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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Oct 17. 2023

에필로그

 누구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나면 일명 ‘까미노 블루(Camino Blue)’라는 우울감을 겪게 된다고 한다. 시골길만 내리 걷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면 현대 문명을 처음 접한 원시인 마냥 낯설고 도시의 소음에 멀미가 나기도 한다.     


  그런 후유증이야 금방 사라지는 데 문제는 더 이상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도, 길 위에서 함께했던 친구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산티아고만을 향해 먹고 자고 싸고 걷는 일만 반복했는데 갑자기 도착해야 할 곳도 없고 그래서 할 일도 없는 것 같은 허무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나 역시 까미노 블루를 피할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포르투갈의 포르투까지 혼자 이동하는 버스에서 어찌나 외롭고 울적하던지 도저히 다음 여행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포르투갈, 모로코로 이어지는 여행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그냥 다시 내 친구들이 있는 산티아고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그 광장으로 가면 아직도 흥에 겨워 놀고 있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걷고 싶은 정도는 아니고 다시 어울려 놀고 싶은 정도였다. 버스라는 현대 문명에 감사하며 결국 내리지는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산티아고 향수병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조개구이집에서 마주한 가리비만 봐도 마음이 찡해졌다. 도로 위 평범한 교통 표지판이나 이정표 속 화살표가 까미노의 노란 화살표로 보이는 증세도 있었다. 가장 중증일 때는 한국을 여행 중인 여행자만 봐도 갑자기 나도 여행자가 된 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도 했다. 치료 약이 없었다. 그들을 만나 여행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그 신선한 에너지를 좀 나눠 받아야 좀 살 것 같았다. 아쉬운 대로 내가 찾은 처방약은 카우치서핑(Couch Surfing)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한국을 여행 중인 친구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함께 놀 수 있는 현지 친구를 구하는 외국 여행자들이 가득했고 가끔 시간을 내어 그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중 발리에서 온 세 친구는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오면 즐거운 하루를 만들어 주겠다는 내 말만 믿고 정말 춘천까지 왔다. 나는 기차역에 내 차로 마중을 나갔고, 닭갈비를 사 먹이고 유명한 관광지부터 외국인 관광객은 절대 모를 숨은 명소까지 그들을 데려갔다. 마지막으로 야경을 구경한 뒤 춘천역 플랫폼에서 서울행 막차를 기다릴 땐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 작별 인사를 하고 또 했다. 단 하루 함께 지냈을 뿐인데 누가 보면 십년지기 친구들이 이별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 친구들이 그날 아침 서울의 한 호스텔에서 눈을 떴을 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국인 친구와 춘천에서 그런 하루를 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순례길 첫날 팜플로나에 도착했을 때 내가 지나가던 올라코를 만나 그에게 밥을 얻어먹고, 시내 구경을 하고, 그의 차까지 얻어 타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올라코가 나에게 선물 같은 하루를 만들어 준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선물 같은 하루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또 어느 날엔가 우연히 기차역에서 헤매고 있는 히잡을 쓴 친구들을 보았다.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나 역시 기차 시간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옆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와 음료수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가는 길에 먹으라며 건네고 돌아섰다. 순례길 마지막 날 홀연히 나타나 나에게 가리비 목걸이를 건네주고 사라지신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받은 작은 선물이 주는 기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기쁨을 그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 나를 움직인 건 오직 그 마음 하나뿐이었다.     


  내가 올라코와 가리비 할아버지에게 받은 호의를 그들에게 직접 갚지 못했듯이, 그들도 내가 베푼 호의를 다시 나에게 갚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렴 어떤가. 아마 그들도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내가 선물해 준 하루를 떠올리며 또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돌고 도는 따뜻한 마음의 선순환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을 여전히 믿는다.  


                  


 

  내가 작은 친절을 베푸는 그 순간 평범한 나의 일상은 순식간에 순례길이 된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다시 그곳에서 울고 웃던 순례자가 된다.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안 선생님에게, 상훈이에게, 산티아고와 라우라에게, 민정 언니에게, 크리스티나 가족에게, 다니엘과 세바스티안에게, 리암과 카렌에게, 나초와 베로니카에게, 페르난도에게 받은 것을 갚아나가는 행복한 빚쟁이 순례자가 되고 싶다.     


  돌이켜 보면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나를 일으켜 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가장 든든한 화살표였다. 누군가 나에게 그 머나먼 산티아고까지 가서 결국 기적을 만났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작은 기적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별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키워보니 (현재 육아라는 메세타 구간을 4년째 걷는 중) 조금은 알 것 같다. 인생이라는 길은 순례길보다 훨씬 복잡하고, 힘들고, 먼 길이라는 것을. 그래도 화살표마저 사라진 이 길이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은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순례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힘든 순간마다 다정한 친구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민다면 나는 그 손을 덥석 잡고 일어나 다시 힘껏 걸어 나갈 것이다. 고민하고 망설이며 주저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면 되니까. 그렇게 함께 가야 행복하게 걸을 수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는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까미노를 이어갈 것이다.      


  나의 까미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를 그 길로 이끌고 

함께 걸었으며, 

지금도 언제나 함께인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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