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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보홀1. 다시 짐을 싸다.

두 번째 보홀 1

by 김옥진 Feb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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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필리핀 보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바닷속의 수만 가지 물고기에 홀딱 반해버렸던 보홀의 바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또다시 나를 그곳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프리다이빙의 천국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프리 다이버가 아니어도, 나처럼 수영을 하지 못해도, 누구나 바다를 좋아하게 만드는 매력을 뽐냈다.

난생처음 스노클링을 하는 날, 얕은 바다라고 했지만 물이 무서웠다. 숨을 쉬는 거라곤 처음 해보는 낯선 구강호흡뿐이었고 살아 일렁이는 파도는  나를 이리저리 떠밀고 다녔다. 어설프게 입은 구명조끼조차  위안이 되질 않았다. 물을 만나자 몸과 마음이 요동쳤다. 타고 왔던 배의 시동이 꺼지고 삽시간에 드넓은 하늘빛 바다가 가슴으로 들어왔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편안하다'를 읊조리며 천천히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환하게 비친 바닷속이 보였다. 다음은 움직이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그다음은 갖가지 색의 물고기들이, 그제야 흔들리는 말미잘 사이로 니모가 보였다. 마음이 정리되니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골짜기도 보이고 여러 모양의 산호숲에 갖가지 생명들이 들락거렸다.

물고기 공부를 하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다생물의 이름은 고작 니모와 가자미, 말미잘, 산호, 돌고래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좋았다. 투명한 바닷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어디냐!

나는 그날, 보홀의 푸른 바다에 한 점이 되었다. 내가 드디어 바다와 하나가 된 날이다.

'바다에서 스노클링 하기' 버킷리스트가 지워졌다. 벅찬 가슴으로 배 위로 올라와서 본 바다는 내가 알았던 예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잔잔한 푸른 바다가 나를 안았던 순간, 바다는 나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왔고 발을 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듯했다. 둥둥 울리는 가슴을 위로하며 나를 안아준 바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꼭 다시 만나러 올 것이라 약속했다.

그곳을 다녀온 후, 보홀 한 달 살기도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하루 종일 흔들리는 야자나무 그늘에서 바다 향기에 취해 지내는 것처럼 낭만적인 것이 있을까! 출출해지면 깐 띤(필리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작은 식당)에 가서 안남미 쌀로 지은 날아다니는 밥 한주먹과 치킨 한 조각으로 조촐한 끼니를 때워도 좋을 것이다. 때 묻지 않은 바다와 나른하다 못해 시간이 멈춘듯한 오후의 한낮, 그 속에서 나도 그들과 함께 나른한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약속을 지키러 다시 보홀의 바다로 간다.

눈에 담아두었던 그 풍경들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두 번째 가는 보홀은 친구들과 함께한다.

여행 짐을 싸며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없어도 될 것 같은 물건들은 가차 없이 빼버렸다. 굶어 죽을 것도 아닌데 온갖 부식재료를 가지고 갔다 고스란히 되가져온 지난 여행이 떠올랐다. 평상시에도 여행 가방을 쌀 때처럼 정리를 하면 되겠다 싶다. 더하여 덕지덕지 붙어있는 마음의 짐도 함께 내려놓는다. 여행이 주는 선물 중 하나는 '털어내어 가벼워지기' 다.


구석에 넣어 두었던 여행용품을 챙겼다. 엊그제 다녀온 것만 같은 여행의 흔적들을 보며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실감한다. 여행 가방에 붙어있는 수화물 스티커, 비행기표, 여행사 파우 치안의 영수증들이 이제야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여름옷 몇 벌만 있으면 충분하다. 지난번에 쌌던 가방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아기를 낳으러 온 산모는 이삿짐처럼 많은 물건들을 들고 들어왔다. 아내가 배를 부여잡고 진통을 견디고 있는 와중에도 남편은 서너 번에 걸쳐 물건들을 들고 들어오는데 시간을 보냈다. 쿠션 두 개. 베개, 아기 용품, 진통 중 먹을  과일과 음료수, 심지어는 가습기와 공기청정기까지 들고 왔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일일이 들고 갈 물건 목록을 적어 반복해서 확인했을 그녀가 딱해 보였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물건들이 들어찼다. 아기를 낳는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지만. 아기를 낳은 후에도 남편은 계속 바빴다. 공기청정기와 가습기를 작동하게 하느라  아기를 쳐다보는 시간을 놓쳤다. 보이는 물건들보다 아기를 바라보고 만지는, 보이지 않는 느낌이 더 중요했을 텐데  말이다. 그녀와  반대로 달랑 보따리 한 개를 들고 왔던 산모도 모자람 없이 아기를 안고 퇴원을 했다.


어떤 경험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했지만 나의 최선은 그녀가 하고 싶은 데로 두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아기는 건강하게 부부에게로 왔다. 아기를 만나자 그들은 여느 부부들처럼 눈물도 글썽이고 젖도 잘 먹는 아기를 보며 생명의 강인함에 감탄하기도 했다. 자연출산의 힘으로 더욱 강해진 그녀는 들어올 때와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세상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남편은 또다시 서너 번 짐을 날라야만 했으나 그의 발걸음도 아내만큼 변했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사실, 부질없는 물건들을 가방 가득 실어 여행을 간 나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 부질없다고 생각하지 못한 여러 물건과 마음들을 여행을 다녀온 후에야 알게 된 것이 어디냐! 살면서 경험한 많은 허튼 일들을 떠올리며 ' 인간은 경험한 것들을 경험할 뿐이다'라는 경험론자들의 글이 떠올랐다. 경험을 하지 않고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

오늘의 연속선상인 삶,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어리석음을 겪으며 살아가게 될까. 오류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각성의 순간,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나는 행복을 느낀다. 사람 사는 것이 모두 그렇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만 하고 보내기엔 인생은 짧다. 자, 지금을 즐기자. 틀리면 어때, 잘못 갔으면 되돌아오면 되는 거다. 

난 다시 보홀을 만날 준비를 한다. 어떤 구부러진 길을 만나더라도, 그곳서 길을 잃더라도  걱정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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