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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n 25. 2024

천만 반려인 시대에

배려


승강기에서 막 내릴 때였다. 어머나!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내딛는 순간, 큰 개가 컹컹 짖으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한동안 두근거렸다. “너, 왜 그래? 갑자기 그렇게 짖으면 어떡하니?” 견주에게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같은 아파트 그것도 같은 동에 사는 이웃인데 얼굴 붉히고 싶진 않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내 딴에는 점잖게 놀랐다고 표현했다.


그 이웃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물론 몇 층 몇 호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근래 이사 온 사람인지 전부터 살았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육십 대쯤 된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 중 여자가 놀라는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단지 미안하다고만 했다. 미안(未安)은 어휘 그대로만 본다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는 의미다. 자기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는 지극히 소극적인 표현이다. 남자는 멀뚱 거리며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내게 모른 척했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소극적인 표현이지만 미안하다고 하는 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그 말에 진정성이 담기고 말고는 그만두고. 사실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미안하다는 말이 건조하게 들렸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당시 감정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는 게 보통 아닌가. 놀란 가슴 때문에 그렇게 들렸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공동 현관문을 열 때였다. 개와 함께 승강기에 오르던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또렷이. “어휴, 지수 놀랐으면 어째요? 지수야, 괜찮니?” 그 개 이름이 지수인 모양이었다. 어이없었다. 내가 지른 외마디 소리 때문에 개가 놀랐을까 봐 걱정하는 게. 정작 놀란 내게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던 여자다. 욱하는 기운이 불끈 올라왔다.


못 들은 척 참았다. 옳지 않은 데엔 물불 가리지 않고 따지던 난데, 성질 많이 죽었다. 이웃 간에 싫은 소리 해봐야 또 마주치게 될 때 좋은 것 없고, 옥신각신하는 것도 내 품위만 손상될 듯했기 때문이다. 그 개도 안 물어갈 품위 때문에 요즘 내가 자주 손해 보고 있다. 이일 저일. 이번에도 그냥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개도 안 물어갈’이라는 표현을 쓰자니, 품위 있는 글이 되지 못할 듯싶어 머뭇거렸지만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성질 많이 죽은 게 아니라 다 죽었다.  


산책하는데 영 거슬렸다. 왜가리에게 푸념 섞어 말을 걸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승강기에라도 이 이야기를 써서 붙일까? 지순지 뭔지 그 개, 견주 보라고.” 왜가리는 아무 말 없이 먼 산만 바라보다 날개를 퍼덕이며 낮게 날았다. 개망초꽃에게, 아니 저 원추리꽃에게 물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물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 걸까 봐 그런지. 속상할 때 전화번호 뒤적이면 막상 걸어 호소할 데 없는 것처럼, 어디다 대고 말할 곳이 없었다.  


생각을 떨치기 위해 더 빠르게 걸었다. 아니 그런데 개 이름이 지수가 뭐야, 하필 내 조카 이름을. 중얼거리며. 지수든 수지든 무슨 상관이랴마는 별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뜻하게 잊어버리자고 마음먹을수록 끝이 영 찜찜했다. 개 놀란 것이 이웃 놀란 것보다 더 중하단 말인가. 뭣이 중헌디. 허 참, 내 뒤끝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 실소했다.


아무래도 그 이웃을 다시 만난다면 한마디 제대로 해줄까 싶다. 하지만 보름이 지난 어제까지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개는 정확히 기억한다. 털 색깔이 갈색과 흰색이 섞인 걸로 보아 래브라도 트리버가 틀림없다. 덩치가 제법 있는 걸로 보아 성숙한 개다. 트리버는 사람을 좋아하고 명랑한 성격을 가졌다는데, 그 개는 나를 보자 반가워서 그렇게 컹컹 짖은 걸까.


무념한 상태로 승강기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짖은 개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러니까, 왜 짖느냐고, 갑자기 짖어서 놀랐다고, 웃으며 말한 게 아닌가. 나도 개를 좋아한다. 지금은 기르고 있지 않으나 어릴 적 우리 집에 언제나 강아지 ‘예삐’가 있었다. 하도 예뻐서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산책하다 강아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적이 별로 없다. 쳐다보거나 말을 걸기도 한다. 그 정도로 우호적이다.


놀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가 놀랐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는 그 사람들의 태도가 거슬릴 뿐이다. 내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면, 얘가 사람을 보면 반가워서 이런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도 반갑다며 또 만나자고 했을 거다. 놀란 가슴도 금세 가라앉았고. 개 놀란 게 걱정돼도 3초만 참았다가 승강기 문이 닫히고 나서 했다면, 내 기분이 그렇게 상하진 않았을 거다.


현재는 반려인 천만 시대라고 한다. 지순지 수진지 그 견주 같은 사람은 문제지만 나도 환경과 상황만 되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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