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시전집 강독 5: 『서정주시선』에서 세 편
유종호 평론가는 서정주의 시집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미당의 최선의 시편을 낳은 시기가 『귀촉도』 『서정주시선』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더 기탄 없이 말한다면 이 시집 속에 있는 시편들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그리하여 『질마재 신화』와 더불어 이 세 권의 시집이 미당의 최고 경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화사집』의 시편들은 충격적이기는 하나 너무 무잡하고 단편적이다. 시집 속에서 희귀한 긍정 시편인 「부활」도 맥빠져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자화상」이 걸작이고 「문둥이」 「봄」을 위시한 소품이 좋다고 생각한다. 『신라초』 『동천』의 세계는 재미있기는 하나 공감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또 슬며시 반감이 생기는 구석도 있다. 억지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은 '전통' 창제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 간수되어 있는 미당 시집의 이미지이다. 너무 단정적이지만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이미지란 대개 이렇게 단편적이고 단정적인 것이다. (주1)
두 번째 시집 『귀촉도』와 세 번째 시집 『서정주시선』 그리고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를 그는 가장 애착이 가고, 뛰어난 작품이 많은 시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다른 글에서도 어조가 다른 대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애착의 구체적인 이유로서 그는 '높이와 깊이와 노래가 조화를 이룬'(주2) 명편들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의 어떤 시기, 어떤 작품에 더 호감이 가는가는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지만, 특히 『서정주시선』의 경우 개성이 강한 서정주의 다른 시집들과 비교해봤을 때 보다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령 천이두 평론가는 '서정주의 시 생애 가운데서 모든 계층을 초월한, 광범한 독자의 애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아마도 『서정주시선』 무렵이 아닐까?'(주3)라고 말하고 있으며, 황동규 시인 또한 '이 시집에는 서정주의 가장 '서정주'다운 시들이 실려 있다'(주4)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56년에 출간된 세 번째 시집 『서정주시선』은 시인의 서문에서 잘 말해지고 있듯이, '『화사집』 『귀촉도』에서 선(選)한 것 26편과 『귀촉도』 이후의 작품 20편을 합해서' 묶은 책입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시집의 범위로 두고 있는 것은 후자입니다. 여기에서 새롭게 실린 20편의 시는 시집의 첫 순서로 '해방후 시편 기이(其貳): 시집 『귀촉도』 이후'라는 소제목 아래 실려 있고, 나머지 시들은 각각 해방 후에 씌어져 『귀촉도』에 실렸던 7편, 해방 전에 씌어져 각각 『화사집』(12편)과 『귀촉도』(7편)에 실린 19편의 순서로 묶여 있습니다.
20편이라는 수를 보고, 그 정도 수량으로 독립된 시집으로까지 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스무 편은 그야말로 명편의 연속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고, 또 그 내용도 깊이가 있습니다. 여기의 시편들에서 시인은 앞서 『귀촉도』에서 나타났었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 또 자연에 대한 애착적 관심을 주로 심화시켜 그리고 있습니다.
『서정주시선』의 첫 순서로 수록되어 있는 시는 「무등을 보며」입니다. 이 작품은 1952년 시인이 조선대학교 교수로 일하던 시절에 씌어졌는데, '앞에 있는 것은 엣비슥히 누워 있는 것 같고, 뒤에 있는 산은 뭔지 안심찮아 일어나 앉아 있는 것 같'은 두 겹으로 된 무등산의 형태를 보면서 그것을 의인화시켜 '아내는 너무 피곤하여 엣비슥히 누워 있는 오후, 옆에 앉은 남편이 바야흐로 그 누운 아내의 고단한 이마를 짚을 자세로 있는 것' 같이 생겼다는 연상을 하고는 그것을 시로 옮겼다고 합니다.(주5)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내지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 산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오후의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어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일인 것이다
1연은 화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내줍니다. 비록 비루한 생활이 있다 할지라도 저 '여름 산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마음씨'에 비한다면 그것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화자는 말합니다. 가난한데 어떻게 그렇게 고상하게 생각할 수만 있겠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활이 고단하다고 해서 고운 마음까지 놔버려도 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러한 생각은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시의 중반부의 내용에는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따뜻한 마음씨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담고 있는데, 가령 '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 자식들을 보듬어 길러야 한다는 표현은 양육에 대한 화자의 건강한 가치관을 잘 보여줍니다. 화자는 이어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차라리 주저앉아 쉬어 갈지언정 삶에 대한 애착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지어미'와 '지애비'를 두고 말해지는 구절의 경우 내용 자체는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면 다소 가부장적인 것으로 비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도 서로 돕고 감싸주는 삶의 자세를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놓일지라도 차라리 그 상황을 '옥돌'처럼 묻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그곳에서 '청태'라도 끼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귀촉도』에서도 나타났던 바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견실한 삶을 모색하려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됩니다.
