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시전집 강독 7: 『신라초』에서 세 편
송욱 시인은 「서정주론」이라는 글의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시인의 작품을 모두 살펴볼 때에 그가 한 인간으로 걸어온 발전 단계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고, 이러한 예가 이 나라 현대 시인 중에서 매우 드문 사실을 생각하면 귀중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서정주 씨의 작품을 읽어보면 초기에는 퇴폐라기보다는 오히려 위악하는 몸부림을 느낄 수 있고, 다음에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이 환멸을 거쳐서 차차 생명을 근원으로 삼는 서정시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자기의 감정과 생명에 충실한 태도를 끝끝내 견지하였는가를 무엇보다도 명백히 말해 준다. (…) 이렇게 보면 지금부터도 이 시인에게 우수한 서정시를 많이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정서면으로 시를 추구하는 경향에 새로운 세대는 불만을 가져야 마땅하다. '부푸러오르는 가슴' 밖에도 우리는 노래해야 할 심각하고 복잡한 경험을 많이 지니고 있다.
시에는 인간성의 모든 면들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 지성, 정서, 육체. 이런 것은 개인으로 보아도 빼놓지 못할 요소거니와, 우리는 사회와 역사와 세계성을 노래해야 하고, 마지막에 종교를 노래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넓은 영역에 걸친 복잡한 경험을 테마로 삼는 현대 시인의 태도는 종래의 그것과 판이한 점이 있어야겠다. (…) 뿐만 아니라, 현대의 위대한 시인들은 모두 자기의 예술이 기대고 있을 만한 정신적인 지주가 있었다. 영국의 몇몇 현대 시인을 예로 들어보면, T. S. 엘리엇은 기독교적 구라파 문화를, W. B. 예이츠는 수난 민족의 신화를, D. H. 로렌스는 독특한 육체의 종교를 배경에 두고 있다.
이 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현대시가 세워놓은 한 도표를 본다.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시인의 우수한 업적을 찬양하고 난 뒤에 느끼는 불만과 불안 속에서, 또한 역사와 사회에서 가지고 나온 우리의 경험 속에서 겸손하게 찾아야 할 것이다. (주1)
이 글에서 그는 서정주의 문학적 궤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시가 보다 폭넓고 복잡한 주제를 다루게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처를 살펴보면 이 글은 1953년에 발표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서정주시선』의 시편들이 발표될 무렵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지금 와서 이 글을 읽어보면, 이후 서정주가 보여준 문학적인 행보와 얼마간 맞아떨어지고 있어 신기한 기분이 들 뿐 아니라, 특히 '자기의 예술이 기대고 있을 만한 정신적인 지주'를 언급한 대목은 예언적이라는 느낌을 주기까지 합니다. 이 글이 씌어지고 나서 십여 년이 지나 출간된 네 번째 시집 『신라초』에서 서정주는 신라의 역사를 내세워 고대 사회에서의 정신적 가치를 테마로 하고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서정주가 신라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50년대 초반의 피난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는 『삼국유사』와 같은 책들을 탐독하면서 기록 속에 담긴 신라 사람들의 정신에 강한 매력을 느꼈고,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모색하게 됩니다. 이후 서정주는 50년대 후반에 씌어져 동국대학교 교수 자격 청구논문으로 제출된 「신라 연구」라는 글을 시작으로 신라에 관한 여러 산문들을 발표하는 한편, 신라의 정신적인 측면을 시로 표현하려는 작업에 힘을 기울입니다.
서정주가 신라에게서 특별한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이고, 또 그가 발견하고 추구한 신라의 정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다음의 몇 가지 인용을 통해서 그것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보입니다.
