랑하는 손자 앞에서 평안을 느꼈는지 외할머니는 깊은 잠에 빠졌다.
유천은 밖으로 나와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듯한 별들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저 별들을 지으신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왜 인간을 외롭게 살게 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찢어지는 듯 아픈 가슴으로 구경만 하고 있게 지어 놓았습니까? 우리의 삶에 당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불공평한 세상인데 왜 잠잠하게만 계십니까? 순수하고 정직하게 살라고요? 그렇게 살면 생존하기조차 힘겨운 세상이에요. 당신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닌 우리에게는.'
유천은 그칠 줄 모르고 터져 나오는 질문과 항의를 하다 허공에 하는 것임을 깨닫고 밤하늘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이때 평창 강의 흐르는 물소리가 “인생은 본래 허무한 것이고 고뇌와 고통과 기쁨과 함께 어우러져 흘러가는 우리처럼 소리를 내며 사는 것이야."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튿날 유천은 외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이야기했다. "늑막염입니다." 유천이 별거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다. "괜찮겠어요?" 의사는 긴 한숨을 쉬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네요. 집에 모시고 가세요. 평안히 계시다 가게 하세요." 유천은 황당하고 화가 나 싸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애원을 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수술은 할 수 없나요?"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냉정하게 "미안합니다." 하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유천은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무능을 실감하며 병원 천장을 무심코 바라보고 서 있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나섰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영문을 모르고 주무시는 외할머니를 본 유천은 교회로 가 예배당에 홀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엉엉 울며 기도를 했다. "살려 주세요. 이대로 가시면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평생을 외롭게 고생만 하며 살던 당신의 딸입니다. 아들 다섯을 품에 안고 저 세상으로 보내며 가슴에 피 멍든 당신의 딸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며 헌신하던 종입니다. 조금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짧은 기간이라도 좋으니 외롭지 않게 손자의 돌봄을 받게 하고 당신의 품으로 데려가 주세요."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야' 하는 소리가 귓전에서 냉정하게 들리는 듯하여 말없이 눈을 감고 있다 유천은 일어나 교회를 나섰다.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수 없이 많은 별들은 모든 것을 알 듯하여 속마음을 주저리주저리 모두 털어놓고 싶은 욕구를 느끼다 싸늘하고 차디찬 별빛을 마주하곤 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까?' 무능함이 서러움만 더하게 했다.
외할머니가 예전엔 하지 않던 거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화를 내며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유천은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에 대한 화일까? 믿음 없는 가족들에 대한 화일까? 하나님에 대한 반항일까?' 그러시기를 한 달이나 하셨을까? 다시 온유해지셨다. '삶을 포기하신 것일까? 무능한 피조물인 현실을 받아들이신 것일까? 삶의 동력과 죄의 원천인 욕망을 품고 살다 포기하여 순한 양처럼 되신 것일까? 하나님 만날 꿈을 꾸며 새 신부처럼 다소곳해지신 것일까?' 평안한 가운데 딸을 불러 장례에 관한 유언을 꼼꼼하게 하셨다. "내가 죽거든 평창에 계시는 김호중 목사님을 모시고 장례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 관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천으로 싸고 그 위에 하얀 국화꽃을 놓아줘." '곧 만날 하나님 앞에서 우유 빛을 한 맑고 고운 국화송이처럼 보이고 싶으신 것일까? 만날 주님께 국화꽃송이를 드리고 싶으신 것일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주님께 하신 듯 평온했다.
그날 외할머니는 당신의 딸에 의지하여 목욕하고 3일을 고요히 지내신 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크고 길게 내쉰 뒤 평안한 모습으로 고요히 계셨다. 유천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함을 느끼고 아직 온기 있어 보들보들한 할머니 손을 잡았다. 손을 놓으면 영원한 이별이 사실이 될 것 같아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부인의 임종을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시던 외할아버지가 외손자를 감싸 안고 소리쳐 실컷 울고 싶은 울음을 겨우 참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만해라. 이제 그만하자. 이제 그만 편히 가시게 하자." 차분히 말씀하시던 할아버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결단이라도 하신 듯 “이제 이별할 시간이야.” 읊조리곤 할머니 손을 놓지 못하는 유천을 뒤에서 안고 강제로 손을 떼어 내었다. 유천은 할머니 손을 놓으며 터져 나오기 시작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웃의 누군가가 죽을 때면 ‘누구든 한 번 겪는 일이니까’ 했는데, 영원한 이별이 현실로 다가옴을 실감하고는 하나님을 향한 증오가 일었다.
