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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Dec 07. 2021

책 이야기_6

앞으로 올 사랑/정혜윤/위고

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연극을 한다고 글에 소홀했다. 연극이 막을 내렸으니 무대 위에 쏟아진 언어를 다시 주워 담아 글을  본다. 제대로 주워 담지 못해 빈틈투성이지만.   없는 나의 이야기를 지워보자고  계정을 열었는데,  이야기로 시작해버렸다. 변명을 하자면 오늘 이야기  책이  사랑을 다루고 있어서. 나에게 글쓰기와 연극은  사랑이자 사랑을 하는 방식이니까.


정혜윤은 「앞으로 올 사랑」을 통해 코로나와 기후위기로 드러나는 디스토피아의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열 가지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러한 사랑의 이야기의 공통점이라면, 그 사랑이 지금껏 행해졌던 방식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인데, 사랑을 주고받는 주체의 차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차이일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렇기에 사랑의 유일한 행위자가 되었던 인간뿐 아니라, 단 한 번도 마음을 주지도 않았으며, 줄 필요도 없었던 비인간 존재들로 뻗어가는 사랑을 정혜윤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은 디스토피아의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일지 모른다. 코로나 19 라는 인수공통 감염병을 겪으면서, 우리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존재가 사실은 나와 매우 ‘긴밀’ 하게 얽혀 있음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 혼자서는 아예 성립조차 불가능”(21쪽)한 것이 지금 살고 있는 세계임을 선연하게 인식한 채, 우리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행위자들의 얽힘 속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펼쳐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내 삶의 안이자, 바로 옆이자,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사랑은 아주 멀리 가기도 할 것이고, 바로 앞에 콕 머리를 박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사랑을 주어 본 적 없는 비인간 존재와의 사랑은 어쩌면 ‘함께 – 되기’ 의 과정을 수반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위해 필요한 상호 이해는 나라는 주체를 놓지 않은 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서로가 되어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차이를 실감하면서 동시에 밖 아닌 옆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혜윤은 박쥐 – 되기를 실천하는데, “나는 정혜윤이고 오늘 나는 박쥐다. 나는 니파,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인간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에게로 왔다”(221쪽) 라고 박쥐가 되어 선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함께 –되기의 과정을 거친다면 우리는 고정된 행위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


소중한 타자(significant others)라니. 지겹도록 레포트에 사용하던 언어가 사적 글쓰기의 과정을 침범한 것일지 모르지만, 함께 – 되기의 과정은 ‘부조화스러운 행위 주체들과 삶의 방식을 적당히 꿰맞추는, 기초적인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여, 유한한 관계 속에서 타자를 실감하게 할 것이다. 즉 나와 전혀 다른 타자의 감각과 반응, 나의 언어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실감하고 마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 가 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소중한 타자’에서 퀴어-친족 이론을 떠올리면 정말로 학기 말에 몰려 레포트에 파묻힌 학부생 같겠지만. 퀴어-친족 이론, 다시 말해 “가족 혹은 자신의 후손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른(Other) 종과 인간들까지 소중한 타자로 상상하는 것”은 디스토피아 시대 속 앞으로 다가올 사랑과 끊어낼 수 없는 매듭으로 이어져 있다. 피로 맺어진, 나의 일부를 당신이 가졌다는 확신이 아니라, 나의 일부마저도 전혀 몰랐던 당신에게 내어줄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내는 사랑은 분명 앞으로 올 사랑일 것이다.(이미 왔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랑은 피난처를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랑을 말하기 어려운 시간이 되어버린, 그 시간 속에서도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존재들이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265쪽)을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연대할 것이다. 죽지 않은 채로, 서로가 지독하게도 얽혀 있음을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말이다.


갑자기 딴소리지만, 두 계절이 지나가는 시간 동안 ‘환란의 세대’(이랑)란 곡을 참 많이도 들었다. 환란의 세대 속에서 확 같이 죽어버리자-! 절박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한 편으로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자신이 죄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는데, 나는 목을 매어보지도, 손목을 그어보지도, 약을 한꺼번에 엄청 많이 먹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그리 가까워본 적도 없으면서, 죽어버리자-! 는 말이 멋있어 보여서 따라부른 것은 아니지? 라고 물어야 했다. 그럼에도 죽어버리자고 “귀한 내 친구들”에게 말하고, 혼자 아닌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 고 외치는 건 꼭 살아가자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각자의 몫만큼 절박하고 처절할텐데, 그것들이 한 데 모이니 꼭 살아가자고, 그니까 사랑하자는 마음 같았다.


환란의 세대이자 시대라고 여겨지는 지금에서도 우리는 사랑하자는 말을 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매우 안전하면 좋겠지만 위험해도 같이 있으니 괜찮은)피난처가 되기 위해서 혹은 환란의 시대 속에서도 살아있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잠’ 이 소중한 피난처처럼 여겨지는데,(반점을 찍은 순간 새벽 5시가 되었다) “잘 자요는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 잠드는 거”(287쪽)라고 하니, 글을 맺는 말은 아무래도 “잘 자요” 가 좋겠다. (모두들, 나의 소중한 타자들에게)


*큰 따옴표 안 문장들은 앞으로 올 사랑, 해러웨이 선언문, 「1990년대 이남희 소설의 희망론: 생태주의와 퀴어/페미니즘의 교차점을 모색하기」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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