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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Aug 01. 2021

책 이야기 2_

해가 지는 곳으로/최진영/민음사

해가 지는 곳으로/최진영/민음사


기억할 한 문장

오늘은 어제와 다른 곳에서, 내일은 오늘과 다른 곳에서 지는 해를 보는 것. 되도록 빨리 지금을 벗어나는 것.


기억하고 싶은 생각들

이름 모를 전염병에서 시작된 무정부 상태의 재난을 다루는 아포칼립스 형식의 소설에서 왜 결국 사랑을 찾고 있을까.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을 구원할 투수는 유일하게도 사랑이라는 것은 뻔하고 식상해서,

마치 '사랑' 이란 단어 앞에 그동안 고민하고 싸워왔던 모든 복잡다기한 것들이 단숨에 사라지는 거 같아서,

사랑이란 결론은 참으로 못마땅 하지만 개인의 발화가 우리의 발화로 끝이 나고, 전염으로 시작해 사랑해로 끝나는 이 소설을 미워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든 써먹으려 하는 아감벤의 논의를 또다시 가져오면,

이 소설은 두 가지 예외 상태의 교차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리' 와 '지나' 의 퀴어 연애 구조와 아포칼립스적 예외 상태가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예외 상태는 극한의 상황이 일상이 되는 상태를 말하며, 이것의 가시화를 통해 '정상적인' 법 질서나 보편 규범의 규정이 가능해진다.

즉 소설의 예외 상태는 우리가 평소 가정하던 보편적 이성애 구조와 국가 공동체를 잘 보여주는데, 이런 기존의 구조는 '이성애적 유토피아 국가'라는 복합적이면서도 매우 깔끔한 미래를 상상케 한다.


허나 퀴어 연애와 아포칼립스 상태는 유토피아적 상상에 찬물을 끼얹고, 미래 없음의 개념으로 상상을 뻗어가는데, 이는 이 소설을 미워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퀴어 연애와 사랑, 아포칼립스 상태에서 피어나는 느슨한 인류애. 그것은 유토피아를 상상케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없음, 혹은 죽음, 너무 멀리 나아갔다면 당장의 생존과 의미부여로 이어진다.

결국 사랑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감정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여기 살아 남기 위해, 죽고 싶지 않아서, 혹은 살고 싶지 않아서 행하는 막을 도리 없는 감정이자 행위로 남을 것이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막을 도리 없는 미래 없음의 사이에서,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이렇게 만날 수도 있을 것"(158쪽)이라고 믿는 주인공은 생존을 위한 사랑이자 사랑을 위한 생존을 진행하며,

"이대로 서로를 나눠 갖는 것만이 우리를 잠시 스쳐 가는 희망"(65쪽)임을 단호하게 깨닫는다.

그렇게 더이상 미루지 말자고, 사랑하는 것을 미루지 않고, 도망치지 말고, 삶 쪽으로 간절히 손 뻗으며 살아내보자고.


이런 사랑은 모든 고민을 지워버리는 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고민 속에 함께 하는 구차하고 현실적인 사랑이며, 구차하고 찌질하기에 더욱 위로로 다가오는 사랑이다.

구차한 우리가 사랑해, 라고 말하는 여기에서, 결국 우리는 서로의 슬픔이 서로를 아프게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아프게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앞에서 멈추게 한다는 것. 멸망하는 세계 속에서도 고요하고 번잡스럽게 살아남은 사랑이 여기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일까.

하여 우리가 바로 오늘 견뎌야 할 어둠 역시 결 다른 것이겠지만, 밤이 온전히 우리를 장악하기 전 그 사랑이 나에게, 당신에게 건너갈 수 있을 것이라고.(205쪽)

잠시, 건너가 보겠다고, 들리지 않는 곳에 나도 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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