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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14. 2021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미당 시전집 강독 3: 『귀촉도』에서 세 편

                    1.


권영민 평론가는 『한국현대문학사』에서 해방 직후의 시단의 양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방 시단을 보다 면밀하게 주시해 보면, 시적 경향의 전반적인 특징이 좌우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던 분단의 분열 과정으로부터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들은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개방적이긴 하였으나,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방법을 정치적인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 해방 직후의 시단에서 좌익 진영에 가담하여 가장 활발한 창작 활동을 전개한 시인은 오장환, 이용악, 설정식, 김기림, 임화 등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이념을 주장하기 위한 이른바 정치시가 서정 양식으로서의 시 형태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논리를 자신의 시적 이념으로 끌어들이면서 자기 변신을 시도한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 반대편 진영의 시인으로 서정주, 유치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을 꼽을 수 있지만 수적인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해방 직후의 정치시의 열기를 비판함으로써 유형화된 시의 범람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해방 이후 시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예컨대 『청록집』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청록파의 시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순수시의 전형으로 손꼽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에서 내면의 역동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적인 정서가 삶의 현실의 여러 문제를 폭넓게 수용하게 되는 과정은 이후 이들의 시 세계의 확대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방 직후의 문학인들은 대체로 두 개의 진영으로 크게 갈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좌익 계열을 중심으로 전개된 현실 참여 지향의 이념성을 띠는 문학과 우익 계열을 중심으로 전개된 작품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문학이 그것입니다. 이 두 진영에서 추구하는 문학의 성격은 자연히 장단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현실을 깊이 파고드는 데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그 지나친 지향성 때문에 작품이 이념에 의해 함몰되기가 쉽고, 후자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본질적 성격을 갖추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자칫하면 현실에 대한 구체성의 약화로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타난 이러한 지향의 두 갈래 길 앞에서 시인들은 저마다의 진로를 택하면서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갈등의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자의 길을 택한 서정주는 1948년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출간합니다. 이 시집은 전작인 『화사집』과는 거의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됩니다. 관능과 욕망을 주로 노래하던 시인은 이제 이별의 정한과 같은 소재를 노래하고 있고, 가쁜 숨결이던 어조는 한결 차분해졌으며, 폭발할 듯하던 세상에 대한 부정과 분노의 태도는 점차 긍정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굳이 체념과 도피의 성격에 결부시켜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인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화사집』에서 시인이 욕망의 추구와 부정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씌어진 시기가 시인의 치기가 없지 않은 청년 시절이었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는 면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것들을 언제까지나 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귀촉도』의 시편들이 씌어진 시기는 시인의 나이 삼십 세 전후입니다. 욕망의 추구가 절제와 순수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고, 또 어두운 분노가 사회에 대한 공존과 적응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나이 들어 가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인정하고 감정을 순화시키는 것은 정신적 성숙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화사집』에 수록된 「수대동시」나 「엽서」 등에서 이미 그러한 정갈한 삶에 대한 추구가 엿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귀촉도』에서도 「밤이 깊으면」이나 「역려」처럼 『화사집』 시절의 시들이 가진 성격의 여운을 담은 작품이 일부 있다는 점 또한 이것이 시인의 자연스러운 변화의 궤적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화사집』에서 『귀촉도』로의 변모 양상은, 최초의 본격적인 서정주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연현 평론가의 「원죄의 형벌」을 시작으로, 많은 평자들에게서 관심의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서정주 시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으로서 정평이 나 있는 천이두 평론가와 김화영 평론가의 글에서 한 대목씩을 인용해 봅니다.


