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만에 들어온 9월의 시골에는 제법 가을 냄새가 배어있다. 그 새 오드리( 우리 집 오골계 이름)의 물통은 바짝 말라있고 하우스의 고추들은 비에 젖은 빨래처럼 축축 늘어져 있다. 물을 주자마자 오드리도, 고추도 허겁지겁 물을 먹는다. 농사를 짓는데도 나름의 규칙과 약속들을 지켜야 한다. 벌려만 놓고 돌보지 못하는 상황들을 보며 문득 그동안 여기저기 늘어놓은 삶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줄이고, 버리고, 서두르지 않는 삶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게을러진 옆집 아저씨 논에는 풀이 벼랑 내기를 하는지 들쭉날쭉하다. 논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풀은 피다. (피:벼와 아주 흡사하게 생긴 풀 ) 오월의 모내기가 끝나고 유월쯤에 신출귀몰한 농부들은 벼와 똑같이 생긴 피를 밭에 난 잡초를 뽑듯 구별해 뽑아낸다. 눈을 씻고 보아도 내 눈엔 모두 벼처럼 보인다.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농부들의 손에 뽑혀진 피들은 논바닥 진흙과 함께 널브러져 생을 마감한다. 개중 살아남은 피들은 벼 이삭이 패는 시점에 똑같이 씨앗을 내어 놓는다. 벼를 제치고 솟아오른 피도 살 궁리를 한 것이다. 피가 그득한 옆집 논은 제멋대로 사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 같기도 하다. 자꾸만 들쭉날쭉한 논에 눈이 간다. 잠시 나도 들판의 풀들과 같이 자유롭고 싶다.
따갑다 못해 타버릴듯한 한낮의 가을 햇빛에 벼가 익는다. 여고시절의 어느 가을날, 청계사로 소풍을 갔다. 황금벌판에서 불어오던 벼 향기가 생생하다. 예나 지금이나 가을 들판의 향기는 변함이 없다. 실눈을 뜨고 햇살에 코스모스를 비춰보던 열일곱의 어여쁜 소녀는 예순 중반을 향해가는 은빛 머리칼의 근사한 할머니가 되었다.
오 대리에 대하여.
닭들은 부화된 지 6개월이면 대부분 초란을 낳는다. 흑심이 있는 우리들은 생후 6개월 이후부터 오드리를 유심히 살폈다. 알을 낳게 되는 신체 변화는 빈약하던 엉덩이에 깃털이 풍성해지는 것이라면서 딸들은 엉덩이 쪽 사진을 찍어보내라고 난리를 부렸다. 오드리의 엉덩이를 찍느라 마당을 수십 바퀴 돌아다녔다. 정말로 오드리는 엉덩이 부분에 털이 보송하니 소복해져서 제법 암탉의 자태가 났다. 이젠 때가 되었을까? 나처럼 딸들도 기대감에 들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바람은 지금껏 바람으로 남아있다.
나와 같은 종의 오골계를 방사해서 키우는 친구는 자기 집 마당 한편에 있는 풀숲에서 알 일곱 개를 발견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얼마나 부럽던지! 친구는 마당 구석구석을 잘 찾아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알을 낳을 때가 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인 것은 제때 밥도 안주는 엉터리 주인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처럼 닷새나 지나서 시골집에 오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오드리도 다른 작물들도 땡볕을 견뎌야만 했다. 우선 오드리의 정기적인 모이 수급을 위해 사료가 줄면 스스로 채워지는 모이통을 샀다. 깨끗이 물통도 걸어주었고 사료에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닭장 안 깊숙이 넣어주었다. 이제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도 오드리는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 있다.
둥지에 소란(巢卵:밑알, 닭이 알을 보고 자극을 받아 산란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넣어 두었다. 지푸라기와 왕겨를 섞어 만든 오드리의 침실에 다른 닭이 낳은 알이 덩그머니 올라갔다. 오드리가 제가 낳은 알로 속아 넘어가길 바라보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영리한 오드리라는 것은 온 가족은 이미 알고 있다.
어쨌든, 닭장 안에 한가득 먹을 것과 물통을 넣어 주었으니 좋은 소식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더하여, 처음 낳는 알이 좀 작았으면 좋겠다. 오드리가 힘들지 않게.
닭장 문들 열어주자 오드리가 재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 나온다. 오드리는 살이 빠져 보였다. 비어 있는 모이통과 물통, 허리가 잘록하고 목이 전보다 훨씬 길어 보였다.
물이 채워지자 '물 한 모금 하늘 보기'를 하며 연신 물을 마신다. 앞으로는 도시로 가면서 닭장에 가두지 말아 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이 없더라도 아침이슬로 대신할 수 있고 잔디밭 벌레와 풀과 꽃들도 오드리의 보약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는 차에, 길고양이나 너구리같은 들짐승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스럽긴 하다. 실험 삼아 며칠 머무는 동안 닭장을 개방해 보기로 했다. 눈여겨보니 다행스럽게도 마당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닭장을 나온 오드리는 초록 잔디 위에서 참 편안해 보인다. 풀벌레 소리에 오드리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넋 놓고 녀석의 동선을 따라간다.
내가 좋아하는 '오드리 멍!.
이틀간 잔디밭에서만 노닐던 오드리가 사라졌다. 아무리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집 주위를 샅샅이 살펴도 없다. 그때 흰 담장 너머로 휘리릭 하고 검은 물체가 지나갔다. 오드리다! 위험한 순간이 오면 본능적으로 날아오르는 오드리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안 본 사이에 동네 고양이나 너구리에게 쫓겨 혼비백산으로 날아올랐던 걸까. 그것이 담장 너머 건 나무 위건 간에 상관없는 오드리는 그렇게 탈출을 했나 보다. 옆집 들깨 밥으로 오드리를 데리러 갔다.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낯선 환경에 놀랐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쪼르륵 달려온다. 뒤뚱거리며 나를 향해 뛰어오는 오드리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오드리는 마당까지 들어와서야 발걸음이 느긋해졌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풀밭을 헤치며 벌레를 쪼아 먹었다. 아무래도 계획했던 오드리의 방사는 무리일 거 같다. 대신 오드리를 위해 자주 시골에 머물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