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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Jul 13. 2021

연극 이야기 6_사랑 2를 보고나서

사랑 너머의 것들에 대하여

먼저 관객에게 평가할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연극인지는 모르겠으나, 관객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가장 무책임한 자세로 극장에서 존재할  있다는 특권을 가지고   적어보는게   되는 행복입니다.


단편적으로 담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관계성과 사랑과 혐오의 감정을 매우 단편적인 정보 하나만을 가지고 담으려고 애쓰는 느낌이 강했다. 혐오의 끝은 죽음이었을까. 혐오의 공포의 끝이 죽음이었을까. 죽음 뒤에 또다시 사랑을 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증오와 분노와 괴로움이 없는 사랑은 무엇이고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어떤 물음에도 연극은 불친절했다. 불친절한 연극이 마땅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불친절한 연극 앞에서 나와 같은 관객은 길을 잃고 어리둥절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내 나름대로 해석하겠다고 노력을 해본다. 사랑은 다른 말로 증오와 울분, 실망감과 아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하는 주체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모양 자체가 그리 생겨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증오와 울분을 비롯한 부정의 것들이 없는 사랑이 올 것이라 예견되었으며, 그것이 복수와 죽음을 통해 온다? 복수는 행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복수가 원인이 될 수 있는 결과는 복수 뿐이다.


그럼 복수와 죽음을 통해 가져올 사랑 2는 없는건가. 난 없다고 생각한다. 괴로움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시시할지도 모른다. 이별의 슬픔 없이 만나서 즐겁고 즐겁다고 뽀뽀뽀, 뽀뽀뽀하며 사랑해 사랑해 하는 사랑은 없을 것이다. 만나서 즐겁고, 즐겁다고 뽀뽀뽀, 뽀뽀뽀하며 사랑해, 근데 너 왜그래 실망이야, 나도 실망이야, 그만해 아프단 말이야, 가 사랑 일련의 과정이지 않을까.


슬픔으로 끝이 나는 과정을 그래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용서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용서함으로 우리는 다시를 말할 수 있다. 다시 너를 말하기도 하고, 다시 다른 것을 사랑이라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랑, 다음 사랑의 종착역은 용서다. 용서는 다시 사랑으로 돌아간다. 용서는 사람을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작용하는 구심력일 것이다.


용서를 의미하는 장면과 대사 하나 없는 연극에서 나는 용서를 상상한다. 잘못된 상상일지라도, 나는 책임질 것 없는 관객이기에, 무거울 줄 모르고 가벼운 입을 나불거린다. 나에게 어떤 꿍꿍이는 있을 수 없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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