나는 그냥 신라적인 정신태(精神態)의 한 두어 가지가 근년(자세히 말하면 1951년 1.4 후퇴 이래) 매력이 있어서 시험삼아 본따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대별하면 두 가지로서, 그 하나는 '영통(靈通)'이나 '혼교(魂交)'라는 말로써 전해져 오는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의 삼세인연과 윤회전생이다. 이 두 가지는 내게는 지금도 참 매력이 있는 일인데 앞으로도 아마 생전 그럴 줄로 안다. (「내 시정신의 현황」(1964))
신라 정신이 우리 것보다 더 가지고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을 알아듣기 쉽게 요샛말로 하면 영원주의입니다. 현생만을 중요시하여 이치나 모럴이나, 지향이나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영원을 입장으로 해서 가졌었단 말씀입니다. (「신라의 영원인」(1959))
자기 몸이 살아 있는 동안의 부귀영달이나 자기 일생 표준의 성공실패관을 주로 해서 많이 살아온 고려나 이조시대보다는 한정 없는 세대 계승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 했던 통일신라시대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역사적 업적을 우리 민족사에 남기고 있음은 숨길 나위도 없는 일이다. 신라 고난 극복사의 어느 것을 보거나, 거기엔 자기의 단생(單生) 중심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여러 대의 계승하는 합작의 힘이 사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미당수상록』(1976)) (주2)
서정주가 포착한 신라 정신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은 영원주의 또는 영통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초월적인 접촉과 소통에 대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생의 한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와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고,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와도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삶을 그는 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샤머니즘과도 가까운 생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추구는 시인에게 있어서 삭막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한 해결 방안으로서 모색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서정주의 이러한 추구는 평자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시인이 제시하고 있는 샤머니즘에 가까운 소통 방식이 주는 비현실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와 관련해 김종길 시인은 『신라초』와 그 이후의 시편들이 '이성적 구조를 결하고 있으며, 시인 자신이 영매가 되어버린 듯한 경향을 보여준다'고 강하게 비판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주3) 둘째로는 그가 그리고 있는 신라 사회의 모습이 실제 있었던 신라 사회와 일치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김윤식 평론가는 백제 무령왕릉의 발견을 언급하면서 '백제의 역사를 신라가 말살한 사실이 하나하나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기 시작한다면 『신라초』의 세계는 절대적이 못 되고 상대적인 생, 즉 생의 일면적 양상에 전락할지도 모르는 것이다'(주4)라고 말하며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서정주의 신라 예찬의 맹점을 꼬집고 있으며, 유종호 평론가 역시 서정주의 신라가 사실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만들어진 전통에 해당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서정주가 점차 초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려는 시선이 옅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비판입니다. 이것은 사실 서정주의 전반적인 시적 여정에 대한 비판으로서 많이 언급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이와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글은 김우창 평론가의 「한국시의 형이상」일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최남선에서부터 서정주까지에 이르는 주요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국 시의 궤적을 톺아보고 있는 내용의 글이지만, 서정주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대표적인 글로서도 유명합니다.
서정주의 신화적 신앙이 그의 시에 끼친 영향은 대체로 좋은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로 인하여 그의 시는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된다. 그렇긴 하나 얼마간의 시에서는, 이상적인 정신의 경지에 관한 그의 비전은 발 밑의 현실을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지렛대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 그러나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쓰인 시는 아주 드문 예외에 속한다. 그의 후기 시들은 무녀의 잘 알 수 없는 잠언이거나 여기 이 순간에 해탈과 평화를 얻은 사람이 하는 자기 만족의 말들인 것이 보통이다.
