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슈미>는 현대 연극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극예술에서의 재해석은 대단히 위험하고 흥미진진한 시도다. 고전을 새로운 렌즈로 면밀하게 관찰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슈미>에서는 <헤다 가블러>의 배경을 현재(혹은 근미래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의 한국으로 바꾸었다.
이제는 글을 읽는 것이 지루해진 시대다. 문화를 누리는 방법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다양한 플랫폼에서 쉽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창작해 대중과 소통한다. 아날로그는 이제 저편으로 쇠락하고 있다. 연극 <슈미>에서도 이와 같은 동시대의 맥락을 적용하여 작품에 현대성을 부여한다. 주인공 ‘슈미’의 남편 ‘경만’이 사물인터넷 기술을 능숙하게 다루고, ‘도규’, ‘유완’과 함께 메타버스 기술과 트랜스휴머니즘을 이용한 문화를 누리는 것이 그 예다.
반면, 슈미와 유완은 관성적인 기술의 발전을 거부한다. 휴대폰을 혐오하고, 디지털에 냉소를 날린다. 유완은 특히나 독특한 인물인데, 저서를 집필할 때 줄글을 종이에 써도 될 것을 일부러 테이프 녹음기를 사용해 기록한다. 인물이 가진 특성을 강조하고, 현대의 기술을 극에 녹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공들인 것이 느껴졌다.
사물인터넷 기술과 메타버스, 트랜스휴머니즘과 같은 이슈는 아직 우리의 삶에 온전히 와닿아 있지 않다. 아직은 첨단기술이 일부 집단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일상에서는 <슈미>에서 그리는 것처럼 기술공학의 발전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플롯이 누군가에게는 생소함으로, 또는 창의적인 시도로 느껴졌을 테다.
극 중에서 신기술과학 관련 의제를 활용하여, 인물이 갖는 공허와 권태와 같은 비일상적인 감정을 뒷받침하는 설정을 마련했다는 것은 기발했다. 그러나 반과학주의를 표방하는 몇 인물의 행동 동기가 명확하지 않았고, 극에서 다루는 신기술의 활용도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이러한 찜찜한 감정이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의 가장 기본적인 플롯 구조는 명확하지만,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원작 <헤다 가블러> 또한 비슷하다. 헤다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권태와 지루함을 느낀다. 헤다에게 권태로움이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깊이의 우물과 같다. 그러니 우물을 채우려 하는 욕망을 가져도, 그 욕망이 쉬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처럼 주동 인물이 보편적인 인간상이 아니고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으니 관객은 계속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삶은 무엇인지, 진정한 '나다움'은 무엇인지와 같은 것들이다.
<슈미>는 이처럼 복잡다단한 원작에 또 다른 해석과 창작이 가미된 작품인지라,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많았다. 무기력한 인간상과 그를 둘러싼 친구들, 상실과 욕망, 파괴와 혼돈을 거치며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 <슈미>는 관객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에게는 극장 밖의 삶이 있다. 극장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우리는 다시 한국 사회에서 헤엄쳐야만 한다. 두렵고 냉정한 현실이다. 극장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이상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 <슈미>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공허하게 들릴지라도, 어쩌면 '빈 공간' 자체를 서성이는 현대인에게 가장 적합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진이 전위적인 설정과 퍼포먼스를 활용하여 <헤다 가블러>를 ‘한국 희곡’으로서 재창작하려 노력한 것이 보였다. 이는 어찌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를 따른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기성 체계를 부정하고, 끌어내리고, 파괴하고 재창조함으로서 진일보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돕는 예술이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움직임과 장면 전환, 배우의 작고 커다란 동작들이 세밀히 짜여진 것이 보여 인상적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슈미>의 일부 장면은 아직 과거 한국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성별 이분법적 갈등, 보편적으로 유약한 여인, 무능력한 마마보이 남편, 옛것처럼 느껴지는 대사와 말투, 몸짓들, 자기연민과 혐오 등. 몇몇 빛바랜 설정은 연극을 외려 모더니즘 시대로 회귀하게 했다. 극이 표방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가부장과 시월드가 남아 있을까?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슈미>가 비추는 시대에도 아쉬움과 깨달음이 공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느낌표와 물음표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연극과, 세상에 손을 뻗어 도약하는 연극의 차이는 무엇일지.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많은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