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by 노정연

1.


책 사는 일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몇 년 전 출판계에 이른바 초판본 열풍이 불었던 것을 기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소형 출판사가 1925년 출간되었던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원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출간한 것이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 책을 시작으로 우후죽순처럼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책들을 초판본 형태로 출간하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나고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초판본 출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장르인 시집의 경우, 우리가 보통 그것을 접하는 일이 시험 문제나 교과서의 지문 아니면 명시 모음집 같은 데서 낱개로 발췌된 것과 같은 재출간의 형식을 거친 경우일 때가 많았음을 생각해볼 때, 책이 묶였을 바로 당시의 편집 체제와 표기와 디자인이 살려져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뢰감이 드는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판본을 읽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주겠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던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보다 중요합니다.


예컨대 김영랑의 『영랑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제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나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에서 제목처럼 쓰이는 것들은 모두 시의 처음이나 중간 구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시조의 제목 짓는 방식에서 따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러한 사실들은 시집을 직접 읽어보지 않는다면 현대의 독자들이 알아채기 어려울 것입니다. 초판본 출간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초판본 출간의 대상이 된 시집들은 꽤 많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명작 위주라 할 만합니다. 대표적인 책들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정지용의 『정지용시집』과 『백록담』, 김영랑의 『영랑시집』과 백석의 『사슴』, 이육사의 『육사시집』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시집은 아니지만 현진건의 『조선의 얼골』이나 김유정의 『동백꽃』과 같은 소설집이 출간된 것도 눈에 띄고,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하는 임화나 노천명의 『현해탄』과 『사슴의 노래』가 출간의 대상이 된 점도 흥미롭게 여겨집니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집』 역시 초판 형태로 출간된 적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초판본 현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라 논외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살펴보면 유독 빠져 있는 이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서정주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이들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많은 애송시를 가지고 있고, 평단의 관심과 독자의 호응을 모두 얻은 시집을 최소한 여섯 권 이상 남긴 다작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판본 출간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서정주 전집을 출간했던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근년에 서정주의 대표적 시집 일곱 권을 새롭게 출간한 일이 있긴 했지만, 이는 상업적 목적을 노린 것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아무도 안 하는 일을 떠맡아 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초판본 출간을 하려는 과정에서 시장의 논리가 은근히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책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문화 '상품'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출판사 입장에서는 명작 혹은 대표적 작품을 위주로 대상을 선별했겠지만, 독자들에게 말하자면 비호감으로 각인되어 있는 서정주의 책을 자신들이 낸다는 것은 무모한 용기처럼만 느껴졌을 것이고, 또 실제로 책이 나왔다고 해도 독자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현재 나와 있는 서정주의 책에 대한 인터넷 리뷰 같은 것이 그 명성에 비해 상당히 적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한편 대중적 이미지에 있어서 서정주와 대척점에 서는 시인은 아마 윤동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장에서의 호응이 이렇게나 강한 시인도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초판본 현상을 통해서만 살펴보더라도 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첫 출간인 1948년판뿐만 아니라 50~6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나왔던 증보판이 모두 재출간되는 이례적인 양상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차라리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도서 사이트 같은 데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고작 몇 해 사이에 그를 다룬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상업적 목적 외에는 별로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가볍고 깊이 없는 책들 위주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진주 위에 자갈을 들이붓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윤동주를 다룬 책들은, 심지어 그의 이름만 달랑 붙어 있는 책일지라도, 아주 쉽게 출간의 대상으로 삼아질 뿐만 아니라 대중의 반응도 열렬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열광적 형태의 호응은 윤동주와 그의 문학을 위해서도 그리 좋은 영향력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윤동주의 시는, 그가 아마추어 시인으로 죽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20세기 전반기의 한국 문학이 낳은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찬사를 넘어 우상화 또는 상품화에 가까울 정도로 내달리고 있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대중과 시장의 반응은, 이것이 정말로 윤동주를 제대로 기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윤동주가 이 정도로 출판계에서 사랑받는 시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윤동주는 돈이 되는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을 쓴다면 불쾌해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윤동주나 서정주 자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대중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고, 그것이 그들의 문학에 대한 수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말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품의 가치를 놓고 본다면 서정주나 윤동주 중에서 어느 한 사람만 읽는다는 건 희한한 일이지요. 두 시인 모두가 읽혀야 맞는 일일 터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문학 시장은, 마치 작가의 삶(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작품의 가치를 짓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점이 상당히 안타깝고도 우려스럽습니다.


