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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01. 2024

거두는 계절, 가을

고구마. 땅콩, 장작준비


모든 것을 익혀버릴 듯 이글거렸던 태양이 순해졌습니다. 뜨겁다고 태양을 피해 다니는 사이 밭에 심어놓은 먹을거리들은 보란 듯이 열매를 내어 놓았습니다. 어제는 고구마와 땅콩을 겠습니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주렁주렁 달린 열매를 보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고구마 밭에서 꿈틀거리는 손가락만 한 애벌레를 보고서 혼비백산 뒤로 자빠지기도 했지요. 자기 집을 침입한 사람이 적반하장 격으로 나자빠지는 꼴을 보고 벌레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까요. 마음을 가다듬은 후 겨울을 잘 이겨내고 예쁜 나비로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땅콩과 고구마는 겨우내 먹을 만큼 나왔습니다. 그저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 사람이나 자연에게 이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널브러진 고구마 줄기를 그냥 버릴 수 없습니다. 또다시 한참을 서서 긴 줄기를 따라 사선으로 손을 뻗은 고구마 줄기를 땄어요. 도통 정신이 없는 더운 여름 때문에 식물들도 넋을 놓은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굵은 줄기는 너무 굵고 억세고 얇은 것은 먹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골라야 해요. 날이 선선해져서 서리라도 내리면 폭삭 주저 않을 테니까요. 작년엔 게으름을 피우다가 갑자기 내린 서리에 고구마 줄기들이 하룻밤 만에 죽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작물들은 위치에 따라 살아있곤 하는데 고구마 잎은 한꺼번에 모두 작정을 한듯했습니다. 좀 충격적인 장면이었어요.

고구마 줄기는 따고 나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잎사귀를 떼낸 후 껍질을 벗겨야 부드러워지지요. 껍질을 까면서 먹기 좋은 5센티 크기로 잘라놓아야 두 번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한 소쿠리를 거실에 두고 가족끼리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고구마 줄기 껍데기를 깠습니다. 고구마 진액에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새카맣게 물이 들었습니다. 손바닥은 박박 문질러 닦으면 대충 닦이지만 손톱 사이가 까맣게  된 것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아요. 요 며칠 산모를 만나는 일을 마무리했으니 다행입니다. 누군가에게 손 내밀 일이 줄어든 요즘은 체면치레 할 일도 점점 횟수가 줄어듭니다. 그저 천천히 나를 돌보면 됩니다. 한동안 손톱이 까매도 괜찮습니다.

두 시간 동안 고구마 줄기 한 바구니를 모두 깠습니다. 이젠 적당히 사각거릴 정도로 삶아야 되어요. 무슨 고구마 줄거리 공장을 차린 것 같이 부엌이 난장판이 됩니다. 한 사람은 삶아내고 또 한 사람은 찬물에 헹군 뒤 한 끼 먹을 만큼 소분하여 냉장고로 넣었습니다.

가끔 시골서 먹을거리를 가꾸고 거두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제아무리 기계화, 자동화를 들이대도 결국에는 사람의 손길로 마무리가 되곤 하지요. 우리처럼 조그만 밭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소소한 일이 많습니다.

슬쩍 내년엔 올해보다 작물들을 조금만 심어볼까 생각이 들어요.

내일은 하우스에 심어놓은 붉어진 고추를 따야 합니다. 날이 선선해져서 점점 양도 줄고 크기도 앙증맞아집니다만 그것도 고추이니 거두어야 합니다. 벌레가 얼마나 극성을 떠는지요. 정말로 꿈틀거리는 것들은 무섭습니다. 맛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실한 고추에 0.1미리 구멍을 파고 들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답니다. 벌레가 들어찬 고추는 제 아무리 근사해도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니 해야 시골에 살 수 있는데 아직도 저는 벌레들이 참 싫습니다.

오골계 오드리가 가을벌레를 잡아먹고 다닙니다. 사료가 필요 없어 보여요. 이 큰 밭과 마당의 벌레는 몽땅 오드리 것이니 말입니다.

이 가을, 행복지수가 제일 높은 동물은 오드리이지 않을까요?

추운 겨울을 지내려면 장작도 필요합니다. 해마다 장작 2루 베를 사면 그럭저럭 겨울을 나곤 합니다. 루베는 일본 건축용어라 합니다. 1세 제곱이 1 루베라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사서 겨우내 쓰고 남은 마른 장작은 먼저 때고 이번에 사 온 나무는 그 사이에 말려야 합니다. 마당에 널브러진 장작을 보니 따듯해 보입니다. 더워서 죽겠다던 날은 이젠 지나갔습니다. 모든 것들이 지나고, 사라져 갑니다. 또 다른 '피움'을 위해서겠지요. 몽글거리는 봄이 올 때까지 장작불에 고구마와 밤, 은행을 구워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참, 밤송이가 입을 벌렸습니다. 앞치마 두르고 장화 신고, 기다란 집개를 장착하고 밤나무 아래로 가봐야겠습니다. 공평한 밤나무는 게으른 사람에게도 선물을 줍니다. 몽땅 한꺼번에 떨어져 버리지 않으니까요. 아마 저를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동네분이 밤나무 아래에 수풀을 베어 놓아서 고맙게도 밤을 찾기가 수월해졌습니다. 밤을 찾으러 가며 가슴이 설레네요. 이래저래 가을은 참 바쁜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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