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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Jul 05. 2023

[소설] 운명과 우연

4탄. 충돌

새벽 4시쯤 들어온 아린은 엄마의 살기 어린 눈총을 받으며 잠이 들었다. 다 큰 성인이기에 왈가왈부 입을 대진 않았지만 백수가 술에 취해 외박을 했으니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결국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두꺼운 일반상식 책을 손에 들고 엄마를 피해 오전 7시쯤 다시 집을 나섰다.


화장도 대충 지우고 샤워를 못해 몸에서 꿉꿉한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들떠있었다. 마법에서 풀려 누더기옷을 걸친 신데렐라처럼. 무릎이 나간 추리닝을 입은 채 어젯밤의 일들을 떠올렸다. '미쳤다, 미쳤어. 아무리 운명을 믿는다지만 어떻게 처음 본 남자랑 키스를 하니. 진짜 쉬운 여자로 보였겠지?'


아린은 불안했다. 남자가 술에 취해 그녀와 키스했고 자신을 그렇고 그런 여자로 여겨서 연락을 하지 않을까 봐. 그런데 도서관에 도착할 때쯤 우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린아 안녕? 나 오늘 출근을 못했는데 너 시간 되면 봐도 되나?"

"오빠, 안녕하세요? 어제 과음하셔서 출근 못 한 거예요? 지금은 괜찮아요? 근데 저 도서관에 공부하러 왔어요." 분명 어제 말을 놓았는데 술이 깨니 극 존대를 하는 아린이었다.


헤어진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보고 싶다는 우영의 말에 설레면서도 당황했다. 이런 후줄근한 고시생 컨셉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서클렌즈 대신 두꺼운 뿔테안경의 아린을 못 알아볼 게 뻔하다. 그러나 우영은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한 시간 거리의 도서관을 지하철과 버스로 환승까지 하며 왔다.

메이크업이 지워진 안경 쓴 아린이의 모습이 귀엽다며 즐거워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폰으로 찍더니 바로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당장 지우라며 폰을 뺏으려는 아린의 손을 붙잡더니 주머니에서 페레로로쉐 초콜릿을 꺼내 쥐어주었다.


"이게 뭐예요?"

"너 이 초콜릿 제일 맛있댔잖아. 너 주려고 샀다."

"어머! 오빠 섬세하네요.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감동이에요."

"그치?  좀 멋있쟤? 앞으로도 이렇게 챙겨줄 테니 나랑 사귀자."

"네?!"

만난 지 채 하루도 안 돼서 받은 고백이었다. 그러나 운명을 믿는 여자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고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

우영은 만화 영심이에서 주인공 영심이를 짝사랑한 왕경태를 떠올리게 했다. 영심이가 아무리 틱틱거려도 곁에 있는 경태처럼 정말 최선을 다했다. 평일에는 퇴근 후 통근 버스를 타고 그녀가 있는 도서관에 거의 매일 왔다. 공부가 끝날 때까지 곁에 앉아 노트북을 하며 기다려줬고 밤늦게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며 꼬박꼬박 집 앞에 데려다줬다. 그녀가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입사시험과 면접을 보러 가게 되면 친구의 차를 빌려서 같이 갔다.


우영이 퇴근 후 피곤하고 힘들까 봐 오지 말라고 했던 아린이었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귀하게 여겨주는 그의 배려가 달콤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해 본 아린은 미처 자신이 찐 연애를 하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짙어질수록 소유욕과 집착, 의심의 병도 심해진 다는 것을.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서 아린은 토익공부를 하고 우영은 노트북으로 웹툰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잠이 온다고 투정을 부리니 남자는 커피를 사 오겠다며 핸드폰을 둔 채 자리를 비웠다. 평소에 그의 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전화가 세 통째 계속 오고 있었다. 액정에는 '김예나'라고 여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머리로는 '받으면 안 돼, 아린아!'라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그녀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여보세요? 우영 오빠~뭐해요? 지금 애들이랑 술 마시고 있는데 와서 저희 술 좀 사주세요~."

하이톤의 통통 튀는 성격이라는 게 목소리로 느껴졌다. 

"지금 우영 씨 잠깐 커피 사러 갔는데. 누구시죠?"

"전화받는 분은 누구세요? 아~ 우영이 오빠 여자친구?"

"... 네, 그쪽은 누구시냐고요?"

누구인지 말도 안 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수화기 너머 여자가 거슬렸다. 처음엔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저 우영이 오빠랑 같은 회사 동생인데 오빠 오면 전화 달라고 해주세요."

"네."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더니 통화가 끊어졌다. 불안도가 높은 아린이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 우영이 돌아왔다.

"예나가 누구야?"

"예나?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생인데?" 우영은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이 대꾸를 했다.

"그 가시나 왜 퇴근 후에 오빠한테 술 사달라고 연락하는데?"

"아~친해서 그래. 다른 애들이랑도 다 친하다. 자주 그런다. 근데 니 내 폰 봤나?"

"... 내 의심하나? 폰을 본 게 아니고 전화가 계속 오길래 급한 건가 해서 받았다. 근데 오빠한테 꼬리 치는 거 아니가? 지금 10시가 다 돼 가는데 나오라고 한다고? 여친있는 직장 선배한테?"

"내 연애하는 거 회사 사람들 다 안다. 일부러 장난치는 거다. 신경 쓰지 마라."

"별 미친...또라이네."


아린은 우영 앞에서 처음으로 욕을 했다. 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평소에 욕하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는 정이 뚝 떨어진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나? 이름도 거지 같네. 그 계집애 낯짝 한 번 봐야겠다.'

"김예나 얼굴 좀 보여줘. 어떻게 생긴게 애인 있는 선배한테 이 늦은 시간에 술 사달라고 헛소리를 하는지 봐야겠다."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내 못 믿나? 그러게 왜 남의 전화를 함부로 받아서 이러는데?"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화를 내는 우영이었다. 아린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이 오버랩되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영업 사원이었던 아빠는 접대차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에 자주 갔고 거짓말을 잘 못해서 엄마에게 발각 됐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린은 두 분이 이혼하실까 봐 불안했다. 주위에 남자들 중 바람을 안 피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바람을 피우셨고 고모부들도 바람을 폈고 친구들의 남친들도 바람을 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을 쿨하게 넘길 수 없었다. 우영이가 지금까지 아린이에게 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서 사라졌다.

'수영이가 직장에 여자들이 많다고 했었는데... 얘 말고 더 있는 거 아냐? 나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여자들도 회사에 있을 수 있겠네...'

운명이라고 믿었던 관계에 의심과 집착이라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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