서정주 시의 발전은 한국의 현대시 50년의 핵심적인 실패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라마화한다. 그의 초기 시는 한쪽으로는 강렬한 관능과 다른 한쪽으로는 대담한 리얼리즘을 그 특징으로 했다. 이것은 육체와 정신의 필연적인 갈등,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 시에서의 종교적인 또는 평속적인 입장은 그 직시적인 구제의 약속으로 그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켰다. 서정주는 출발은 매우 고무적이었으나, 그 출발로부터 경험과 존재의 모순과 분열을 보다 넓은 테두리에 포괄할 수 있는 변증법적 구조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것들을 적당히 발라 맞추어버리는 일원적 감정주의로 후퇴하였다. 그 결과 그의 시는 대부분의 한국 시처럼 자위적인 자기 만족의 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러한 서정주의 실패는 한국 시 전체의 실패이며, 이것은 간단히 말하여 경험의 모순을 계산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이다. (주5)
여기에서 그는 서정주의 시적 변모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서정주의 실패는 한국 시 전체의 실패'라고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한국 시에서 서정주가 갖고 있는 대표성을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 유명한 표현은 이후 서정주를 미워하는 세력 쪽에서 애써 부정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서정주의 신라나 그 영원주의의 추구가 반드시 비판적으로만 다가오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통에 대한 그의 견해에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시인의 시도가 현대인이 잃어 가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소산인 것 또한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귀담아들을 만한 가치도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김재홍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당의 이러한 역사적 상상력에 대한 관심과 하늘로의 상승을 흔히 '격동의 현실을 두고 고대 신라로 잠적해버린 것으로, 시정의 사람들인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 섭섭해한다'는 지적은 이 점에서 적절하다. 오히려 미당은 신라의 하늘과 사랑을 얘기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적 사랑과 인간애가 오늘날과 같은 인간 상실의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준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오늘날의 첨예한 현실과 사회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해서 그의 시를 비판하는 일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가 발굴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준 신라 정신과 불교 정신, 그리고 그 인간주의야말로 현대적 삶에서 회복되어야 할 명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6)
1961년에 출간된 네 번째 시집 『신라초』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부는 시인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신라의 내부에 대한 약간의 모색'을 시로서 드러내보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라초'라는 소제목 아래 총 9편의 시가 묶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1부는 서정주의 신라 탐구의 시적 결정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중 첫 번째 순서로 수록된 작품은 「선덕여왕의 말씀」입니다.
짐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욕계 제이천.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잡는 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짐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욕계 제이천.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잡는 데- 그런 하늘 속.
내 못 떠난다.
시집의 첫머리에서 선덕여왕의 목소리를 통해 신라의 정신적 혹은 정치적 가치관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실제로 역사적인 기록에 의거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시인이 충분한 공부를 바탕으로 작품을 썼다는 것을 생각케 합니다. 시의 첫 구절에서 선덕여왕은 '짐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욕계 제이천(第二天)'이라고 말합니다. '욕계'는 불교에서의 개념인 욕계, 색계, 무색계의 3계 중에서 완전히 해탈하지는 못한 중생들이 머무는 곳인 욕계를 가리키고, '제이천'이라고 한 것은 욕계의 여섯 하늘 중의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실린, 선덕여왕이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세우라고 했다는 내용의 일화에 출처를 두고 있습니다.
서정주는 이것을, 현세의 욕망이나 소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마음 상태에 있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선덕여왕은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욕계의 하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피'가 거기 있으니, 즉 현세의 것들에 대한 정이 남아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는 이곳에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더 높은 하늘로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셈입니다. 도리천의 하늘은 '구름 엉기고, 비 터잡는 데'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그곳이 사시사철 마냥 맑지만은 않은, 하늘이지만 비교적 땅에 가까운 하늘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2연에서부터 선덕여왕은 현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좀 나눠주고, 또 외로운 처지에 있는 이들은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이 '더러'라는 권고투와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첨성대 위엔 '실한 사내'를 놓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육체로부터 출발하는 삶의 에너지를 긍정하는 구절인 것으로 읽혀집니다.