애비와 에미와 형제와 친척과 계집까지를 잊어버리고(「바다」) 벌거숭이의 자기로 돌아왔을 때 서정주에게 새삼스러운 소중함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스럼 눈감었던 내넋의 시골'이요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였던 것이다(「수대동시」). 이제 서정주의 벌거숭이 마음에 부딪쳐 오는 것은 자기 숙명이요 피의 근원인 고향이다. 잊어버려야 할 모든 비본질적인 것, 외래적인 것들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넋의 시골'로 돌아가는 길이요, 거기 아직도 살고 있을 '눈섭이 검은 금녀 동생'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다. (…) 이제 서정주의 내면에 소용돌이쳐 마지않던 '바람'은 일정한 방향을 찾게 된 것이다. 30대로 들어선 시인 서정주의 바람이 시집 『귀촉도』에서 축적한 한결같은 표적이 바로 그의 '넋의 시골'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한국의 여인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 아련한 이미지의 여인상이다. 따라서 이런 여인상에서는 이미 현세적, 육체적 속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화사집』 무렵의 그 짙은 피와 살의 냄새는 이제 말끔히 가셨다. 『귀촉도』의 모든 여인상이 풍기는 것은 아련한 추억과 애절한 설움이 서린 긴 오열의 여운이다. (…) 그런데 고향으로 가는 길이란 본질적으로는 설움의 강물이 열리는 길이다. 왜냐하면 현실 부재인 '금녀 동생'을 찾아가는 일은 뼈저린 상실을 엄숙하게 확인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실의 비애를 확인하는 것, 그것은 분명 가혹한 고역이다. 그러나 상실의 비애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뼈저리게 확인하는 고역을 통해서만 극복된다. 비애를 비애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는 것, 거기에 한의 미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주1)


『화사집』은 하늘의 시가 아니라 철저한 땅의 시였다. '푸른' 색채와 동반하여 등장하는 단 하나의 하늘은 저 드높은 정신의 세계라기보다는 '물어뜯어'야 할 지극히 지상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 이와는 전혀 반대되는 시선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귀촉도』의 세계다. 이 시집의 초입에 있는 「밀어」는 첫 시집과 비교해볼 때 확연한 변화를 나타내는 동시에 전 시집이 그 싹을 담고 있던 문의 테마를 표면화한다. 그 다음 순서인 「거북이에게」 역시 소극적이나마 하늘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완연하다. (…) 이제부터 붉은빛은 점차로 퇴색하고 푸른빛이 지배적이 되어 간다. 『화사집』에서 붉은색들이 시집 전반에 전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화사」), '꽃처럼 붉은 우름'(「문둥이」), '붉고 붉은 눈물'(「서름의 강물」 등), 푸르른 빛은 『귀촉도』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간혹 붉은색이 섞이기도 하지만 그 붉은색은 곧 푸른빛에 압도되고 만다. '서럽지도 아니한 푸르름'(「골목」),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목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푸르른 날」), '아- 미치게/ 짓푸른 하늘'(「소곡」) 등에 이르기까지 푸른빛은 고조의 음계를 밟고 상승한다. 이 푸르름의 의미장(意味場) 속에는 모든 것이 가벼움과 상승, 개방의 화살표를 따라가고 있다. 여러 번 반복되는 '푸른 숨결'(「석굴암관세음의 노래」)을 비롯해 '인제 새로 숨쉬는 꽃'(「밀어」), '돋아나는 풀싹'(「견우의 노래」), '곱게 곱게 씻기운 꽃'(「꽃」) 등은 모두가 가벼움과 상승의 역동성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주2)


『귀촉도』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에 대해 천이두 평론가는 시인이 '한의 강물'에 가 닿고 있다는 점을, 김화영 평론가는 시인이 '하늘을 향한 푸른 시선'을 내보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각각 친숙한 소재에 대한 집중과 비애의 표현으로, 또 세상과 삶에 대한 부정에서 긍정에로의 태도 변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을 추구하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보려던 『화사집』의 시들과 비교했을 때 『귀촉도』에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귀촉도』는 '밀어', '귀촉도', '멈둘레꽃',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싶은가'의 네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시집입니다. 첫 번째 단락인 '밀어' 편에는 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이 중 첫 번째 순서로 수록된 작품이 「밀어」입니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도라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눌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예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