「무등을 보며」는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내비친 작품입니다. 이 시가 전란의 직후에 씌어졌다는 사실은 얼마간 시사적으로 느껴지는 데가 있습니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품은 맑고 건강한 마음을 믿어 보는, 어느덧 사십대 중반에 다다른 시인의 태도는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의젓한 자세'(주6)와 맞물려 충분히 들어볼 만한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가 품고 있는 메시지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어떤 부담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에 대해 '거역하기 어려운 위엄이요 높은 뜻이지만 추종하기 어려운 초속과 초월의 전언이기도 하다'(주7)는 지적 또한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학」은 이러한 삶의 자세가 보다 관념적인 측면과 연결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의 초반부에서 화자는 학을 가리켜 보이면서,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은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나른다', '산덩어리 같어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시 속에서 학은 이미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천년을 살았고, 천년을 날개를 파닥거렸고, 천년을 시름 맺힌 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름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산덩어리 같은 분노'를 품기만 한 채로 유현히 날아갑니다. 화자는 그러한 학의 삶의 방식을 배우려는 것 같습니다.
다음 대목에서 화자는,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넘어/ 누이의 수틀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라고 말합니다. 앞의 구절의 반복과 뒤의 구절에서의 비유가 모두 흥미로운데 전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꼭두서니는 풀이름인데 그 뿌리에서 붉은 물감을 만든다. 그러니까 '보라색, 옥색, 붉은색'이 되고 그것은 누이 수틀에 수놓인 색실의 색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라'를 제일 앞에 배치함으로써 마치 명령문 같은 착각을 일으킴으로써 독특한 묘미를 발휘한다.'(주8)
여러 가지 색의 실들이 수놓인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는 것은 세상이 설령 아름답지 않더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지자는 뜻이라 할 수 있고, 세상을 보자고 하지 않고 '세상은 보자'라고 말하는 것은 강요 덜한 권유의 은근함을 드러내기 위한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수틀이 바로가 아니라 '누이의 어깨 넘어' 보인다는 표현 역시 이러한 직접성을 덜어내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후반부에 오면서 화자의 시선은 서서히 학에게로 돌아옵니다. 학에게도 울음이나 춤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화자는 그가 '일렁이는 구름속을' '우름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못한' 채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곁'을 날아간다고 말하며 시를 끝맺습니다. 이 대목을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모두 삶의 시름을 완결짓지 못한 채로 저승 곁으로 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는 동안이라도 그 생활을 '어루만지듯'이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이 시의 주된 메시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시집의 세 번째 순서로 수록된 시는 「국화 옆에서」입니다. 이 작품은 서정주의 시 가운데서도 최고의 애송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알려진 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서정주는 몰라도 이 시의 첫 구절쯤은 누구든지 들어보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유명합니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네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었나보다
화자는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울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서로 상관없이 있을 것 같은 자연물들이 사실은 서로 이어져 있고, 또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한편으로 소쩍새 우는 봄이 오고 천둥이 치는 여름이 와야 비로소 국화꽃 피는 가을이 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국화꽃이 피려면 정말로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쳐야 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꽃을 피우기 위해 그들이 '울었다'고 표현한 데서 오는 중의적 어감 역시 그들이 사람과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시에서 쓰이고 있는 '-보다'라는 어투는 앞서 「학」에서의 '세상은 보자'에서와 같은 직접성을 더는 역할을 합니다.