어떤 분들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에 불과하다. 윤동주는 올곧게 살았지만 서정주는 친일을 하고 친독재를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단지 보기 싫은 작가의 글을 보지 않을 뿐이며, 서정주가 읽히지 않는 것 역시 그의 자업자득일 뿐이다. 훌륭한 작가는 읽고 훌륭하지 않은 작가는 읽지 않는다는 것, 이 간결하고 정의로운 논리에 따라 시장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이러한 정의의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2.


윤동주만큼이나 출판 시장에서 수요의 대상으로서 사랑받는 시인은 아마 백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백석의 시 또한 이론의 여지 없이 20세기 전반기 한국 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백석이 수용되는 양상 또한 윤동주의 경우와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백석이 1912년생, 서정주가 1915년생, 윤동주가 1917년생이니 세 시인이 나이가 서로 엇비슷하지만,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채로 죽은 윤동주와는 달리 백석과 서정주는 문학생활의 초입에서부터 나름대로 주목을 받아 왔고, 또 그 주목에 값하는 작품을 썼습니다. 서정주가 「자화상」을 쓰기 한 해 앞선 1936년에 백석이 『사슴』을 출간했고, 백석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쓰던 1948년에 서정주가 『귀촉도』를 출간했다고 한다면 대략적인 시점이 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북이 분단되면서 서정주는 남에 머무르고, 백석은 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북에서 살던 백석은 이런 내용의 시를 쓰게 됩니다.


나는 공산주의의 천재 / 이 땅을 경이로 휩싸고 / 이 땅을 희망으로 호뭇케 하고 /

이 땅을 신념으로 가득 채우고 / 이 땅을 영광으로 빛내이며 / 이 땅의 모든 설계를 비약시키는 나 /

나는 공산주의의 자랑이며 시위 (「제3인공위성」 중에서)


제각기 찾아가는 곳 다르고, / 제각기 서두르는 일 다르나 / 그러나 그들이 이 집에 이르는 길, /

이 집에서 떠나가는 길 / 그것은 오직 한 갈래 길 - 사회주의 건설의 길. (「공무여인숙」 중에서)


밭 갈던 아바이, 감자 심던 어버이 / 최뚝에 송아지와 놀던 어린것들, /

그리고 탁아소에서 돌아온 갓난것들도 / 둘레둘레 둘러놓인 공동 식탁 위에, /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노을이 비낀다. (「동식당」 중에서)(주1)


작품이 망가진 건 둘째치더라도, 6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백석의 이러한 체제 찬양 시 발표는 명백한 친독재행위에 해당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을 불러일으킵니다. 같은 친독재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정주는 철저하게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백석은 철저하게 사랑받는 이상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지요. 이 양상은, 작가의 도덕성 여부에 따라 그 작가의 위상을 설정한다는 대중의 논리가 사실은 그렇게 똑바르지도 않은 잣대로 재단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 줍니다.