  채일을물은듯, 아늑한 하눌가에

  뺨 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도라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눌가에

  인제 새로 숨 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화자는 '순이'와 '영이' 그리고 '도라간', 즉 세상을 떠난 '남이'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서정주의 언어 감각을 이야기할 때 종종 이야기되는 것 중의 하나로 등장인물에 대한 작명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그만큼 세심한 부분의 운율감에 신경을 쓰는 시인이라는 점을 말해줍니다.(주3) 화자는 그들에게 굳게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 '하눌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라고 말합니다. 잿빛의 문은 『화사집』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던 벽의 테마를 연상케 하지만, 화자가 문 너머로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 '형극'이나 '침몰'의 고통이 아니라 '꽃봉오리'라는 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하늘은 이제 '물어뜯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누예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 아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보이는 것이라기보다도 봐야 할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귀촉도』가 분명 하늘과 푸르름의 시편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하늘과의 만남이 실현된 관계는 아니다. 이것은 아직 하늘에 대한 '그리움' 혹은 지향성의 시집이다. '하눌을 보자'(「꽃」), '소망이리라'(「혁명」), '문 열어라'(「문열어라 정도령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 등 이 시집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시들에서 활용되고 있는 동사의 명령법과 미래형은 그것을 말해 준다. (주4)


시 속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는 '삼월'이며 하늘에 핀 꽃봉오리는 '인제 새로 숨 쉬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을 반드시 정치적 상황과 결부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밀어」는 시집의 첫머리에서 시집의 방향성을 알려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다지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기는 어렵고 시집 속에서 새롭게 마련된 자신의 시적 강령을 천명하는 역할 정도만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이 하늘을 바라보게 되기까지의 보다 구체적인 면모는 그 뒤에 수록된 시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시 「거북이에게」에서부터 그것은 잘 나타납니다. 화자는 자신의 심정이 투영된 존재인 거북이에게 '느릿 느릿 물살을 저어/ 숨 고르게 조용히 갈고 가거라'라고 말합니다. 거북이의 유장한 움직임 또한 시인의 어조가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내지르던 육성의 가락이 아니라, 이제 '숨 고르게 조용히' 안으로 다져진 가락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주5) 하지만 이 변화는 단순한 음풍농월의 어조가 아님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것임을 시의 다음 구절들은 보여줍니다. 2연에서의 '오늘도 가슴속엔 불이 일어서/ 내사 얼굴이 모두 타노라'와 같은 표현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거북이에게 '장고를 쳐줄' 테니, '그대 쇠먹은 목청이라도/ 두터운 갑옷 아래 흐르는 피의/ 오래인 오래인 소리 한마디만 외여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푸른 하늘을 노래하던 시인의 소리가 사실은 가슴속의 불과 갑옷 아래 흐르는 피를 콱 묵혀 놓은 끝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수록된 「무제」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작품입니다. 시에서의 화자는 현실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는 마음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 사이에서 갈등하고, 현실을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는 어쩌면 지극히 꽝꽝하고 못견디게 새파란 바윗속일것이다. 날센 쟁깃날로도 갈고 갈수없는 새파란 새파란 바윗속일것이다.


  여기는 어쩌면 하눌나라일것이다. 연한 풀밭에 벳쟁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시굴일것이다.


  아 여기는 대체 멫만리이냐. 산과 바다의 멫만리이냐. 팍팍해서 못가겠는 멫만리이냐.


  여기는 어찌면 꿈이다. 귀비의묫등앞에 막걸릿집도 있는 어여뿌디어여뿐 꿈이다.