유천은 외할머니와의 이별이 꿈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현실임을 실감하고 절망감에서 오는 통증을 배로 느끼며 하나님께 항의를 했다. "왜 인간을 이토록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이별 가운데 살도록 지으셨나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사랑입니까? 고문이지." 유천은 할머니의 손길이 담긴 유품들을 볼 때마다 설움이 울컥울컥 올라와 울다 잠시 멈췄다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이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술밖에 없다. 하지만 마시고 또 마시고 정신을 잃고 다시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 후에도 외할머니가 계시지 않은 현실의 공허함은 너무 커서 괴로워하며 따졌다. "스스로 사랑이라 이름하신 당신은 인간들의 이별의 아픔을 헤아려 보기나 하셨습니까?, 왜 원인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어설픈 침묵은 분을 끓어오르게 하지만 온전한 침묵은 마음을 가라앉히는가 보다. 때로는 애절하고 간절하게, 때로는 싸움을 걸려고 따져도 완벽한 침묵 앞에서 유천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장례를 마치고 유천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다른 현실을 무기력하지만 증오를 품고 받아들였다. 죽은 자 앞에서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비참함을 삭이고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별의별 오만 가지 생각들이 나그네가 주인 없는 공원을 들락거리듯 머릿속을 침범했다. '자존심과 양심을 버리고 치사하고 비굴하게 먹고살기 위해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하여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래도 인간으로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은 본래 적당히 악과 타협하며 살도록 지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일 수 있을까? 왜 나의 처절한 질문에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실까? 기적을 한 번만이라도 보여주시면 이해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을 텐데… 악과 거짓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삶에는 왜 방관만 하는 것일까? 성경에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했다고 자랑삼아 기록해 놓고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달과 구름 그리고 산과 들의 생명들, 하늘을 나는 새들과 동물들 그리고 곤충들, 각기 다르게 짝짓기 하며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고 기르는 생명의 신비, 제각각 아름다운 색깔로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에게 먹이를 제공하며 종을 번식하는 오묘함, 이러한 신비를 떠올리면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는데,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오만 가지 생각들이 뇌리에 떠올라 집중할 수가 없어 괴로워하는 유천에게 옛적 한 날의 추억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펼쳐졌다.
유천이 열네 살 되던 해 여름 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랑하여 그리워하다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먹고 마시는 일들도 반복되면 시시해지다 싫증이 나는가 보다. 새로운 것을 찾아 유천은 멀미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는 외할머니와 2시간을 걸어 5일마다 열리는 평창 장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오른편엔 남한강의 여울물이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흐르고 왼쪽엔 기암절벽, 위로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는 파란 하늘, 그 아래로 구불구불 펼쳐진 신작로를 둘은 타박타박 걸었다. 유천은 강과 절벽 그리고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꼬부라진 할머니가 기우뚱하게 서서 허리를 펴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 괜찮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손자가 기특해서일까? 사랑이 느껴져서일까? 행복스러운 웃음을 웃으며 “응, 괜찮아!” 하시곤 손자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쉬다 걷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평창 장에 이르렀다. 손뼉 치며 발 구르며 "골라 골라" 소리치는 쉰 목소리의 아저씨, 북과 징과 꽹과리를 치며 호객하는 아저씨, 개똥아 소똥아 헤어진 일행을 찾는 요란한 외침들, 깎아 달라 밑진다 실랑이하는 생존경쟁의 아우성 속에 유천과 할머니는 살며시 스며들었다.
외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살 것을 찾고, 손자는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찾아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리며 다녔다. 몇 바퀴를 돌아다녀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하곤 멈추어 섰다. 낚싯대를 파는 곳이었다. 평창 강 맑은 물에 살고 있는 매자, 쏘가리, 꺽지, 뱀장어, 모래무지 어름치를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만만하게 보이는 낚싯대 하나를 잡았다. 가지고 싶은 것을 찾아 할머니가 기뻐할 것이란 기대로 미소 지으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자가 들고 있는 낚싯대를 넘겨받아 있던 자리에 아무 말 없이 놓았다.