어떤 분들은 아마 이렇게 반론할 것입니다. '백석의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의 억압적인 북한의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해당 작품들은 사실상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백석에게 이런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면, 서정주의 친일 역시 이러한 용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주의 친독재와 관련된 논란의 경우, 좀 더 복잡한 상황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가 유종호 평론가의 글들이었습니다. 그는 몇 해 전 네이버에서 주관하는 <열린연단>에서 '문학과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강연이 끝난 후의 질의응답 시간에서 한 청중이 '서정주 시인의 친일 행위가 이데올로기로서 평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고 생계의 문제라고 답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할 적에 잘 연구를 해야 돼요. 일제 강점기 때 말하자면 친일 행위 같은 것, 이것은 아주 조심스럽게 공부를 많이 해야 돼요. 그냥 이 사람이 친일적인 시를 몇 편 썼다 해가지고 그 사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 이런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거예요. 왜냐, 저는 해방 전을 경험한 사람이에요. 1935년 을해생 돼지띠예요. 일제 강점기를 10년을 경험했어요. 일제 말기가 어떤 것인가를 잘 압니다. 지금 일제 말기라고 하는 건요,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지금 이북보다 더 무서운 사회예요. 무슨 자유가 없어요, 무슨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 그렇다고 해서 무슨 내가 친일이 좋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말은 바로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가령) 1938년에서부터 1943년까지 6년 동안 일본 사람들이 한국의 청년들을 갖다가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습니다. 6년 동안에 지원병으로 지원한 사람들이 얼마냐, 80만 명이에요. 1년에 10만 명이 넘는 거예요. 그러면 합격한 사람이 얼마냐, 45:1이에요. 45명 가운데 하나가 된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에 지원병으로 간 사람들이 친일 하려고 지원병을 갔습니까. 대개 시골의 농촌 청년들이 취직하러 간 거예요, 먹고 살기 위해서. 암만 식민지 시절이라 하더라도 장가도 들어야 하고 연애도 해야 되고 효도도 해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취직도 안 되고, 소학교만 나와가지고 어디 가서 번듯한 취직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군대 간 거예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울분을 금할 수 없는 건요, 흉년이 든 해는 지원병이 많아져요. 그러니까 정말 먹고살 수가 없으니까 군대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해야 되겠다, 그러면 이게 강제로 간 것도 아니고, 친일 행위입니까. 분명히 친일 행위죠. 그러면 이 사람들 욕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욕을 할 수 있어요. 먹고살아야 될 것 아니에요.


서정주라는 사람도 다른 게 아니고, 중학교 중퇴생 아니에요. 그래도 시를 쓰면 현재는 시인이니까 어디 가서 국어 선생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이럴 적에 이 사람이 잡지사에 있었고 인문평론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결국은 일본말로 잡지를 내면서 시를 쓰라고 그러니까, 그래도 시를 써야지 징용도 안 가고 뭔가 그럴 수 있을 것 아니에요. 한 거예요.


일제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아니지만 저 또한 이러한 시각에 깊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이후 서정주는 자서전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자신이 친일 행위를 한 경위를 밝히고 있지만, 그 이유를 요약한다면 결국 막심한 생계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활고의 문제와 정치적 압력이라는 이중의 압박이 작용했을 것이고, 당시로서는 안 보였을 해방이라는 미래에 대한 체념적 전망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더구나 서정주가 친일 행위를 한 시기는 1942년에서 1944년까지, 바꿔 말하면 첫 시집을 출간한 직후인 1941년까지는 버티고 살았다는 소리입니다. 또 암만 그가 당시 촉망받는 시인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신인급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친일이라고 하면 다 같은 친일인 것처럼 퉁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해당 인물의 생활 상황과 사회적 영향력, 행위를 한 시점 등을 면밀히 살펴보고 경중을 구별해 판단하는 것이 사실에 근접한 일일 것입니다. 서정주의 친일 행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들은 대체로 해당 글의 낯뜨거운 내용만을 까발리면서 당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는데, 일제 말기에 우스꽝스러운 글 몇 편을 썼다고 해서 매국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에 대해 무관심했기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서정주뿐만이 아닌, 소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런 행위를 긍정하려는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잘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다만 일제 말기라는 철저하게 압박해 오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동이 얼마만큼이나 자발성을 가지고 있었겠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고, 그들이 택할 수 있었던 선택의 폭이 얼마나 좁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밝혀두더라도 여전히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설령 그 점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오점이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지 않은가. 세목이 어떻든 간에 인간적 결함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좋아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야 사실 저도 할 말은 없지요. 하지만 작가가 가진 불결함 때문에 작품을 낮춰본다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일까요?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세기 초반에 한 일본 작가가 조선과 만주를 방문하고 적은 여행기 하나를 언급해볼까 합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지난 여행 때 한 가지 느낀 점은, 내가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자각할 수 있었던 점이다. 내지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는 일본인만큼 불쌍한 국민은 세상에 절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종 압박에 시달렸는데, 만주와 조선에 건너온 나의 동포가 문명 사업의 각 방면에서 활약하여 매우 우월한 존재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도 매우 믿음직한 인종이라는 인상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었다. 동시에 나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눈앞에 두고 승자의 패기를 지니고 자신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나의 동포들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의 총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2)


