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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준호 Sep 21. 2024

이민자의 설움

설익은 사랑 익히기   

    일렁이던 파도가 서서히 솟아올라 뭍을 향해 돌진을 했다. 승환은 호기심이 일어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지켜보았다. 파도는 돌돌말이를 하고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철썩" 하고 곤두박질쳤다. 허망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워 혼돈의 늪에 빠져 있는데 투명하게 드러내는 액체 현미경처럼 파도가 어느새 변신을 했다. 그리고 갈색 다이아몬드처럼 맑고 영롱한 모래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훌쩍 바다로 돌아가버렸다. 승환은 이따금 바다와 육지가 끝없이 충돌하고 어우러지고 헤어지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며 이민자의 설움을 잊었다. 그리고 먼바다 건너 고향의 그리운 얼굴들을 떠 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이날은 파도와 모래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승환을 서럽게 했다. 그리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둥근 수평선을 바라보다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유천이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야?"

"저 수평선 건너편에서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있어요."

"뭐야?"

"어머니께서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있어요."

"아... 아니... 그랬구나"

유천은 들썩거리는 승환의 어깨를 말없이 감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둘은 라구나 비치의 절벽 밑 그늘 진 바위에 걸터앉았다. "철썩"과 "쏴"를 반복하는 파도처럼 울다 웃다를 거듭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난 삼 남 삼 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형들과 누나들은 장난감 다루듯 나를 대했지요. 난 버릇없는 말썽꾸러기가 됐어요. 그런데도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요. 어느 날 부모님께 미국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그래라"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눈만 껌뻑껌뻑거리고 계셨고... 한 달 후 난 미국으로 들어왔어요. 이곳저곳을 여행했지요.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그랬는데 생뚱맞게 여기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은 거예요. 어머니께 전화를 했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어머니는 쉽고 간단하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하시는 거예요. 나는 여행비자를 유학비자로 바꾸었어요. 그때부터 난 내 운명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거예요. 처음 미국으로 들어올 때 받았던 여행 비자를 유학비자로 바꾸어 이민국에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낙인찍힌 거지요. (미국 이민국에서는 본국에서 받은 비자를 끝까지 유지하다 돌아가기를 원해요. 여행비자를 유학비자로 바꾸려면 본국에 돌아가서 하기를 원해요. 그렇지 않고 미국 내에서 바꾸면 합법적인 신분이지만 그 상태로 미국을 떠나면 다시 미국으로 들어오기가 힘들게 된다) 난 그만 바다에 살며 육지를 연모하는 인어 신세가 됐어요."

승환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승환은 리쿼스토어에서 알바하며 유학생활을 했다. 권총을 든 강도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금고 안의 돈을 몽땅 털린 적도 있었다. 인종차별도 느꼈다. 신분차별도 겪었다. 언어장벽도 있었다. 문화차이로 조롱도 당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믿음인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인지, 서러움과 그리움을 잊기 위한 몸부림인지, 죽기 살기로 일하고 신분 유지를 위해 학교를 다녔다. 날이 갈수록 승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캠퍼스에서 한국인인 듯 아닌 듯한 여학생을 보았다. 몸과 감정 모두에 생기가 솟았다.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주제파악 해"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멈칫거렸다. 그사이 그녀는 대화하기에 너무 먼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한국인일까? 중국인일까? 일본인일까? 운전할 때도, 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호기심이 질문을 해댔다. 긴 머리 소녀 잔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화 한번 해 본 적 없는 사이인데도 사랑의 도파민이 흘러넘쳤다. 손님들에게 너그러워졌다. 시들다 단비 맞은 식물처럼 승화의 얼굴이 싱그럽게 펴졌다.   

    평소와 다르게 서둘러 일찍 학교를 갔다. 승환은 여인을 만난 이후로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이쪽저쪽 둘러보다 '상사병 증상?' 하고 피식 웃었다. 강의 없는 날에도 승환은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책장 숲에서 이 책 저책 겉표지 제목만 보고 뽑아 몇 페이지 넘기고는 다시 꽂았다. '오늘도 허탕이군' 혀를 한번 차고는 허전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나와 파킹낫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긴 머리를 출렁이며 그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콩닥거렸다. 승환은 슬로모션으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서서히 그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적당한 거리라 확신될 때 "후"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더듬거리며 겨우 인사를 했다.

"굿 에프터눈."

