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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 프란치스코 Jan 13. 2021

장르극, 코로나19

16.  코로나는 타자다

 다행히 글을 쓰고 있는 1월 13일 새벽 현재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오백 명대로 떨어졌다. 선방이다. 천 명대의 확진자가 나왔을 때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확산세를 잡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확산의 불길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앞날을 장담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에게는 불운이다. 코로나 월드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있다면, 좋은 놈은 백신이요, 나쁜 놈이 바이러스라면, 이상한 놈은, 바이러스의 입장에선, 한국사회일지도 모른다.


 지금 미션 임파서블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K-방역의 전사들은 혹한기 작전을 수행 중이다. 작전명 ‘에밀레종19’의 성과는 방역 종사자들의 땀과 눈물과 가족과 개인생활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백신을 언제 맞느냐고 치대지만 이 대목을 생각하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수당을 준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받는 액수를 알면 나설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명예와 자긍심, 공동체를 위한 마음으로만 할 수 있다. 시켜서 하는 일이면 이 만큼 성과가 없다. 스스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 누구보다 무서워하는 건 바이러스들이다. K-방역의 강철 심장이다. 


 ‘피로사회’는 한국인 철학자가 쓴 책이다. 독일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다음 한국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 한병철은 규율 사회와 성과사회를 대비시킨다. 규율 사회는 20세기적 사회고 성과사회는 21세기적 사회다. 대략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앞세우며 등장한 시대 이후가 성과사회라고 보면 된다. 규율 사회는 부정성이, 성과사회는 긍정성이 특징이다. 전에는 학교에서 무서운 선생님이 몽둥이 비슷한 것을 들고 강제로 자율학습을 시켰다면, 요새는 심리검사나 학습검사를 한 뒤 상담을 통해 자기주도학습을 유도한다. 성적이 올라가면 칭찬해주고, 그럼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한다. 앞이 규율 사회고 뒤가 성과사회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착해졌을까. 그렇다기보다는 스스로 하는 것이 남이 시켜서 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게 무섭다. 학교를 졸업해도 매일 자기 개발서 보고, 자격증 따고 또 따고, 알바 끝나면 대리 뛰고. ‘예스 위 캔’ 긍정 사회는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다.


 공교롭게도 이 책엔 면역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책에서는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라고 말한다. 책은 계속해서, 면역학적 시대를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로 설명한다. 그리고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맹목성이 도사리고 있어, 낯선 것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어쩌면 우리는 성과사회적인 방식으로 방역을 하면서 규율 사회에 속하는 면역학적 시대의 방식으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면역학적 방식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방인이며 외계인이며 타자로 규정한다. 내 몸 안에, 내 집 안에 절대 들여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 소비사회를 말할 때 자주 거론하는 철학자가 ‘보드리야르’이다. 그의 ‘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적은 처음 늑대였다가, 다음엔 쥐의 모습이었다가, 세 번째는 기생충의 형태로 다가온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마지막이 문제다. 적이 바이러스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적과 아군이, 바깥과 안이, 타자와 자아가 구별되지 않는다. 가장 다루기 어렵고, 가장 까다로운 적이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 적이다.


 길리어드의 렘데시비르니, 후지필름 자회사 도야마화학에서 만든 아비간이니 하는 항바이러스제 개발이 어려운 것은 바이러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세포를 함께 공격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부작용이나 독성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와 섞여있는 적이다. 이번에 물리쳐서 몸 밖으로 쫓아내면 되지 않느냐고? 최근에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가 풍토병이 될 것이라며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경고했다는 말이 들린다.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결국 우리 DNA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 유전자의 절반 정도가 바이러스의 것이거나 전이인자로부터 온 것이다. 이미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세포 안까지 밀고 들어와 자신을 우리 자신에게 길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가 우리와 친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럼없이 리보솜이란 복사기를 빌려 자손들을 복제해내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만 낯설고 끔찍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코로나19는 미래의 나의 일부일 것이다. 코로나를 겪고 있는 지금은 미래의 ‘나’가 내게 와서 말을 걸고 있는 순간일지 모른다. 언택트(noncontact)의 시대는 영화 컨택트(Arrival;영화의 원제)의 순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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