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몇 년부터 몇 년까지. 누군가의 생몰연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태어난 해와 죽은 해의 숫자를 헤아리며 그이가 살다간 시간을 조심스럽게 가늠해 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파열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무엇인가가 별안간 깨지는 소리. 인간 존재의 연약한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 굳건하다고 여겼던 내 일상이 허방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
나는 내가 영원히 살 것이라 믿기라도 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가,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이 언젠가는 끝장난다는 사실 또한 굳이 떠올리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머물다가 떠나기까지가 간단히 수치화된 한 줄이 나로 하여금 각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이름 옆 괄호 속에 몇 개의 숫자로 남으리라는 모종의 상실감과 함께 언제까지나 삶이 지속될 것만 같았던 막연한 믿음이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는다. 언젠가는 나도 죽게 된다고? 영영 사라진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느끼고, 손을 움직여서 뭔가를 그리거나 쓰고 있는 내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말이지? 도무지 믿기 어려운 고약한 농담 같다. 이건 내가 나 자신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겨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예정돼 있는 나의 죽음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앞서 살다간 다른 이들도 그랬을 것처럼.
누군가의 생몰연대는 그렇듯 순식간에 나를 어떤 인식의 절벽 끝으로 데려간다. 나는 위태로워진다. 모든 인간의 연약성 앞에 할 말을 잃는다. 연민 혹은 동지애. 우리 모두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어딘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구나. …문득 책상 위로 두 손을 활짝 펼쳐본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계속해서 쓰고, 또 써내려갈 수밖에. 그러니까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