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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Jan 02. 2024

느리게 걷기

D+60 북쪽길 19일 차

✔️루트 : Miengo - SantillanadelMar (약 19km)

✔️걸은 시간 : 5시간 15분






누군가가 잠에서 깨웠다. 오늘 함께 걷기로 한 한국 순례자였다. 7시 아침을 먹고 7시 40분쯤 출발하자고 했는데 7시 30분이었다. 남들이 일어나면 나도 알아서 눈이 떠지겠지 했는데 너무 푹 자고 있었다. 


비몽사몽 나오니 다들 이미 아침을 먹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 순례자들은 천천히 걷고 있겠다며 먼저 출발했다. 오늘도 역시 피로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짐을 싸며 하루 쉬었다 갈까 잠깐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걷자.''


하루 쉬어갈 용기는 안 나고, 그렇다고 걸을 힘은 없어 카페에 앉아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걷기 싫은 마음이 강해서였는지 술술 잘 써졌다. 결국 카페에서 3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11시가 넘어서야 출발했다. 영 걷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없는 채였다. 


강 건너 다음 마을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 돌아가는 길을 걷기 혹은 기차 타고 강을 건너가기.
원래는 걸어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 기차를 타기로 했다. 1시간에 한 대씩 있는 기차를 기다리며 못 다 쓴 일지를 더 써 내려갔다. 




강만 건너서 내리면 되는 줄 알았다.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는데 순례길 표식이 없었다. 어플을 보니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렸어야 하는 듯했다. 진작 검색 좀 해볼 걸 이라는 후회를 할 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기차역 바로 앞에 카페가 있길래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오믈렛 한 조각이 부족해 다른 하나를 더 시켰다. 사실 배는 찼는데 몸과 마음의 피로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새로 시킨 오믈렛을 한 조각 먹자마자 배가 불러 도시락통에 담았다. 카페에서 또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Mar라는 마을까지는 기찻길을 따라 걸었다. 날씨가 어제처럼 덥지 않아 걷기에 좋았다. 플라톤아카데미 TV라는 유튜브 채널에 걸으며 듣기에 좋은 콘텐츠가 많아서 재생목록 하나를 무작위로 들으며 걸었다. 풍경도 즐기고 산탄데르에서 산 마커로 순례길에 메시지도 남기면서(라고 쓰고 낙서라고 읽는다.) 천천히 걸었다.



길을 향해 놓여있는 조각물들을 보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정원을 가꾼 주인이 아닌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걷다보면 내가 맞는 길로 가는 건지 불안해질 때가 있다. 길에 조그맣게 써있는 Buen Camino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걷다보니 다다른 중세시대...가 아닌 Santillana del Mar.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든다 
정말 오래된 성당이다. 아쉽게도 철문이 닫혀 있었다.


Santillana del Mar는 무슨 중세시대 영화 세트장 같았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둘러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명한 곳인지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가 많았다. 큰 성당이 있길래 미사가 있는지 보니 8시에 있다고 했다. 아 알베르게 저녁시간이다. 저녁을 거를 순 없었기에 미사를 거르기로 했다. 


알베르게에 가니 한국 순례자들과 어제 봤던 독일 순례자가 정원에서 쉬고 있었다. 우선 체크인을 했다. 오늘의 방은 2층 침대가 하나만 있는 방이었다. 아직까지 나 혼자였다.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리셉션 직원을 통해 저녁식사 전 알베르게 바로 앞에 있는 성당에 들릴 수 있었다.



앉아 계신 수녀님들에게 묵주에 축성을 담고 싶다는 내용의 구글번역기로 돌린 글을 보여드렸다. 수녀님이 스페인어로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수녀님이 하시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번역기 대화모드를 켜고 휴대폰을 들이미니 수녀님은 화면에 뜬 ‘Habla ahora(지금 말하세요)’를 소리 내어 읽으시며 혼란스러워하셨다. 나는 휴대폰에 말을 하는 시늉을 하며 '여기에 대고 말해주세요'라고 몇 번이고 말해보았지만 내가 휴대폰을 들이밀 때마다 '지금 말하세요'를 몇 번이고 되뇌어 읽으시곤 풀기 어려운 넌센스 퀴즈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으셨다. 


마침 신부님이 나오셔서 다시 한번 번역한 글을 보여드렸다. 신부님은 모두를 위해 큰 소리로 글을 읽으셨다. 다른 수녀님들은 그제야 '아~'하면서 사랑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신부님이 묵주에 축성을 내려주셨다. 뭐라고 길게 말씀하셨는데 못 알아 들었다. 나중에 영어를 하시는 수녀님이 번역해 주셨는데 내용은 까먹었다. 감동을 받았었는데…


저녁식사 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야채 수프가 나왔다. 너무 맛있어서 많이 먹었다. 닭고기는 그냥 그랬다. 바닐라 푸딩은 행복했다. 밥을 먹고 정원으로 나오니 하늘도 예쁘고 다른 순례자가 치는 기타 소리가 좋아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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