1연에서 화자는 현실을 답답한 바위 속에 비유합니다. 이는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음 2연에서 현실은 '하늘나라'에 비유되는데, 그것이 '서러운시굴'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게 여겨집니다. '연한 풀밭에 벳쟁이도 우는' 광경은 시골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왜 서럽게 느껴지고, 또 하늘나라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곳이 「부활」의 '순이'와 「밀어」의 '남이'를 떠나보낸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곳은 서럽고, 그 서러운 마음이 나중에는 잃어버린 이의 모습을 불러오게도 만들고(「부활」) 말을 걸어 볼 수도 있게 만들었으니(「밀어」) 이곳이 하늘나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3연에서는 세상의 넓이에 지친 화자의 토로가 나타납니다. 앞서 「바다」에서 아라스카로 아라비아로 가라고 외치던 시인의 마음가짐은 여기 와서는 '팍팍해서 못가겠는' 심정이 되는데, 이것 역시 가다가 지치는 현실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 격인 4연에 가서 화자는 현실을 '꿈'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꿈의 묘사가 아주 특이합니다. 이 꿈속에 있는 '귀비의묫등'은 순이와 남이처럼 귀중하게 여겨지던 사람이 죽어 자리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앞에는 '막걸릿집'이 있습니다. 귀비의 묫등 앞에 있는 막걸릿집의 풍경은 일견 해학적으로 느껴지지만, 하여간 그곳은 화자가 떠나간 그를 추억하고, 회포를 풀고, 웃기도 울기도 할 수 있는 장소일 것입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곳이긴 하지만, 적어도 부정적이기만 한 곳은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한 화자는 이제 한량 없는 답답함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고, 떠나간 사람에 대한 서러움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답답하고 서럽고 지치게 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현실일지라도 그것을 차라리 악몽은 아닌 꿈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아니 그것보다도 좀 긍정적으로, '어여뿌디어여뿐' 것으로 받아들여보려고 애쓰는 것, 현실을 그래도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담겨 있습니다.


네 번째로 수록된 「꽃」은,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1943년 가을에 씌어진 시이며, '내 시작 생활에 한 전기를 가져온 작품'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시집 『화사집』 속의 백열한 그리스신화적 육체나 부엉이 같은 암흑이나 절망이나 그런 것들에서도 인젠 떠나서 죽음 저 너머 선인들의 무형화된 넋의 세계에 접촉하는 한 문을 이 작품의 원상(原想)은 잡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렇게 우거지로 살다가 죽어도 된다는 체념을 마련했고, 이 너무 혹독하던 환경 속에서는 그게 그대로 한 삶의 의지가 되었다.'(주6) 이에 의거한다면 「꽃」은, 『화사집』에서 『귀촉도』 이후로의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에 씌어진 작품인 셈입니다.


이 시의 1연에서 화자는 '가신이들의 헐덕이든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였다'고 말합니다. 시인 자신이 헐덕거리며 시를 쓴 것과 같이 '가신이들' 역시 헐덕이던 숨결로 '꽃'을 피워냈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는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땀 흘리고 간 옛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우에 있어라'라고 말합니다. 화자는 꽃으로부터 옛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이 노랫소리는 '여기'에도 있고 '하늘우에'도 있습니다. 옛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꽃'을 통해 화자는 '여기'와 '하늘'의 소중함을 동시에 인식하게 됩니다.


