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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파일기

1981년 3월 첫째 주 월요일 새벽

나는 조산사다.

by 김옥진

안개 자욱한 새벽 산길을 내려간다. 두 개의 쇼핑백엔 오늘 입을 유니폼과 신발, 간호사 캡이 가지런히 담겼다. 스물 한 살 예쁜 나이에 쇼핑백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 필요한 물건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집에서 전철역 까지는 15분, 서울역까지 사십 분, 서울 역에서 402번 버스를 타고 실습지인 순천향 병원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 걸린다. 도착해서는 탈의실을 찾아야 하고 가운을 갈아입고 핀으로 캡을 쓰는 시간을 합하면 넉잡아 삼십 분이 걸린다. 반드시 두 시간 반 전에 집에서 나가야 하는 이유들이다.


언덕길의 돌부리가 발에 차이는 소리만 들린다. 서늘한 안개가 콧속을 훑고 지나 폐 깊숙이 들어찬다.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슴이 둥둥거린다. 과연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대로까지 나오니 그제야 한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처음으로 간호실습을 나가는 딸을 위해 어머니도 새벽을 만났다. 부엌에서 나는 묵은지 김치찌개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손길 수북이 담긴 감자볶음, 참기름 조금 묻은 갓 구운 파래김으로 차려진 아침 상위엔 어머니의 수많은 바람이 담겨 있다는 걸 안다.

참 맛있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어머니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줄 꼭 붙잡고, 실수하지 말고 잘 마치고 와야 한다" 정색을 한 어머니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가 보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손 흔드는 어머니는 내가 안갯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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