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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ny LEE Sep 15. 2024

동상이몽: 닮다와 같다는 다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했다

너희 엄마 어렸을 때랑 똑같네!

우리 집은 부모님, 그리고 4남매로 이루어진 대가족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친구가 많았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그들과 가족 구성원수에서 밀리지(?) 않았을 정도로 많았다. 이 대가족은 서로 누가 누굴 닮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어른들은 우리에게서 '부모님'과 공통점을 늘 찾아내고자 했고, 우리는 '차이점'을 찾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여섯식구는 모두 아주 상이한 사람들이다. '가족'으로 묶였지만, 자라온 환경이 모두 다르다. 


58년생, 1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난 아빠는 경남 마산 출신이다. 여태 우리 아빠와 고모 남매만큼 사연 많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을 정도로 고생을 해왔다. 인생을 독기와 오기로 살다보니 어렸을 땐 우리 4남매와 갈등이 참 많기도 했다. 하지만 '내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정말 강했고, 일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본인에게는 돈을 참 못 쓰면서, 가족들에게 무언가 사주고 좋아하면 그걸 기뻐하는 사람이다. 다혈질이지만 정이 많은 사람, 그게 우리 아빠다.  


61년생, 1남 2녀의 둘쨰로 태어난 엄마는 경남 부산 출신이다. 엄마는 집안의 가사 운영을 담당해왔다. 어쩌면 전통적인 가족의 '엄마' 역할에 최선을 다해온 사람이다. 4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돌보느라, 늘 정신이 없었겠지만, 나의 기억에 엄마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데생을 배우며 우리의 어린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고, 내가 ABBA와 The Carpenters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다 엄마 덕분이었다. Louis Armstrong 의 크리스마스 메들리를 들으며, 연휴를 즐긴 것도 다 엄마의 플레이리스트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늘 무뚝뚝한 부분이 있어서, 우리는 엄마를 오랜 시간 감정에 무딘 사람으로 오해를 해왔다.  


부모 + 자녀로만 6명인 대가족은 이제 우리에겐 자랑이 되었다.


90년생, 2남 2녀 첫째로 태어난 나는 고향 개념이 없다. 태어나기는 외가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법적 고향은 서울이고 이후로 청주로 이사를 가고,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다녔으며 대학은 서울로 와서 '정착에 대한 애틋함'을 잘 모른다. 10대에는 순둥하게 지나다가, 뒤늦은 사춘기가 20대에 찾아와서 지랄맞은 성질머리로 20대를 보냈다. 그러다 30대 돼서야 안정을 찾았다. 늘 '첫째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고, 실제로 '첫째'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꽤 누렸다. 


92년생, 2남 2녀의 둘째인 여동생도 나만큼이나 유목생활을 많이 했다. 동생도 고등학교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한의대를 졸업하여 한의사 자격증까지 따고나서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편하게 살 팔자는 아닌게 틀림없다. 비자 발급 문제로 한국으로 못돌아온지 수년째이기 때문이다. 감정적 섬세함과 감수성이 엄마를 많이 닮았는데, 어렸을 때의 패기 넘치는 성질머리로 아빠의 유년시절과 비슷해서 아빠를 닮았다고 꽤 오랫동안 오해(?)를 받았다. 


96년생, 2남 2녀의 셋째인 남동생은 나와 여동생과는 달리 청주 토박이다. 청주에서 태어나, 초, 중, 고를 다 청주에서 나왔다. 우리 사남매 중 가장 격한 사춘기를 보냈고, 엄마, 아빠가 꽤 오랜 기간 맘고생을 했다. 대학도 안가겠다고 버티다가 군대도 다 다녀와서 26살 뒤늦게 대학을 입학했다. 격한 사춘기 때 온갖 에너지를 다 썼는지, 20대 후반에 묘한 여유감과 느긋함이 생겼다. 지금은 엄마, 아빠가 오히려 의지할 정도로 성숙해졌다. 게다가 표현을 잘 안해서 그렇지, 한번 누군가의 부탁을 듣고 할 수 있다 생각하면, 절대 잊지 않고 챙기는 섬세함이 있다. 


99년생, 2남 2녀의 막내이자 늦둥이인 남동생2 역시 청주 토박이지만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다. 엄마가 불혹이 다 되어, 태어난 막내는 뭘 해도 이쁨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해달라'는 부탁을 가장 뻔뻔하게 잘한다.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든 얻으려는 성향이 있다. 어렸을 때, 부루마블이나 크레이지아케이드 게임을 같이 할 때, 질까 싶으면 게임을 뒤집어 엎고 땡깡 부리던 성질머리(?)가 남아있는 셈이다. 조용히 대학 편입시험을 준비해서, 원하는 학교로 가고, 코로나의 서막이 열리던 그 시절 유럽여행을 어떻게든 강행하여 '무개념'소리를 집에서 들은 것도 이 성질머리와 연관이 있으리라. 그래도 우리 집에선 60살이 되어도 귀여울 영원한 막내다. 


6명의 대가족. 우리는 태어난 곳도, 자란 환경도 다르다.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우리 4남매 마저도, 초중고 시절이 모두 다르고 고향도 달랐다. 어른들은 늘 우리에게서 '자신'의 일부분을 투영하여 '같다'고 표현했지만,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린 부모님 시대의 '가난함'을 애초에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살아남은 세대의 가치관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가족'이어서 우리는 마치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게 어쩌면 우리 가족이 오랜 시간 겪어야 했던 갈등의 근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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