여인은 힐긋 쳐다보고 "굿 에프터눈" 치면치레 응답을 하고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 버렸다. 냉랭한 공기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상쾌한 향기를 승환은 킁킁거리며 코로 들이마셨다. 그리고 지나간 여인을 넋 놓고 바라보다 행여나 들킬까 얼른 돌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었다. 이 일 후 몇 번 스치듯 만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긴 머리 소녀는 항상 싸늘한 바람에 산뜻한 향만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인 학생회 모임엘 갔다. 예상이 적중했다.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몇 번의 마주침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느끼게 했다. 반갑게 그녀에게로 가 인사를 했다. "김승환입니다." "송미경이에요." 그녀는 길에서 만날 때와 다르게 상냥하게 반응했다.  용기 얻은 승환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어학연수를 받고 있어요."

"저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하지만 공부로 성공할 생각은 없어요. 부모님의 닦달에 그냥 다닐 뿐이에요. " 티 없이 발랄하게 맞장구쳤다.

승환은 궁합이 맞는 짜릿함을 느꼈다. 이후에도 한참 동안 대화를 했다. 

한쪽이 고음으로 노래하면 한쪽은 저음으로 화음을 넣고, 한쪽이 반박자 앞에서 멜로디를 인도하면 반 박자 뒤에서 응답하며 따라가고, 한쪽이 발로 박자를 맞추면 한쪽은 손가락으로 추임새를 넣는 듯 수다를 떨었다. 이민자의 외로움과 설움을 느끼던 둘은 서로의 반려자가 되었다. 몇 달이 지나 둘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물론 승환의 신분문제도 해결되었다. 두 사람은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중단하고 세탁소를 경영했다. 그리고 딸 아들 하나씩을 낳았다.  

    한 번은 유천이 세탁소를 방문했다.

“지나다 들렸어요. 지난주 교회에서도 못 보고. “

“토요일에 과음을 했어요."

"무슨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큰 걱정거리는 없어요. 그런데 외로움에 시달리곤 해요. 향수병인가 봐요. 그럴 때면 고향 노래를 듣다 바다 건너에 있는 친구들, 형제들, 산천들이 떠오르기 시작해요. 그러면 헤네시, 때로는 레드 메를로, 때로는 소주, 때로는 고량주가 필요해요."

"미경 씨와 관계는 어때요?"

"그저 그래요. 연애할 땐 대화가 잘 되었는데 결혼 후엔 너는 너, 나는 나로 살아요.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아 편하긴 하지만...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유천은 고민했다. 뭐라 기도를 할까. 신통력 있는 듯 굵고 위엄 있는 가성으로 기도하는 어느 목사의 얼굴이 떠 올랐다. '설사 내가 하는 기도에 하나님이 콧방귀도 뀌지 않더라도 승환이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다면 못 할 것도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머리에 손까지 올리고 해 버리자.' 작정하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민 생활하며 소외감, 외로움, 그리움, 힘겨움에 시달리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창의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당신의 아들입니다. 품은 사랑과 진실과 진리를 가족들이 서로 나누고 공감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승환은 큰 소리를 내서 응답하면 기도가 이루어질 것 같아 소리 높여 "아멘"으로 응답을 했다.

"비즈니스는 어때요?"

"손님은 늘고 있어요. 고객이 옷 입을 때 상쾌한 기분이 들고 존재감이 높아지게 하려고 풀을 빳빳하게 먹여요. 아주 작은 스폿 하나도 꼼꼼하게 살펴 제거하고 원색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옷을 입게 하는 것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승환 씨의 그 마음이 손님들에게 전달되는가 봐요."

"그럴까요?"

 "인간이란 본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존재이지요. 그런데 자연과, 인간과, 사회와, 진리와 물질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 있어요. 그래서 그 관계에 따라 나의 행복이 좌우되지요. 그리고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상대도 그에 따른 반응을 하게 되지요. 결국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나하기 나름이에요. 그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 조물주는 눈, 귀, 코, 입을 주시고 감각과 머리를 통해 이를 인지하고 해석하게 한 것 아니에요? 그래서 관계 속에 작용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상대가 나를 실망시키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귀 기울여 더 세밀한 감정의 언어를 듣는 실력을 키워야 하고, 마음을 넓혀야 하지요. 그리고, 희생해야 하고, 봉사해야 하고, 기다리며 설익은 사랑을 익히면 그만큼 나의 존재가치는 높아지게 되지요. 하지만 쉽지는 않아요. 그래서 바다와 육지가 반복해서 충돌하고 화해하고 어울리는 것처럼 우리도 충돌하고 화해하고 어울리는 훈련을 하고 또 해야 하지요."