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하는 장소로 해석되곤 하기 때문에, 이러한 육체적인 에너지를 하늘이나 별들과 같이 지고한 것들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3연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은 『대동운부군옥』에 실린 지귀 설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지귀라는 인물이 선덕여왕을 몹시 사모해 상사병이 생겼는데, 이를 알게 된 선덕여왕은 탑 밑에서 잠들어 있던 지귀에게 자신의 팔찌를 놓아주고 갔고, 잠이 깨어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귀는 여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극에 달해 몸에 불이 나고 맙니다. 시인은 이 내용을 차용하여, 시 속에서 사랑과 같은 심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귀의 상사병을 '살의 일로써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덕여왕은 그런 이에게 몸에 닿는 것 중 빛나는 장신구를 건네주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를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울리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마음속의 불을 가라앉히게 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뒷날 시인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 실린 「지귀와 선덕여왕의 염사」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면서, 다른 건 다 잘한 일이지만 지귀가 몸에 불이 난 것만큼은 아주 속상한 일이라고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화자인 선덕여왕은 4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다시 말해 사랑의 불은, 그것이 진실한 것이라면, 국법의 불보다도 오히려 더 타오르고 있어도 좋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나 국법을 정비하는 것과 같은 이성적인 힘도 물론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지귀와 같이 감성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투철한 사랑의 힘도 어떻게 보면 사회적으로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 구절에는 담겨 있습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1연의 말을 반복한 뒤, '내 못 떠난다'라고 말함으로써 다시 한 번 현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일견 한스러운 어조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자신의 메시지가 땅으로 계속 전해질 수 있음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실 모든 역사적 인물들은 저승으로 가고 나서도 이승에서 이름이 불려나옴으로써 그곳을 아주 못 떠나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에서 네 번째 순서로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사소부인을 화자로 하고 있는 세 편의 시, 「꽃밭의 독백: 사소 단장」, 「사소의 편지 1」, 「사소 두번째의 편지 단편」입니다. 사소부인은 신라를 세운 혁거세왕의 어머니로 말해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건국 설화로서 가장 잘 알려진, 진한 땅의 여섯 고을에서 혁거새왕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의 설화 외에, 경주 선도산의 신모가 혁거세왕을 낳았다는 내용의 한 가지 설을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의 이해를 위해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서 이름은 사소이다. 일찍이 신선술의 술법을 터득하여 신라에 들어와 머물면서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자, 황제가 소리개의 발목에 편지를 매달아 보냈다. '이 소리개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가 편지를 받고 소리개를 놓아 주자 날아다니다가 이 산에 와 멈추었다. 마침내 와서 집을 짓고 지선(地仙)이 되었으므로 이 산을 서연산(西鳶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아주 많았다. (…)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령한 아들(聖子)을 낳아 동쪽 나라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의 시초일 것이다.'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꽃밭의 독백: 사소 단장」은 사소가 신선 수행을 시작하러 떠나기 전, 자신이 원래 머물던 집의 꽃밭에 서서 독백하는 장면을 설정하여 쓴 시입니다. 원래 이 시는 한 행이 한 연으로 된 독특한 표기 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친구 시인 오장환의 「붉은 산」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런 표기 방식을 볼 수 있는데 좀 무책임하긴 하지만 편의상 행을 붙여서 썼습니다.
여기에서 화자인 사소는 신선,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시의 도입부에서 그는 그러한 길을 가는 수단 중에서 한계가 있는 것들을 추려냅니다. '노래'는, (이것은 시와도 거의 같은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상과 염원을 표출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그 중 나은 것이기는 하지만,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노래가 암만 해도 한계가 있는 사람의 발명품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구름은커녕 바닷가까지밖에 못 가고 멎어 버리는데, 이는 말이 노래보다도 더 현세적인 소통 수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눈을 돌려서 '산돼지'나 '산새들' 같은 먹을거리, 즉 현세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소는 이미 그런 것들에 '벌써 입맛을 잃었'습니다.
사소가 발견한 초월에의 길, 하늘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존재는 '꽃'입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말'이 하는 것처럼 전달해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 그의 아름다움은 '산돼지'나 '산새들'처럼 자극적이지 않으며, '노래'처럼 관념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아침마다 개벽하는' 존재, 피고 지는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이치를 꽃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소는 아직 꽃의 조화를 이해하고 터득할 방법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꽃의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그는 꽃에게 그가 지닌 비밀을 캘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로 꽃에게 문을 열기를 요구한다기보다도 꼭 그 문을 열어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다시 말해 그것이 고난과 역경의 길이더라도 하늘에 이르는 길, 생명의 비밀을 아는 경지에 반드시 이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시는 끝납니다.
