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지금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사랑한 적이 없다. 많은 영화감독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을 한다.
7살 때 처음 봤던 영화에 매료되어...
oo를 천 번 이상 봤고...
10대 때 처음 영화를 만들었고...
oo감독을 너무 좋아하고...
나는 이 중 어느 것에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K-pop을 소비하며 살아왔고,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영화관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TV에서 본 전설의 고향의 '내 다리 내놔' 귀신이고, 내가 가장 많이 돌려 본 영화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이다. 나는 성공한 몇 영화 덕후들을 빼고는 대부분이 나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영화 제작자들에게는 영화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나 기억이 있었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사랑하는 감독이나 배우를 가슴에 품고 있었고 그들이 말하는 고전영화는 내가 듣지도 보지 못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니까 의무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지만 사랑하지 않으니 잘 안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감독의 이름이나 배우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검색을 해보아도 금방 까먹는다. 다들 아는 만큼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박찬욱, 봉준호 정도를 아는 정도이다.
며칠 전에 오랜만에 지난 프로젝트에서 만났던 피디님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요즘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생계를 걱정하는 많은 영화인들의 소식을 전해주셨다. 남들의 불행에 나만 못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큰 위로를 받았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힘이 든다. 프로젝트를 하나 할 때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한 번은 각 파트의 스텝들에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단 한 명도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그중 한 스텝은 수명을 깎아서 일을 하는 거라고 말했다. 많이 공감이 되었다. 나도 프로젝트를 하나 할 때하마다 수명이 주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영화 만드는 일은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악마와의 계약과 비슷하다.
진짜 이상한 건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를 사랑한 적도 없도 없는 내가, 지금도 쉴 때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보다는 드라마를 보는 내가 왜 아직도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냐는 것이다. 왜 유튜브가 아닌, 뉴스가 아닌, 방송이 아닌,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거냐는 거다. 올해 초 나의 목표는 절대 영화를 만들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심리학 공부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5월 현재의 나는 세 개 이상의 영화를 만들거나 기획하고 있고, 심지어 내 돈을 들여서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나에게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영화들이 몇 개가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내 소비벽에 대한 글을 쓰다가 나의 소비 경향이 내가 빠진 영화와 많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는 그 세상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나는 이 영화들을 아주 주관적으로 내가 매료되었던 부분들을 중점으로 나의 자전적 이야기와 함께 풀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