    승환은 설교 듣는다는 느낌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집에서 뒹굴거리며 음주를 즐겼다. 어딘가에 가서 돈을 쓰고 피곤함만 안고 돌아오는 것은 승환에게 '휴가'가 아니었다.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자녀들이 자라며 뒷바라지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졌다. 그럼에도 학교뿐 아니라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수학학원, 태권도 도장을 부부가 번갈아 데리고 다니며 훌륭하게 양육하는 보람을 느꼈다.  딸이  "아빠 용돈이 필요해" 할 때면 "아빠가 은행인 줄 알아?" 시비를 걸어보곤 '난 너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야' 사랑과 존재를 묵언으로 과시하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었다. 용기도 주었다. "넌 잘할 수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야" 하면서.  이 일도 역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일이라 확신했다. 

    드디어 수고의 열매가 맺혔다. 딸이 프린스톤 대학에 입학했다. 마을 사람들은 승환을 볼 때마다 축하를 건넸다.  

"삶의 보람을 느끼시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좋은 학교를 보낼 수 있어요."

승환은 그때마다 손사레 치며 "한 것도 없어요." 라며 겸손을 떨었다. 하지만 목과 어깨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피곤도 가셨다. '경제학자가 되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까? 아니면 정부의 중요한 부처에서 일하게 될까? 아니면 금융가에서 큰돈을 주무르는 역할을 할까?' 상상만 해도 세상을 모두 손아귀에 넣은 것 같았다. 

드디어 딸이 졸업하고 재무부에 취직을 했다. 승환은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딸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은 분명 하나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세탁소 안 어디에서도 들릴 "날 보러 와요" 하는 전화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승환은 얼른 전화기를 들고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아빠 굿 뉴스야."

발랄한 딸의 목소리였다. 승환은 '굿 뉴스'라는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벌써 승진?'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굿 뉴스가 뭐야?"

"나 결혼했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날벼락이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농담이라 확신하고 다시 물었다.

"뭐라고 그랬어?"

"결혼했다니까. 그리고 둘이 함께 리쿼스토어 하자고 약속까지 했어."

승환은 갑자기 목과 어깨뿐만 아니라 팔다리 허리의 힘까지 싹 사라져 버렸다.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래도 희망의 끈놓을 수는 없었다. 

"아빠 엄마도 없이 무슨 결혼을 했다는 거야. 그리고 리쿼스토어는 또 뭐고." 애원하듯 이야기했다.

"아빠 엄마에게 경제적인 부담 덜어주려고 판사 앞에서 미석이를 증인으로 세우고 해 버렸어. 그리고 직장 생활하는 것보다 리쿼스토어하는 일이 훨씬 더 돈을 빨리 벌 수 있어. 아빠도 잘 알잖아."

"너 맨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승환은 화를 내고 싶었으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일단 집으로 와라. 와서 이야기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실망감과 배신감에 몸이 떨렸다. '어떻게 내 딸이 그럴 수 있어.' 승환은 목사인 유천에게 전화를 했다.

"만나고 싶어요."

    둘은 유천의 사무실에서 마주하여 앉았다. 승환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딸이 자기들끼리 판사 앞에서 결혼을 했대요. 목사님과 성도들, 그리고 친지들의 축복 속에서 혼인시키고 싶은 아비마음을 이렇게도 몰라 주다니... 그것 만이면 그래도 이해하겠어요.. 재무부를 그만두고 리쿼스토어를 한대요. 둘이서 같이.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며..." 

    "저도 딸 부부와 함께 식당엘 갔어요.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웨이트리스가 계산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사위가 두 개의 계산서를 달라고 하는 거 있지요. 자기들이 먹은 것은 자기들이 계산하고 우리 부부가 먹은 것은 우리 부부가 계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갑자기 속에서 불이 났어요. 그러나 웨이트리스에게 미소 지으며 "계산서 하나만 나에게 가지고 오세요"라고 이야기했어요. 딸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거예요. 우리는 자식이 출가를 했어도 온전하지는 않지만 경제공동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젊은이들의 문화는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민자의 설움 중 하나가 부모자식 간에 문화충돌을 겪는 것인가 봐요."

"이민자 아닌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우리는 우선순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호불호도 다를 뿐 아니라 문화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지 않아요?  이민생활과 무엇이 달라요? 사실 어디에 살든 이민자의 삶 아니에요? 내일이 나를 이민자로 만들고, 무섭게 발전하는 과학이 나를 이민자로 만들고, 자녀들도, 친구도 모두 나를 이민자로 만들지 않나요? 그래서 문화충돌을 겪거나 새로운 문화를 따라가기 힘겨운 것이고...  난 그 충돌을 파도가 육지와 부딪치고 아름다운 모래를 드러내고 놀이하고 애무하는 것처럼 신비하고 아름답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설익은 사랑도 폭 익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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