위의 글은 나쓰메 소세키가 쓴 「한만소감(韓滿所感)」의 한 부분입니다. 외국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다 보니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당대의 일본 작가로서는 사상이 온건했고, 또 당시 일본의 급진적인 근대화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글들을 접한다면 당황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령 그의 『마음』이나 『그 후』 같은 작품의 빛이 바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체제를 선전하는 행위를 일삼다가 종전 후 체포되어 감옥까지 갔습니다. 이후 그의 작품은 영문학의 앤솔러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많은 문학인들이 이를 반대하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근래의 사례로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작가 페터 한트케가 몇 해 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일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의 높은 가치 때문에 작가의 과오가 가려지게 되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역으로 작가의 과오 때문에 작품의 가치가 가려지는 것 또한 사실을 왜곡하는 일일 것입니다. 에즈라 파운드나 페터 한트케가 정치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작품을 찾는 안목에 있어서 작가의 과오가 작품의 가치를 매기는 데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서정주의 경우는 별로 그렇지가 못한 것 같습니다. 서정주의 문학에 대한 대중의 외면은, 작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고착되면서 작품의 평가에까지 지나칠 정도로 영향을 미치게 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3.


여러 가지 얘기 끝에 나의 미당 평가에 대해 비판이 많더라며 과대평가가 아니냐고 말하는 학생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웃으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평가받는 쪽은 으레 과대평가받게 마련이고 그렇지 못하면 전혀 묵살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대평가를 받는다는 면에선 김수영이나 신동엽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하였다. (…) 또 부족 방언의 마술사이며 그 증거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말에 대해서도 토를 달기에 미당 시집을 건네주며 아무 데나 열어 보라고 하였다. 그가 되는 대로 펴 보인 것은 시집의 790쪽과 791쪽이었다. 791쪽에 나오는 '어느 해던가, 꼭 송아지 목메이는 눈물만 같은 가을날 황혼'을 가리키며 내 말에 동의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반응은 신통치가 않았다. 나는 책을 덮으며 시를 좋아하지도 않고 말의 매혹에도 무감하다면 시인을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솔잎 험담을 하는 가랑잎이 너무나 많다고 덧붙였다. 최근의 일이다. (주3)


이 일화는 앞에서 언급했던 유종호 평론가의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의 구절과 페이지 수를 헤아려봤을 때 학생에게 건네진 책은 아마 1991년판 『미당 서정주 시전집』인 것으로 보입니다. 학생이 뒷부분을 펴본 것은 아마 노년에 쓴 시들은 별로겠거니 하는 꼼수의 소산이었을 테지만, 천만의 말씀이지요. 교수는 거기서도 번뜩이고 있는 시적 표현을 찾아 집어내지만, 학생은 쉽사리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학생의 모습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작품의 감상에 방해로 작용되고 있는, 대중에게 서정주가 수용되고 있는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서정주에 대한 선입견에서 얼마큼은 벗어난 상태에서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작품을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세간의 입방아와 대중의 입맛에 따른 평가를 통해 각인되어버린 이미지로서의 서정주를 벗어던지고, 우리 스스로 그의 글을 읽어보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감상도 비판도 거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보기 싫은 작가의 작품을 보지 않는다는 논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득인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서정주라는 사람이 싫다고 해서 그가 남긴 예술적 자산을 모른체한다면 그건 누구의 손해도 아니고 한국 독자의 손해요 한국 문학의 손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서정주에 대해 '그렇게 좋은 시를 쓴 사람이 삶에서 그런 오점을 남겼다니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제가 글을 준비하면서 서정주의 글들을 하나씩 읽어 가다 보니,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런 시들을 쓸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정주는 1983년 출간된 자신의 시전집의 서문에서 '숨이 내게서 넘어가는 그때까지 나는 인생의 간절한 것들을 늘 추구하고 또 추구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서정주의 삶의 태도와 문학적 태도 모두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간절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추구한 서정주의 현실 감각은 개인사에 있어서는 여러 잘못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문학으로 가서는 그야말로 주옥 같은 작품들로 피어났습니다. 과오에 대한 보답과도 같이 모국어를 가다듬고 가꾸는 일에 평생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씌어진 시가 구백 편이 넘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볼 차례입니다.





1) 유종호, 『다시 읽는 한국 시인』(문학동네, 2002)에서 재인용.

2) 구로카와 소, 『암살,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사회주의자』(김유영 역, 소명출판, 2018)의 '후주' 참조.

3) 유종호, 「두루미가 된 분노와 설움」,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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