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백수인 채 다시 남해로
비 소식이 있는 날, 아침상에 자연송이가 올라왔다. 별다른 양념을 안 했어도 버섯 자체의 향과 맛이 좋다. 손가락만큼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멸치는 남해 특산물이다. 한 박스에 20만 원씩 하는 고품질의 멸치를 아버님은 지인에게 받아오셨다고 한다. 푸른빛을 띄면서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멸치는 꼭 고등어의 축소판 같다. 마른 멸치는 대개 간이 되어 짭짤하지만 이 멸치는 짠맛이 거의 없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함만 더해진다. 아버님은 이 멸치가 얼마나 최상품인지 설명해 주시면서 까만 내장과 뼈를 손수 발라 내게 건네주신다.
오후에는 고구마와 부모님이 진주에 지게차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가야 한다. 남해에서 진주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왕복 3시간. 교육시간도 3시간. 한나절이 걸리는 긴 일정이다. 드라이브도 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깍두기로 따라나섰다. "아버님 저도 따라가려구요. 깍두기" 하면서 따라붙으니 아버님은 "그래 마 같이 가자. 니는 깍두기로." 하며 웃으신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고구마네 부모님과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이제 진짜 아는 사람이 됐다. 진주까지 1시간 반을 달려가는 동안 아버님은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덕구씨를 마지막으로 아기가 태어나지 않던 팔랑마을에 필리핀에서 시집온 아가씨가 아기를 낳으면서 17년 만에 아기 울음소리가 퍼졌다는 이야기, 100살 넘은 사람은 하루에 17시간을 수면하는데 쓴다는 이야기 외에도 시시콜콜한 내용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신다. 고구마는 옆에서 "아빠, 그 얘기 백 번도 넘게 들었다.", "아빠는 입을 쉬질 않네" 하면서 끼어든다. 아버님은 그런 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 안 하면 뭐 하끼고. 말해야 안 졸리다." 하신다. 말 많은 나는 아버님 말씀에 십분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이 크고 시야가 넓은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도 훌륭한 마인드가 말에 담긴다. 아버님의 이야기 속에는 메시지가 있다. 듣고 있으면 소설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그저 그런 사람 사는 이야기도 아버님을 통해서 들으면 기승전결이 있고, 교훈이 있다. 말수를 줄이려고 노력하느니 아버님처럼 큰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스스로 위안 삼는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도착한 학원은 '중장비 학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주변이 논과 밭,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곳에 컨테이너 사무실과 협소한 공터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비가 와서 추워진 날씨에 차에 있던 담요를 꺼내 덮고 어른들 이야기를 엿듣다가(아버님은 상대가 누구든지 아는 사람처럼 오랜 대화를 하신다), 비 오는 풍경을 구경하다가, 차에 들어가 음악을 듣고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남해에 풍랑주의보가 떴다. 지난밤부터 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니 바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고구마는 아버님과 이른 새벽부터 통영으로 출장을 갔다. 덕구씨는 출근을 하고 어머님과 둘이 남았다. 어머님은 "은지가 기다릴까 봐 얼른 왔다. 오늘은 우리 둘이 데이트하자잉" 하시면서 평소보다 더 살뜰하게 대해주신다. 아침을 먹으면서 어머님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랜 세월 사업을 이끄는 아버님 곁에서 일과 사람을 챙기면서 살아오신 어머님은 아직도 현모양처가 꿈이라면서 현모도 양처도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하신다. 아직도 헤매는 중이지만 계속해서 노력할 거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다짐하시는 것 같다.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라 남편이 높은 곳에서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대신 땅을 돌보는 건 아내의 몫이라고. 그 또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 평소에는 이런 말에 가시가 돋는데 이상하게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이전 세대의 낡은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머님 이야기를 경청하며 결혼에 대해, 부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힘든 삶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지켜야 한다. 어머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 많이 베푸는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오신 것 같다. 어머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내게도 와닿는다. 내가 어머님 나이가 되었을 때도 그처럼 사려 깊게 삶을 대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어머님의 마음을 소중히 주워 담는다. "은지야. 머무는 동안 최대한 여기 사는 사람처럼 지내봐. 사람도 많이 만나고 많이 보고 느끼고 가." 관광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내 말에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밭에 쪽파 모종과 양배추 씨앗을 심으러 같이 가기로 한다.
"내일 비 소식이 있으니까 오늘 심어야 무럭무럭 자랄 수 있어."
사업 운영에도 깊숙이 관여를 하시는 어머님은 바깥 일도 벅찰 텐데 가사도 살뜰하게 챙기신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빠듯한 일정에도 미리 계획하고 움직이는 어머님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노는 게 좋아서 무직자로 살고 있는 나를 채찍질을 한다. 고생은 젊어서도 늙어서도 하기 싫지만 부지런하게는 살자.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살지는 말자.