꽃으로부터 화자가 터득하게 되는 것은, 시인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체념의 의지'입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 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여서 가자', '맞나는 샘물마닥 목을추기며' '자칫하면 다시못볼 하눌을 보자'고 말합니다. 절망의 극한 상황에 선 사람은 때로 '하늘'을 등질 각오를 품기도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 밉기만 하던 하늘이 사실은 '자칫하면 다시못볼' 수도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된 셈입니다. 이것은 일제 말기의 상황과 연결되는 활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에 있어서 체념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힘을 인식한 서정주의 전환은 이후의 그의 시를 한결 현실적이게 만들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시에서 도덕주의에 관한 비판적 여지를 만들기도 한 바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그의 문학에서 중요한 해결 과제로 부상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로 수록된 「견우의 노래」는 견우직녀설화의 내용을 빌어 와 그리움의 필요성을 중시하는 사랑의 자세를 노래한 시입니다. 이 작품의 1연,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라는 구절은 사랑에 대한 역설적이고도 절묘한 포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함께 있으면서도 동시에 개인의 공간을 마련하고, 떨어져 있으면서 그리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사랑을 더욱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의 주인공인 견우는, 연인과의 공간을 유동적으로 마련할 상황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기러기로 떨어져버린 신세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칠월 칠석이 오기까지는 연인을 만날 수 없는 비극적 현실에 놓여 있지만, 앞서 「꽃」의 화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 현실을 수락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움 속에서 사랑의 재확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시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 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이것은 다소 싱거운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견우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제한된 틀 속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이고도 바람직한 일로서 그는 목동이라는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결심하며, 연인인 직녀에게도 그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견우에게서 나타났던 문제는 또 다른 작품인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에서도 등장합니다. 시에서의 화자인 석굴암에 새겨진 불상은 '싸늘한 바윗속'에 머무른 채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살아가면서 바다로 돌아가는 소망을 품고 있지만, 결국 '세월이 아조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그렇게 돌아갈 수 없음을 재확인하면서 시는 끝나고 있습니다.


'밀어' 편의 나머지 작품인 「혁명」과 「골목」은 해방 직후의 사회상 속에서 씌어진 작품들입니다. 「혁명」에서는 조개껍질의 무늬가 바다의 소망이고 가지에 열리는 꽃이 바람의 소망인 것처럼 '홍수와 같이 몰려 오는 혁명은/ 오랜 하눌의 소망이리라'라고 노래함으로써 해방 이후 변혁을 겪는 사회의 모습에 대한 감격과 그 당연함을 예찬하고 있고, 「골목」에서는 화자가 매일같이 드나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골목을 바라보며 '내, 늙도록 이골목을 사랑하고/ 이골목에서 살다 가리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두 편 모두 건전한 주제가 나름대로 정갈한 표현을 통해 전달되고 있어 그에 맞는 적절한 감흥을 주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작품에 비하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3.


시집의 두 번째 단락인 '귀촉도' 편에는 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로 수록된 「귀촉도」는 이 시집에서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에 해당합니다.(주7)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어줄걸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귀촉도」는 저승으로 떠나간 님에 대한 화자의 애달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서, 읽다 보면 의외로 심심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시는 서정주의 시로서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묘사가 전형적이라고 생각되는데 해방 이전에 시나리오에 삽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졌다고 밝힌 시인의 제작 계기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전형적인 주제를 극히 자연스러운 하나의 매력적인 가락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데에 이 작품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읍사」에서부터 「진달래꽃」에 이르는, 비애의 주제를 리듬화한 서정시의 또 다른 전형을 이 시는 이룩하고 있습니다. 시에서의 주조가 되고 있는 7-5조의 율조와 장면의 차분한 묘사는 읽는 맛을 살려준다는 면에서도 크게 기여하지만, 슬픔을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도록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가령 시의 초반부에서 '눈물 아롱 아롱'과 같은 표현은 슬픔에 눈물 짓는 모습을 그린 것이면서도 서럽기보다도 오히려 순수하고 맑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피리 불고' '흰 옷깃 염여' 가며 '진달래 꽃비 오는' 곳으로 갔다고 하는 님에 대한 설명 또한 그 모습이 비참하기는커녕 정갈하고 고고한 것처럼 다가옵니다.


