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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09. 2024

사고뭉치 남자의 가을 놀이

어설픈 전원생활

'차가운 이슬이 맺힌다'라는 한로, 가을걷이를 하러 시골에 들어왔다.

웬일일까? 남자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시골 오는 동안 운전도 내가 했는데 말이다.

휴게소에서 먹은 설렁탕에 마치 수면제가 들어갔나 할 정도로 차를 타자마자 이내 코를 골았다. 시골에 도착해서는 두 어 바퀴 배추밭과 마당을 돌고 고추밭에 물을 준 뒤... 참! 마르지 않은 장작을 패긴 했다. 작년에 쓰고 남은 장작을 패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이야기를 해도 쇠귀에 경 읽기로 젖은 장작을 계속해서 패고 있다. 살면서 드물게 맞닥 드리는 이해불가 상황이 또다시 발현되는 상황이다. 그래, 네가 힘들지, 내가 힘드냐!

아니 그런데, 날도 춥지 않은데 장작을 때려 하나하고 또다시 잔소리가 올라오려다 꿀꺽 참았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입을 닫아야 한다. 장작이 훨훨 탈 때 얼음장 같은 내 무릎도 데우면 좋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한다.


아차. 지난주에 캔 땅콩을 말리려고 난로 위에 올려놓은 플라스틱 쟁반이 생각났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 그것을 못 볼 리가 없겠지, 어딘가에 내려놨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생각이 철퇴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생각을 한 후 나조차 그것을 확인하는 것을 곧 잊어버렸다.


나는 오골계 오드리의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보기' 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랑이 가득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여러 번 오드리를 불러대기도 했다. 오드리~~~오드리~~~ 엄마 보고 시퍼쩌!  그랬구나! 누가 보면 배꼽을 잡을 일인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이쁘니 어쩔 수가 없다.

잠시 후 화단 구석에서 뻔뻔이 고양이가 나타났다. 내 발밑에서 한 바퀴 뒹굴, 배를 보이며 재롱을 부린다. "야옹! 밥 달라 야옹! 사람의 말처럼 녀석의 울음소리 운율은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빨 빠진 뻔뻔이의 밥 먹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가슴이 찌릿거린다. 오드리가 뻔뻔이를 보더니 부리나케 달려와 귀찮게 하다가 뻔뻔이의 하악질에 날개를 퍼덕인다. 하지만 잠시뿐, 오드리는 나를 닮았는지 끈질기게 뻔뻔이를 성가시게 한다. 결국 뻔뻔이는 배가 부르게 먹지 못한 채 어디론가 가버렸다. 오늘 밤이라도 다시 와서 편히 먹으라고 부엌 덱으로 사료를 옮겨주었다.


부추 꽃이 지자 동그란 원뿔 모양 끝마다 까맣게 씨앗이 달렸다. 씨앗을 말려 보관하는 일은 내년을 기약하는 일이다. 가을걷이 중 아주 중요한 일중 하나이다. 소중하게, 공손히 부추 씨앗을 받았다. 선선한 바람에 사 그러 드는 바질 잎사귀도 한번 쓰다듬으며 향을 킁킁맡고, 화려하게 핀 포천구절초 꽃에 카메라 세례도 퍼부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 꽃은 설레는 소녀처럼 아름답다. 정말 그렇다. 담장에 보이지도 않았던 늙은 호박이 무려 두 개씩이나 매달려 있다. 해마다 늙은 호박을 썩혀 버리기 일쑤이긴 하지만 풍성한 가을을 상징하는 늙은 호박은 가을의 감초 같다. 작은 마당과 꽃밭에서만도 이리 놀랄 것들이 많은데 세상의 자연은 얼마나 더 경이로울까. 푸른 가을 하늘로 먹을거리가 풍족해서 신이 난 참새떼가 난다.


혼자 흙을 밟고 눈 호강을 한 후 천연덕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책을 읽을까? 티브이를 볼까? 이젠 무얼 할까?

덱에 있는 난로에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로 위의 플라스틱 쟁반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어째, 자세히 보니 플라스틱 쟁반은 그대로 난로 위에 있다.

신발도 신지 않고 튀어나가 냉큼 쟁반을 들어 올렸다. 막 이제 타기 시작했을까, 쟁반을 들자 물렁해진 쟁반이 물컹하고 반으로 휘었다. 땅콩들이 바닥에 쏟아지고 플라스틱 쟁반이 닿은 부위는  난로 위에 들러붙어서 독한 냄새를 풍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경황이 없었다. 마냥 잊고 있었다면 큰불이 될 뻔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밖에 나갔다 들어온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앉는다. 내 이야기를 듣고는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아무 소리를 안 했다. 정리가 되었으니 알 바가 아니라는 투다. 기가 막혀하는 내가 되려 미안한게 맞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려봐도 이건 아닌가 싶다. 그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더니 또다시 코를 곤다.

내 참!


하나 둘 시골 일을 배우고는 있는 그에게는 만사가 매번 처음처럼 다가오나 보다.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천성 덕분에 매번 소소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렇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어이가 없다가도 가끔은 웃음보가 터진다. 영원한 수수께끼인 그에게 나는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도인이 되어간다.


초저녁부터 사방이 고요하다. TV를 켰는데 화면이 켜지지 않는다.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면 해결을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적막한 거실이 다정하게 다가온다. 난로 안에서 탔던 장작이 사그라들자 서늘한 밤 기운이 스며들어 스웨터를 덧입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귀에서 삐 소리가 나는 듯하다. 남은 책 "언어의 온도"를 집어 들었다. 쏙쏙 잘 들어온다.


11시가 되자 출출하다. 옛날 과자 별 뽀빠이와 컵라면 하나를 먹어버렸다. 그러고는 곧 후회를 했다. 두 시간 더 있다가 자야만 한다.


우리 부부는 종일 가을걷이가 아닌, 가을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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