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경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창작을 전공이자 업으로 삼으면 흔히들 많이 받게 되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여행에 관한 것이다.
"여행 많이 다니겠네요? 어디가 좋았어요? 어디에서 영감을 많이 받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여행에서 영감을 받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본의 아니게 저런 질문자들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글 쓰려면 여행 다니면서 여러 경험을 해야 하지 않아요?"
그다음 나오는 질문이 바로 위와 같은 것인데,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물음이다.
여행이 중요해서가 아니다.
'여러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여행=경험 이런 식으로 등위에 놓곤 하는데 이건 동의하기 힘들다.
여행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경험 중 한 부분일 뿐이다.
작가인데 여행은 안 다녔냔 질문에 쫄 필요 없다.
지천에 널린 게 영감이고, 소재며, 당신의 세상 역시 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그걸 어떻게 발굴할지는 온전히 작가인 당신의 몫이다.
행동반경의 폭이 좁으면 좁은 대로, 넓으면 넓은 대로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무대는 세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험은 중요하다.
영감을 얻느니, 시야가 넓어지느니 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경험은 '실용적인' 면에서 당신의 글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중요하다.
언젠가 희곡을 쓸 때의 일이었다. 대략 대학에만 7년째인가 잡혀 있던 시절인 것 같다.
회사를 배경으로 한 단막극을 썼는데, 그때 다른 작가에게서 들은 평 하나가 간결하면서도 와 닿았다.
"회사 안 다녀봤죠?"
이 짧은 말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었다.
아무리 부분 부분이 재밌고 재기 발랄해도, 내 글은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학교만 다닌 사람이라는 걸 오직 내 글 한 편만 보고서 저 작가는 알아챘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 한마디 덕분에 나의 한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여기까지 본 당신은 '그래도 웹소설은 다르잖아'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웹소설이 현실에 없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결코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지식은 당신의 직, 간접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창작은 독서든 체험이든 당신이 경험한 것들에 살을 붙이고 변형하는 일련의 연속 과정이다.
없는 경험을 가공해 봤자 그건 추상적인 하나의 표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편집자 일을 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봤고, 수많은 리뷰를 봤다.
그러면서 하나 깨달았는데, 그건 바로 과거의 나처럼 현실성 떨어지는 작가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다는 사실이었다.
회사나 혹은 특정 조직이 어떤 체계로 굴러가는지는 무시하고, 자신의 스토리에 그 조직을 끼워 맞추는 일을 왕왕 볼 수 있다(작품을 특정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용은 따로 언급 안 하지만).
어느 정도 변형, 가공은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그게 소위 말하는 '현실성'을 훌쩍 넘어버리면서 생긴다.
특히 특정 직업군을 소재로 삼을 경우, 그 실무자가 독자로 등장하게 되면 그 비현실성은 배가가 되어 한층 몰입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이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확 깨네요."
혹은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한 것처럼 주인공 칭찬하나 모르겠네요.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예요."
대강 이런 식의 리뷰가 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비난이 무서워 고증에만 집착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
고증에 집착한 나머지, 작품의 장르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다큐가 아닌 만큼 스토리에 필요한 부분 위주로 환경이나 시스템 등을 압축 설명해 가는 게 좋다.
아무튼 이런 경험의 문제는 중세나 근대, 혹은 기타 배경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창조한 세계라 할지라도 분명 그 세계는 현실의 어딘가에 기반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즉, 거기에 관한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들은 역사 전문가일 수도 있고 어떤 특정 분야의 마니아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당신이 경험 없이 그 소재와 이야기를 쓴다면 그 대가로, 작품 자체를 오롯이 평가받는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삐끗하게 되면, 당신의 작품은 신뢰도 자체가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신뢰도 하락은 몰입력 저하로 이어지고, 결국 독자 이탈도 부르게 된다.
저런 사소한 경험(독서, 웹서핑 등의 사전 조사나 해당 실무자 인터뷰 등)의 부재로 당신의 작품 전반에 대한 평가가 깎인다니, 얼마나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인가.
처음으로 돌아와서, 난 당신이 굳이 여행과 같은 직접적인 경험에 꼭 압박을 받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으로 부딪치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부지런히 책을 읽고, 인터넷으로 조사하고, 이런 간접적인 경험은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똑같은 스토리를 쓰더라도 당신의 글은 처음보다 훨씬 그럴싸해져 있을 것이다.
굳이 애써 티를 내지 않아도 그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무시 못 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