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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사탕과 드럼소리 그리고 나의 겨울 방

레몬 사탕

by 김기수

레몬 사탕과 드럼 소리, 그리고 나의 겨울방


겨울은 이상한 계절이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조용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멈춘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은 소리를 삼키고, 바람은 생각을 감싸고, 집 안에 켜놓은 온풍기는 몸을 녹이며 마음까지 데우려 애쓴다.


나는 오늘도 혼자였다.

창밖으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다, 오래된 음악을 켰다.

폴 모리아.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어딘가 아주 오래된 방 안에 갇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그곳,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나만의 겨울방.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방 안의 공기가 바뀐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이 피어오르고,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바이올린이 조용히 선율을 그리면, 내 안의 기억도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피아노가 잔잔히 물결을 치면, 오래된 마음의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울린다.


그리고 마침내—

중간쯤에서,

둥, 하고 터지는 드럼 소리.


그 소리는 방 안의 고요를 단숨에 찢는다.

벽을 타고 바닥을 흔들고, 내 안 깊숙한 곳 어딘가에 떨어진 먼지를 툭, 하고 일으킨다.

그 순간 나는 눈을 감는다.

마치 그 울림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니?”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걸까?”

“혹시 무언가를 놓쳐버린 건 아니니?”


나는 대답 대신 작은 레몬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다.

사각거리는 포장을 벗기며 문득,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가 마음을 정돈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입안에 번지는 시큼한 맛.

처음엔 조금 당황스럽게 강한데, 그 안에 감춰진 달콤함이 곧 뒤따라온다.


사탕 하나가 녹는 동안,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다만, 천천히 녹아드는 그 감각을 따라가며 시간을 보낸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생각난다.

아주 오랜 시간 전, 내 겨울을 함께해주던 사람.

내가 차가운 손을 호호 불고 있을 때,

말없이 내 주머니에 손난로를 밀어 넣던 사람.

말수는 적었지만 눈빛은 깊었고,

그 깊은 눈빛 속에서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하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우리는 겨울마다 같은 길을 걸었다.

눈이 올 때면 아무 말 없이도 발자국을 나란히 찍었고,

커다란 목도리를 같이 둘둘 말고,

길거리에서 산 사탕 하나를 반으로 쪼개 건네곤 했다.


“이건 네가 좋아하는 레몬 맛이야.”

그 한마디에 나는 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레몬 사탕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사람의 말에는 늘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졌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 올 때마다 그 사람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내 기억의 어디쯤에서

겨울이라는 계절을 등에 업고

조용히 다시 걸어오는 것 같다.


지금 내 방 안은 조용하다.

온풍기 소리, 음악 소리, 그리고 아주 작은 내 숨소리.

레몬 사탕은 반쯤 녹았고, 그 시큼한 맛은 이제 부드럽게 달콤해지고 있다.


사탕이 녹는 속도만큼, 나는 나의 겨울을 되짚는다.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받았던 기억,

그 따뜻함이 너무 익숙해서 그때는 감사하지 못했던 기억.

지금은 다 녹아버리고 없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향처럼 남아 있다.


폴 모리아의 음악이 다시 한 곡을 시작한다.

이번 곡은 더 느리고, 더 감미롭다.

그리고 또,

드럼 소리가 울린다.

둥—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음악은 그대로인데,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듯하다.


그건 아마도 내 마음이 조금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혼자지만, 완전히 혼자인 건 아니다.

기억이 함께 있고, 감각이 나를 붙잡아주고 있다.

레몬 사탕 하나로 시작된 이 조용한 저녁은

그렇게 나를 다시 사랑하는 연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

보이지 않아도 머무는 따뜻함.

겨울방 한가운데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살아내고 있다.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

사탕이 다 녹기 전까지—

나는 그 안에서, 나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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