사소를 다룬 두 번째 시인 「사소의 편지 1」은 신라 땅에 도달한 뒤의 사소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매가 이끄는 마지막 곳'에 도달한 사소는 자신이 정착하게 된 곳을 두고 '여기는 잊었던 내 살들이라'고 말하며, '문을 밀고서 신방을 들어가듯/ 문을 열고 나와서 여기 좀 보아'라고 환호하고 있습니다. 선도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기'는 시 속에서 '핏줄이 녹금으로 뻗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사소 두번째의 편지 단편」은 그 이듬해의 사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시입니다. 첫 구절에서 그는 '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피'로 대표되는 육체의 혈기를 그야말로 완전히 가라앉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어 2연에서 그는 자신의 피가 '홍싸리의 수풀마냥' 서걱이다가 '비취의 별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하늘에 '생금의 광맥'을 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로 퍼지게 된 사소의 광맥은 3연에서 편지의 대상이 된 '아버지'에게로도, 사소가 낳은 자식 '불구내'에게로도, 그리고 '먼먼 즈믄 해 뒤에 올 젊은 여인들에게로도' 퍼진다고 말해집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시인의 초기 시편인 「부흥이」의 한 구절과 정반대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내면 속 어두움을 상징하는 존재인 '부흥이'가 자신과 부모님 그리고 자신의 '아내 될 사람'에게마저도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현재의 삶은 물론 미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서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소의 긍정적 에너지가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구절 또한 납득이 안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이 세 편의 시는 사소라는 인물을 통해 초월에 대한 희구와 노력,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발견하는 과정,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뒤의 주인공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월에 대한 갈망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도 읽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소 이야기의 결말에 해당하는 「사소 두번째의 편지 단편」이 그리고 있는 장면에 대해서 이숭원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한 사람의 방황과 일탈, 그것을 극복한 극기의 수련, 거기서 얻어진 정신의 가치가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문화론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그가 (6.25 전쟁 무렵) 자신의 정신착란과 불안을 『삼국유사』 숙독을 통해 해결한 데서 온 체험의 고백일 것이다. 천 년 전의 기록에 담긴 정신이 자신이 닥친 정신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 그 경험을 시에 그대로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7)
한편으로, 이 사소 시편들은 서정주의 시에 있어서 현실 지향에서 영원 지향으로의 변모가 완전히 이루어진 분기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김재홍 평론가는 '「꽃밭의 독백」의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는 구절 속에는 「화사」 이래 끈질기게 지배해 오던 동물적 상상력 또는 대지적 상상력이 퇴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처럼 정신적인 생명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드러난 것이다'(주8)라고 말하고 있고, 이광호 평론가는 '서정주가 「사소 두번째의 편지 단편」에서 '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라고 노래했을 때, 그것은 그의 시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그 피의 잉잉거림이 잦아들면서 그는 현저히 영원의 형이상학 속으로 매진한다'(주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순서로 실려 있는 「신라의 상품」은 신라 사람들의 정신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상업과 관련된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시의 내용은 일견 이해하기 매우 어렵게 느껴지는데, 역시 훗날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서 같은 일화를 다룬 시인 「신라 풍류 2」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정주의 인용으로 원래의 일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례왕 15년에 인관과 서조라는 두 사내가 있어, 어느 날 장에 가서, 인관의 솜과 서조의 곡식을 맞바꾸아 집으로 돌아갔는데, 하늘을 날고 있던 인관네 집 매가 눈이 너무나 밝아서 서조네 집 툇마루에 자기네 집 솜뭉치가 놓여 있는 걸 보고, 내려가서 되루 채다가 저의 집에다 갖다 놓았다. 그래 인관이는 그 솜을 서조한테 갖다가 주고 '매가 그래서 미안타'고 했는데, 서조는 '매가 하늘하고 둘이서 그렇게 해 놓은 것을 어떻게 다시 돌려 받느냐. 못 하겠다'고 했었다. 그래 둘이는 받으라느니, 못 받겠다느니, 옥신각신하다가, 마지막엔 그들이 맞바꾸았던 솜과 곡식 두 가지 다 등에 지고 다시 나가서 애초에 바꾸았던 장의 그 자리에다 갖다 놓았다.'