이어 2연에서 화자는 님에게 머리털을 엮어서라도 신고 갈 미투리 하나 못 해준 것을 안타까워하고, 3연에서는 촉나라 충신의 넋이 두견새로 화하여 울면서 날아갔다는 귀촉도의 설화를 빌어 와, '초롱에 불빛' 비춘 밤하늘 아래서 '목이 젖은' 채로 우는 새와 같은 심정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귀촉도」가 이별의 슬픔을 전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그 뒤의 시들은 이별 이후에 나타나는 재회의 소망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시인 「문열어라 정도령아」에서 화자는 '눈물로 적시고 또 적시여도/ 속절없이 식어가는 네 흰 가슴이/ 저 꽃으로 문지르면 더워 오리야'라고 노래합니다. 「귀촉도」와 같은 율조를 갖고 있지만 화자의 태도는 전혀 달라져서, 떠난 사람의 가슴에 꽃을 문지르는 것과 같은 재회를 비는 행위가 등장합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님이 떠나간 '은하수 우에' 있는 '소슬한 청홍의 꽃밭'을 향해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정도령님아'라고 불러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실려 있는 「목화」와 「누님의 집」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이 연인이 아닌 '누님'으로 등장합니다.(주8) 「목화」에서 화자는 푸른 들판에 핀 목화꽃을 보며 '누님'을 생각하면서, 이 꽃들을 그가 피워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라저 네리는데……// 저, 마약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무지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 풀 지슴길을 오르네리며/ 허리 굽흐리고 피우섰지요?' 떠나간 누님의 모습을 꽃을 통해 다시 발견하는 연상 작용을 비롯해 푸른 하늘이 주는 감동에 대한 언급, 유혹과 반항의 시간을 극복하고 자연을 다시 바라보는 삶의 태도의 강조 등은 앞서 언급된 시와 같은 심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누님의 집」은 특이하게도 누님이 떠나간 곳이 어떤 곳인지를 그리고 있는 시입니다. '바다 넘어 구만리/ 산 넘어서 구만리'를 가면 우물이 있고, 우물을 타고 천 길을 내려 가면 '도적놈의 게와집'이 있고, '대문열고 중문열고/ 돌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 '그리운 우리누님'이 있는데, 정작 '도적놈은 어디 가고' 누님 혼자 흰옷을 입고 앉아 있다는 말로 시는 끝납니다. 전래동화의 내용을 차용한 듯한 이 시는 아주 쉬운 구성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알쏭달쏭한데, 아무래도 누님이 머무르는 '게와집'은 저승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고 '도적놈'은 이별하고 싶지 않아도 데리고 가서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세상사의 얄궂은 운명을 비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 천이두, 「지옥과 열반」, 『종합에의 의지』(일지사, 1974).

2) 김화영,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

3) '가령 「밀어」의 첫 구절 같은 것은 참으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단순히 평범한 아이 이름 셋을 불러본 구절에 불과한데도 그것이 절묘한 감정의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순이, 영이, 남이 등의 이름은 마치 아득한 기억 속에서 나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이름들처럼 되살아온다. 그래서 나는 '순이야. 진이야. 또 돌아간 희야', 또는 순서를 바꾸어서 '영이야. 남이야. 또 돌아간 순아'라고 읊조려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원래 구절과 같은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남호, 「겨레의 말, 겨레의 마음」, 『녹색을 위한 문학』(민음사, 1998).

4) 김화영, 위의 책.

5) 천이두, 위의 글.

6) 서정주, 『천지유정』(전집 7권, 은행나무, 2016). 앞으로 서정주의 산문을 인용할 때는 전집 기준으로 출처를 적도록 하겠습니다.

7) 「귀촉도」에 대해서는 오세영 시인이 구체적인 분석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오세영, 「설화의 시적 변용」, 『한국 현대시 분석적 읽기』(고려대학교출판부, 1998) 참조.

8) 「목화」와 같은 작품에 대해, 김인환 평론가는 첫 시집인 『화사집』의 시들이 여인과 꽃을 다룬 표현에서 욕망에 관한 충동을 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 시에서는 시적 대상을 '누님'으로 지칭함으로써 '한 여자에게서 암시될 수 있는 모든 성적인 상상의 범위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점', 또 그가 피워낸 꽃인 '목화' 역시 '요염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인간에게 실용적이고, 늘 인간의 가까이에 있는 식물'이라는 점을 지적해 그 변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김인환, 「서정주의 시적 여정」, 『미당 연구』(공저,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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