유천은 "낚시하고 싶어요. 내가 제일 가지고 싶은 거예요." 했다. 그러나 도리어 할머니는 냉정해졌다. 유천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졸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대꾸 없이 손자의 손을 잡아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유천은 몸을 비틀고 궁둥이를 빼며 "다른 친구들은 다 낚싯대가 있는데 나만 없어요." 하며 조르고 또 졸랐지만 허사였다.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면 존재 가치의 즐거움을 느끼며 무엇이든 들어주셨던 할머니인데... 유천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다 머리를 왼쪽으로 힘없이 떨구었다. 그러곤 할머니 몇 발짝 뒤에서 입술을 삐쭉 내밀고, 두 팔은 덜렁덜렁 늘어뜨려 흐느적거리며 따라다녔다. 덩달아 얼굴이 굳어지고 입을 닫은 할머니는 애꿎은 돌들을 걷어차며 따르는 손자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여기저기를 허망하게 기웃거리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은 상한 마음으로 2시간을 걸어 오두막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시 새날이 오고 가기가 반복되며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혔다. 그리고 다시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사이 한 달이 꿈처럼 지났다. 내일은 헤어져야 할 시간. 며칠 전부터 말수가 줄어들다 그날은 아예 모두 입을 닫아 버렸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마지막 밤은 없는 듯 시간이 흐르고 아침이 왔다. 아침을 먹는지 마는지… 울적한 마음으로 한 달 전에 푼 짐을 다시 꾸렸다.
유천은 신작로에 나가 버스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질문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이별을 만들어 놓았을까?" 외롭게 사시는 꼬부랑 할머니를 두고 떠나는 이별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며 왜 아픈 이별 가운데 살게 하는 것일까?" 오지 않기를 바라던 버스가 얄밉게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모두의 앞에 와 멈췄다. 유천은 외할머니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울 듯한 표정으로 버스 안을 훑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인생의 무력함과 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버스는 뽀얀 먼지 속에 할머니를 팽개쳐버리고 떠났다. 멀어지는 버스를 멍하니 지켜보는 먼지 속의 할머니를 유천은 아린 마음으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버스가 산 모퉁이를 돌아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덜컹거리는 자동차 안에서 질문을 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살지를 못할까? 왜 인간은 이별의 아픔 속에 살아야 할까?"
영원한 나라로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 10년이 지난 지금 유천은 그때 아팠던 감정과 함께 철없을 때 할머니에게 준 상처가 되살아나 온몸과 마음에 통증을 느꼈다. 낚싯대를 사 주면 어린 손자가 위험한 물가에서 많은 시간 보낼 것이 염려되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아픔,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 상처받은 손자를 보는 할머니의 아픈 마음,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가는 버스를 멍하니 지켜보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나며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을 위해 매일 골방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던 모습, 손주들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신 애틋한 사랑, 방학이 끝나 집으로 돌아간 손자를 그리워하며 흘렸을 눈물을 모르고 산 데서 온 매정함이 뜨거운 눈물 되어 양 볼로 주르륵 흘렀다. 덩달아 흐르는 콧물이 눈물과 범벅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흐느끼는데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리고 '무엇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떤 곳인가, 나는 어떻게 생겨 먹은 존재인가, 이런 나의 삶에 하나님은 어떻게 개입을 하시는가"를 알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죽었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있음이 느껴졌다. 암흑으로 혼돈된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나가 잃었던 나를 찾고 잘 정리된 인생을 만들 설렘에 가슴이 벅찼다.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신앙인이 되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는 것을 할머니는 알까? 그리고 당신이 원하던 인생의 길을 걸으려는 것을 보여 줄 수 없는 아쉬움일까,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일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 올랐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합격'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아들의 결정에 어이가 없어 황당해 입을 쩍쩍 다시며 겨우 남은 텃밭까지 팔아먹을 생각에 목말라할 애처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의 힘일까, 욕망의 힘일까? 결단이 섰는데 따끈한 눈물이 양볼을 타고 입가를 지나 하염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