「신라의 상품」은 이 일화 속에서 두 사내의 실랑이 부분은 잘라내고, '매'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혜안을 지닌 매는 상품이 팔려간 뒤에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되찾아낼 수 있고, 그것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화자는 오늘날의 사람에게도 이러한 매의 혜안을 갖게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봐라, 이 솜을. 이 솜은 목화밭에 네 딸의 목화꽃이었던 것./ 눈을 뜨고 봐라, 이 쌀을. 이 쌀은 네 아들의 못자리에 모였던 것, 모였던 것./ 돌이! 돌이! 돌이! 삭은 재 다 되어가는 돌이!/ 이것은 우리들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 부분은 시인의 완전한 창작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의 '솜'과 '쌀'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 가치를 별로 생각 않고 마구 써 대는 물품들을 가리키고, '삭은 재 다 되어가는 돌이'는 그러한 시대 이전 '매'의 혜안이 있던 시절의 이름인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는 '매'의 마음이 집단적 심성으로 자리잡아 있던 '돌이'의 시절이 현대인에게 사라진 것이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이 뒤로 나오고 있는 나머지 시들도 모두 신라의 일화들을 소재로 하여 씌어진 시들입니다. 여섯 번째 시 「구름다리」는 짐작되기로는 '계축년에 평양주에 큰 다리가 만들어졌다'는 기록 하나만 가지고 창작된 시라고 생각되는데, 다리가 세워진 연유를 신라 사람들의 정신적인 측면과 연결지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백결가」는 거문고의 명인이라고 전해지는 인물인 백결선생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오래 두고 익혀 온/ 슬기론 거문고' 솜씨로써 '밤낮으로 마음을 잘 풀어 갔기 때문에/ 가난도 앞장질런 서지 못하고/ 뒤에서 졸래졸래 따라다녔다'고 말해집니다.
「해」는 아달라왕 때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다른 시들과는 달리 짤막한 산문투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우연히 탄 바위가 일본으로 가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이후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와 제사를 지내자 빛을 되찾았더라는 설화의 내용을 시인은 이렇게 재해석합니다. '아달라의 임금 때/ 해는 연오의 아내 세오의 베틀에 가 매달려서도 살았다./ 하늘에다 잉아를 이 여인이 먼저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 여인과 그 비단이 어딜 가면은, 해도 그리로 따라다녔다.' 하늘까지 걸린 베틀에 해가 걸려서 비단 주인이 움직이자 해도 쫄쫄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부의 마지막 순서로 실린 작품은 성덕왕 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수로부인과 관련된 일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 시 「노인헌화가」입니다. 이 작품은 수로부인 설화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설명하면서, 꽃을 꺾어다 바친 노인의 심경을 화자가 해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떠러지 아래서
그의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었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껏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기마의 남편과 동행자 틈에
여인네도 말을 타고 있었다.
"아이그마니나 꽃도 좋아라
그것 나 조끔만 가져 봤으면."
꽃에게론 듯 사람에게론 듯
또 공중에게론 듯
말 위에 갸우뚱 여인네의 하는 말을
남편은 숙맥인 양 듣기만 하고,
동행자들은 또 그냥 귓전으로 흘려보내고,
오히려 남의 집 할애비가 지나다가 귀동냥하고
도맡아서 건네는 수작이었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꽃은 벼랑 위에 있거늘,
그 높이마저 그만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여간한 높낮이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한없이
맑은
공기가
요샛말로 하면- 그 공기가
그들의 입과 귀와 눈을 적시면서
그들의 말씀과 수작들을 적시면서
한없이 편한 것이 되어 가는 것을
알고 또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
햇빛 포근한 날에 말을 타고 가던 수로부인은 벼랑에 핀 꽃을 보고 가지고 싶다고, '꽃에게론 듯 사람에게론 듯' 말을 하지만, 남편과 동행한 사람들은 듣기만 하고, 오히려 그 앞을 지나던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와서는,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하고 수작을 걸더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묻습니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벼랑에 걸린 꽃의 '여간한 높낮이도', '그만 잊어버렸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물론/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껏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노인은 자신의 겉모습과 나이도, 상대방과의 관계적 거리도, 게다가 물리적인 한계도 말끔하게 잊은 사람으로, 사랑하는 마음씨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후 노인이 꽃을 꺾어 오는 데 성공했는지의 문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힘으로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는 순수한 사랑의 모습이 지닌 미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이 시의 주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이 벼랑에 걸렸다는 현실적 문제 혹은 윗사람으로서의 체면 때문엔지 부인의 말을 '숙맥인 양 듣기만 하고' 있는 남편과 '또 그냥 귓전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다른 동행자들은 이러한 노인의 모습과 대비됩니다.