취미 삼아 일구는 밭이지만 꽤 넓은 규모의 여러 가지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밭일은 처음이라 아는 것이 없으니 어머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구경만 한다. 한 번씩 강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뒤집어 놓는데도 어머님은 무신경하다. 허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아서 깨처럼 작은 씨앗을 얕게 판 땅에 한 꼬집 뿌리고 흙을 살짝 덮는 작업을 반복한다. 흙을 단단히 덮으면 씨앗이 못 올라오기 때문에 작은 새싹이 뚫고 나올 수 있는 정도로만 덮는다. 이렇게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이내는 줄기를 세우고 뻗어나간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살아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생이 있다. 나는 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의 생을 살아가는데 초석으로 삼는다. 자연은 거짓도, 꾸밈도 없고 정직하고 성실하다. 자연을 곁에 두면 힘이 나는 이유다.
밭 구석구석 남는 자리에 쪽파 모종을 일정한 간격으로 심는다. 이렇게 많은 모종을 언제 다 심나 했는데 막상 하다 보니 금방 끝이 난다. 땅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있으니 흙냄새가 솔솔 올라온다. 뭐든지 다 받아줄 것 같은 품의 냄새. 짜디짠 바닷물에 씻겨 비릿한 내음이 나는 백사장 모래와는 차원이 다른 대지의 내음.
곡괭이를 들고 밭고랑을 정리하는 잠깐의 노동에도 금세 허기가 몰려온다. 문득 찾아온 허기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은지야~ 이리 와서 이것 좀 따줘봐봐라이." 어머님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잎이 거의 떨어진 나무에 묵직하게 열린 주황빛 감 몇 개가 보인다. 통통하고 색이 진한 것으로만 뚝 따서 어머님과 베트남 언니, 나 각자 하나씩 손에 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의 일부였을 감을 대충 닦아 한 입 베어 문다. 서울 집에도 엄마가 가을마다 부지런히 단감을 사다 놓는데 굳이 챙겨 먹은 적은 없다. 즙이 없고 약간 마르고 뽀득한 식감이 과일 같지도 채소 같지도 않아서 맛없고 배부른 작물로 정의한 가을 단감. 적당한 때를 기다리느라 아껴두었다며 지금이 딱 맛있을 거라고 권하는 어머님에게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 허기나 달래볼 요량으로 별생각 없이 베어 물었는데 이상하다. 입속에 즙이 가득하다. 껍질째 먹는데도 떫지 않고 달다. 과장을 좀 보태면 배 같기도 하다. 얼마나 맛있던지 순식간에 꼭지만 남기고 뱃속으로 사라져버린 단감. 서울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단감이 시골에서는 귀한 새참이 된다. 풍요 속에서 무뎌지고 제쳐지는 기쁨이 또 얼마나 많으려나.
다시 돌아온 고구마네 집에는 식구가 하나 늘었다. 내가 남해에 도착하기 며칠 전 채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치즈 고양이가 퇴근하는 덕구씨를 따라 집까지 왔다고 한다.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부비대는 어린 고양이를 차마 내치지는 못하고 당장 서울에 가서 고양이 집과 사료, 장난감을 사 온 덕구씨. 이런 덕구씨의 넉넉한 정과 순수함을 첫 만남에서부터 재빠르게 알아챈 치즈냥이는 척박한 항구 마을에서 제 살길을 아주 온순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찾은 듯하다. 고구마의 부모님은 고양이를 극도로 싫어하시기 때문에 집 안에 들이지는 못하고 옥상 한편에 집을 만들어주고 밥과 물을 챙겨주고 있다. '또비'라는 귀여운 이름도 지어주었는데 고구마는 제멋대로 굴돌이(굴러 들어온 돌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덕구씨는 멀쩡한 이름 두고 왜 누나 멋대로 그런 이름을 부르느냐며 삐쭉거리지만 고구마는 굴러 들어온 게 맞지 않느냐며 도리어 큰소리를 친다. 끝까지 책임 못질 거라면서 반대를 하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또비의 안부를 확인하고, 안아주고, 놀아주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할 덕구씨에게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적당한 무게의 조언을 건넨다.
"자라지 않는 신생아를 10년~20년 동안 키운다고 생각하면 돼요."
하루 종일 일이 있어 집을 비운 가족들을 기다리며 혼자 미루어둔 일들을 하다 저녁때를 놓쳐버렸다. 퇴근한 덕구씨는 "누나, 저녁은 먹었어요?" 묻더니 이내 과자 한 봉지를 가져다준다. 식구의 정이 무서운 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밥 먹자고 하고, 얼굴만 보면 밥 먹었냐고 묻는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이다. 주제는 밥이지만 결국은 안위를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이니까. 떨어져 있든 붙어 있든 밥을 잘 챙겨 먹는지만 확인해도 적당히 잘 지내고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어쨌거나 때를 놓치니 밥 생각은 없고 술 생각이 난다. 10월의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인지 시원한 맥주가 생각이 나서 멀리 떨어진 편의점에 가 만 원어치의 맥주를 산다. 덕구씨가 준 스윙칩을, 고구마와의 수다를, 축구 경기를 안주 삼아 맥주로 배를 채우고 잠이 든다.