3연에서 화자는 이 소쩍새와 천둥의 울음 끝에 핀 국화꽃이 풍상을 겪은 '내 누님같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님이 겪어야 했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세월은 소쩍새와 천둥의 울음의 시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로 가고, 이제는 거울 앞에 와서 자신을 바라보는 나이 든 누님의 모습만이 남아 있습니다. 풍상을 이겨내고 단정하게 자신을 가다듬는 누님의 모습은 꽃처럼 아름다우며, 반대로 봄 여름을 소쩍새와 천둥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마침내 가을에 피어난 꽃 또한 누님의 그런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다시,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 간밤에는 무서리가 내리고 자신은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리라고 말합니다. 봄부터 우는 소쩍새와 여름에 주로 치는 천둥, 가을에 내린 무서리로 이어지는 전개는 꽃의 개화하는 과정과 맞물리면서 전체적으로 시에서 점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주9) 한편 마지막 구절에서 당시에는 꽃이 있는지도 몰랐을 화자의 전날 밤 오지 않았던 잠 또한 국화를 꽃피는 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꽃을 보면서 자신도 이렇게 고초 끝에 꽃을 피워내는 자연의 조화 속의 일부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국화는 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 있다고 해서 사군자의 하나로 여겨져 온 바 있습니다. 「국화 옆에서」는 국화의 이런 군자로서의 성격을 자연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누님의 이미지와 결부시켜 극히 독창적으로 표현해 낸 명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순서로 실려 있는 「아지랑이」와 「신록」은 사랑하는 마음을 자연 현상과 연결시키고 있는 시들입니다. 「아지랑이」는 사람 사는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그곳에 사는 이의 사랑의 모습이 화한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시입니다. 「신록」은 꽃이 진 뒤 새로 피는 잎사귀들 사이에서 연정을 품게 된 숨 가쁜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 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라는 시의 구절은 화자의 순박한 감정을 실감 나게 들려줍니다.
여섯 번째에서 여덟 번째로 수록된 작품들은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 편의 시, 「추천사」와 「다시 밝은 날에」, 「춘향 유문」입니다. 시인은 1948년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자리에 발탁돼 일하던 당시에 이 작품들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올려다오!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추천사」는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을 모티프로 하여 씌어진 시입니다.(주10) 춘향은 향단에게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그넷줄을 밀어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현재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곧이어 2연에서 나오는 지상에 대한 서정적인 묘사들을 통해 볼 때, 화자가 이곳의 현실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그의 탈출 욕망이 반드시 절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또 그가 가고 싶은 대상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기보다는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가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네를 타는 행위를 통해 춘향이 가 닿고자 하는 곳으로 말해지는 곳은 '하눌'입니다. 하늘은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벗어나 있고 '산호도 섬도 없는' 곳으로 말해지고 있어 티 없이 깨끗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고, 한편으로 초월적인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늘에서 '채색한 구름같이' 있고 싶어하고, '울렁이는 가슴'을 지닌 채 있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춘향의 소망이 얼마간 낭만에 싸여 있고, 아마도 사랑의 감정에 의한 것일 활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낸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4연에서 그는 자신의 소망이 소망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낭만에서 현실로 돌아옵니다. 춘향 자신도 그가 그네를 타고서는 하늘로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춘향은 그걸 알면서도 다시, 마지막 5연에서 자신을 밀어올려달라고 말합니다. 