(반대로 남편과 동행자들에 대한 묘사는, 신라에서도 한계에 대한 인식 때문에 초월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연인 16연은 노인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화자의 해석이 담겨 있는 부분입니다. 화자의 말은 조금 어렵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한없이/ 맑은/ 공기'에 해당되는 것이란 전근대 사회에서는 '기운'이라고 많이 불렀던 그것을 뜻해 보입니다. 해맑은 마음씨를 지닌 노인은 자신의 주변의 분위기 또한 긍정적인 기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을 비롯한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맑은 기운이 스며들어가 친밀감을 느꼈다는 것은 아마도 관계적, 물리적 거리감도 거리낄 것이 없는 노인의 맑은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리라고 생각됩니다. 한편으로 주어 없이 써진 '알고 또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의 마지막 문장은 노인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화자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화자 또한 노인의 일화를 읽으면서 그가 느꼈을 '맑은/ 공기'가 자신에게도 다가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양상은 앞서 「사소 두번째의 편지 단편」의 한 대목에 대해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이상으로 살펴본 1부의 아홉 편 외에, 『신라초』에서는 신라에 대한 서정주의 생각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2부의 세 번째 단락에 열네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한국성사략」이 주목됩니다. 한국 별의 역사를 간추린 것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신라 이래의 정신사의 흐름을 극히 압축시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천오백년 내지 일천년 전에는/ 금강산에 오르는 젊은이들을 위해/ 별은, 그 발맡에 내려와서 길을 쓸고 있었다./ 그러나 송학(宋學) 이후, 그것은 다시 올라가서/ 추켜든 손보다 더 높은 데 자리하더니,/ 개화 일본인들이 와서 이 손과 별 사이를 허무로 도벽해 놓았다.' 시인이 보기에 별의 역사는 세 시기로 분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신라 시절에는 금강산에 오르는 이들을 위해 별들이 길을 쓸어주었다는 말은 향가 「혜성가」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해석됩니다. 별이 발맡에 올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앞서 「해」에서 세오녀의 베틀에 해가 걸릴 정도였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만큼 신라 사람들이 별과 친화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송학 이후, 즉 성리학의 가치관이 주류가 되면서부터는 별이 '추켜든 손보다 더 높은 데 자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군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 유교의 현실 중심의 가치관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보면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주10) 그리고 이후 '개화 일본인들이 와서'는 그 거리감이 더욱 심해져 '이 손과 별 사이를 허무로 도벽해 놓았다'고 말해집니다.
화자는 자신이 파악한 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는 스스로 별을 '체내의 광맥'으로 이끌어 가 몸 속에 흐르게 하고자 하지만, 어디 끊어진 곳이 있었는지 일탈했다가는 관류하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별과의 친화력이 있었던 신라의 정신을 체득하기 위한 화자의 노력에 대한 독특한 비유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화자는 자신에게도 별이 마음속에 와닿다가도 와닿지 않는 문제를 두고 '장을 또 꿰매야겠다'고 말하며 재치 있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1) 송욱, 「서정주론」, 『문물의 타작』(문학과지성사, 1978).
2) 두 번째 글은 문덕수, 「신라정신에 있어서의 영원성과 현실성」, 『현대문학의 모색』(수학사, 1969)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글은 이광호, 「영원의 시간, 봉인된 시간」, 『환멸의 신화』(민음사, 1995)에서 재인용.
3) 김종길, 「시와 이성」, 『문학춘추』(1964년 8월호) 참조.
4) 김윤식, 「전통과 예의 의미」, 『한국근대작가논고』(일지사, 1974).
5) 김우창, 「한국시의 형이상」, 『궁핍한 시대의 시인』(민음사, 1977).
6) 김재홍, 「미당 서정주」, 『한국현대시인연구』(일지사, 1986).
7) 이숭원, 『미당과의 만남』(태학사, 2013).
8) 김재홍, 위의 글.
9) 이광호, 위의 글.
10) 일례로 순암 안정복은 그의 『동사강목』에서,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를 부록의 '괴설변증' 편에서 다루어 논평하면서, '이 말은 너무 허황하여 믿을 수 없으니 (…) 신라,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존숭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 그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음을 민망히 여겨 심지어는 이같은 것을 정사에 엮어, 한 구역 어진 나라를 모두 괴이한 무리로 만들었으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강하게 부정한 바 있습니다. 조선조의 역사철학이 대체로 이와 같은 시각 위에서 전개된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효용성을 중시한 서정주가 이에 반감을 가졌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