이번 남해행에는 일을 도우러 왔다는 또렷한 목적이 있어서인지 아침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몇 번의 이직으로 여러 사무실에서 일을 했지만 단연코 이 사무실이 내 취향에 딱 맞다. 큰 창을 통해 보이는 바다, 배가 드나들 때마다 들리는 소리, 시원한 바람까지 일의 능률을 올리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일이 있을 때는 벽을 바라보는 책상에 앉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나 고구마가 다른 바쁜 일이 있을 때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메일함을 확인하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다. 글을 쓰다가도 생각이 멈출 때마다 창 너머의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멈추었던 사고가 자연스럽게 다시 흐른다. '흐른다'라는 말, 참 멋있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어느새 또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고, 가만히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늘 그곳에 있지. 그냥 보면 하나 같지만 사실은 전체이기도 하고. 양 끝에서 대립하는 속성을 모두 포함하는데 말은 하나, '흐름'.
남해에서의 하루 루틴은 주로 고구마의 업무 일정을 쫓아다니는 일이다. 고구마는 바빠서 어디 구경도 못 시켜준다고 미안해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일상이 더 좋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가까이서 보는 게 좋고, 내가 진짜 이곳에 사는 사람이 되는 기분은 더 좋다. 서류를 접수하러 방문한 남해군청은 미조에서 약 30분 거리의 읍에 위치해 있다. 고구마 말로는 남해읍이 이 주변에서 그나마 큰 읍이라는데 서울 변두리 동네만큼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큰 길가에서 한 골목만 들어가도 오래된 목욕탕이나 가게들이 즐비한, 오래된 영화에서 볼 법한 동네를 걸으며 시간 여행을 한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떠올리고 지금은 변해버린 그 동네를 떠올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구마는 또 "어디 가고 싶은데 없나?" 하더니 카페에 가잔다.(늘 자기가 묻고 자기가 정하는 편) 인스타그램에서 본 한옥 카페 <화소반>은 상주에 위치한 바닷가 옆 카페다. 정자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담배연기를 뻐금대며 장기를 두고 있고 애처롭게 주눅이 든 이름 없는 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주말에는 손님으로 북적이겠지만 성수기도 주말도 아닌 지금은 고요하기만 하다. 벽에 적힌 시가 언젠가 보았던 소설의 한 부분과 닮았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내 인생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세계와 세계의 만남이고 우주와 우주의 만남이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서점에서 여러 책을 들추어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이었는데 따로 기록해두지 않은 데다 제목도 기억하지 못해서 대강의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는 그 작품, 한국 작가의 소설이었다는 것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그 작품을 떠올리며 시를 읊조린다.
오래된 가구를 만지고 열어젖히고 하다 보니 좀처럼 낯짝을 내보이지 않는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든다. "이런 걸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엄청 비싸겠지?", "조개껍데기를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만들까?" 계속되는 질문에 고구마는 일일이 답을 해준다. 고구마를 따라 주문한 뱅쇼는 달큼한 시럽 맛이 나서 내 취향은 아니었으나, 계피를 오래 담가 두었다가 마시니 끝물이 돼서는 훨씬 맛이 좋다. 얇게 썰린 사과도 아삭거리며 먹는다. 와인 맛이 나면 더 좋았을 텐데.
계절이 바뀌니 해가 짧아졌다. 7시가 되면 어둠이 내려앉는 시골마을에서는 유난히 밤이 길다. 저녁을 먹고 적당히 쉬어도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옥상에 나가 또비와 논다. 또비는 빗질을 해도 배를 만져도 할퀴거나 무는 법이 없다. 길 고양이라고 믿기 힘든 뽀얀 털과 낯가림도 없이 아무한테나 부벼대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켠이 찡하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아서. 이러다가 길에 사는 거친 녀석을 만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술 취한 누군가의 발길에 걷어 채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럽다. 장난감을 흔들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주시하다가 불시에 튀어 올라 잡는 모습이 그렇게 예쁜지 고구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댄다. 또비의 친화력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고양이의 털을 만져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우리 집 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보드라움이다. 중독성 있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옥상에 나가면 또비가 나를 빤히 본다. 그러고는 이내 내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배를 보이며 발라당 눕는다. 고양이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런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턱이나 이마를 만지고 있으면 문득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이유도, 옥상에서 만나면 먼저 다가오는데 마당에서 만나면 도망가는 이유도 모른다. 관심을 기울이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하나 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궁금증은 늘어난다. 아무튼 옥상에서의 시간이 또비로 인해 조금 더 달콤해졌다. 서울로 돌아가면 그리울 순간과 보고 싶을 것들이 이미 많은데 또비로 인해 몇 가지 더 늘어나서 벌써 마음이 시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