이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현실을 인식하더라도 소망을 아주 버리지는 않는 삶의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달처럼 하늘에서 유유히 움직일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네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는 춘향의 마음은, 당장은 안 이뤄질 꿈을 하나씩 꾸면서도 안 될 거라는 걸 안다고 해서 그 꿈을 꾸지 않을 필요까지는 없지, 하고 생각하곤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늘로 가고 싶으나, 하늘에 잠시 가까이 다가갔다가 결국은 돌아오고 마는 지상에서의 행위,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 속에서 사람의 소망에 관한 보편적 진실을 포착해내는 서정주의 시적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를 탁월한 시인이라 평가하는 것은 이렇듯 상당한 성찰과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내용을 감쪽같이 친근한 우리말로 풀어내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 바가 큽니다. (한편으로, 시 속에서 춘향의 그네를 밀어주는 '향단'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시에서 누군가의 낭만적 소망은 또 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의해 동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점은 생각해보면 조금 섬뜩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춘향 시인 「다시 밝은 날에」에서 화자인 춘향은,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라고 여겨지는 '신령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이 도령과의 사랑에 관련된 것이지만, 자연 현상의 모습에 비유되어 말해집니다. 그는 처음 '수천만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와 같았던 자신의 마음이 이 도령을 만났을 때 '미친 회오리 바람'이 되고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신령님'은 다시 그를 멀어지게 만들고는, 텅 비어버린 춘향의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과 '기인 밤'을 두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춘향 이야기의 전형적인 흐름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채로운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기인 밤'에 머물러 있던 춘향의 마음은 이제 다시 날이 밝고 난 뒤의 햇빛 아래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 꽃같은' 빛깔이 되었으며, 그것이 '신령님', '당신의 사랑'과도 같은 것이리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이별한 날의 어둠 끝에 다시 비친 햇빛은 이별의 상황과는 관계 없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사랑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느껴지게 된 셈입니다. 그는 단지 헤어지는 운명만이 하늘의 뜻인 것이 아니라, 이별하고 나서도 사랑의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춘향의 사유를 자연의 흐름과 절묘하게 결부시킨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 춘향 시편인 「춘향 유문」은 마음과 자연을 연결시킨다는 생각이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에의 확신과 의지로 이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것'이라고 말하면서,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래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일 것이고,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되야 퍼부을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서 '멀리 있어도 곁에 있다는 것은 사랑이 거리와 시간에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말이고, 소나기와 더불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 자연 속에 스며서 존재한다는 것'(주11)을 뜻합니다. 흔히 이 시가 '유문'이기 때문에 작품 속 춘향의 목소리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노래된 것으로만 인식하기 쉽지만, 결국 거기에는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연인에게 남기고 갔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가치 있었던 것이었노라는 긍정적인 관점이 들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그의 어조에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 유종호, 「두루미가 된 분노와 설움」,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 2009).
2) 유종호, 「소리 지향과 산문 지향」, 『문학의 즐거움』(민음사, 1995).
3) 천이두, 「지옥과 열반」, 『종합에의 의지』(일지사, 1974).
4) 황동규, 「탈의 완성과 해체」, 『풍장』(나남출판사, 1984).
5) 서정주, 『천지유정』(전집 7권, 은행나무, 2016).
6) 천이두, 위의 글.
7) 유종호, 「서라벌과 질마재 사이」,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
8) 유종호, 주1)의 글.
9) 한편, 김열규 평론가는 소쩍새-천둥-무서리로 이어지는 진통의 이미지와 봄-여름-가을로 이어지면서 촉진되는 국화의 꽃핌이 시 속에서 이원론적 대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대립이 혼돈이 정제를 낳고 아픔이 아름다움을 낳는 역설적인 현상을 통해 융합되어 가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김열규, 「속신과 신화의 서정주론」, 『우리의 전통과 오늘의 문학』(문예출판사, 1987) 참조.
10) 「추천사」에 대해서는 김종길 시인이 구체적인 해석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김종길, 「「추천사」의 형태」, 『서정주 연구』(공저, 동화출판공사, 1975) 참조.
11) 김우창, 「떠돌이의 귀향」, 『고전 강연』 8권(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