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미당 시전집 강독 6: 『서정주시선』에서 네 편

by 노정연

3.


시집의 아홉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작품은 「나의 시」입니다. 이 시는 일곱 번째 시집에 수록된 「시론」과 함께 시 쓰는 마음가짐에 대한 서정주의 생각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인의 결혼 직후 있었던 장모와의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하여 씌어졌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정읍에서 장모님이 찾아와서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그분을 모시고 고창 모양성 안을 구경시켜 드리다가 어느 크고 오랜 동백꽃나무 밑에 다다랐다. 봄마다 여러 백 송이의 꽃을 보이는 이 동백꽃나무는 인제 그 꽃들의 반쯤만을 지탱하고 있고, 그 반쯤은 땅 위 풀밭에 떨어트려 놓고 있었다. 그 나무 밑 풀밭에 장모님은 아조 잘 어울리게 조용히 가서 앉아 주셨다.


이분에겐 이런 앉을 때의 조화가 늘 있어, 내가 그 뒤 늘 내 아내에게서도 그것을 찾아보려고 눈여기곤 한 까닭이 되었었지만, 나는 그때 이 조화가 좋아 그분의 상복 아닌 소복의 하얀 치마 위에 그 풀밭 위의 낙화들을 줏어다 놓아 드렸다. 이것은 내가 여직껏의 생애에서 해 온 온갖 손발놀림의 행동 가운데에서도 그중 마음에 드는 행동 중의 하나다. 손과 발을 가지고 일생 동안 해내는 행동들이라는 것도 잘 따져서 가려보면 아조 좋은 건 얼마 되지도 않는 것인 모양이다.'(주1)


이 일화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시의 기반이 되고 있는데, 일화 속에서의 장모는 시에서 '어느 친척의 부인'으로 바뀌었고, 등장인물 또한 실제와 달리 화자와 부인 외에 다른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 있는 점이 차이라 하겠습니다. 시의 전반부에서 화자는 일화의 내용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중 화자와 부인의 성격에 대한 묘사가 주목됩니다. 화자는 나무에서 반쯤 떨어져 '풀밭위에 흥근한 낙화가 안씨러워 줏어모아서는',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듯이' 앉아 계신 부인의 치마폭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해집니다. 부인은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능력을 가진 사람, 혹은 자연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화자는 그 정도까지의 멋이나 지혜를 가진 인물은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그를 흠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때 부인의 치마폭에 꽃을 올리는 행위는 그에 대한 선망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떨어져 있던 꽃의 퇴색된 의미를 되살려내는 행위로서의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화자는 이러한 행위에 담긴 마음이 이후 자신이 시를 쓸 때의 마음과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뒤 나는 연년히 서정시를 썼읍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 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어줄이가 땅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줏어모은 꽃들은 제절로 내 손에서 땅우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수가없습니다.' 화자는 지금의 현실에서 부인과 같은 존재는 없다고 인식하지만,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치마폭을 장식하기 위해 꽃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 행위와 같은 자신의 시 쓰기를 전해줄 사람 없는데도 '제절로' 계속하고 있으며 또 시를 쓸 때는 그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열 번째 시 「풀리는 한강가에서」는, 겨울철 얼었다가 녹아 가는 한강의 물결을 보며 냉정하게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던 마음이 자꾸만 따스히 풀리려고 하는 심경의 변화를 털어놓고 있는 작품입니다.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럭이같이

서리 묻은 섯달의 기럭이같이

하늘의 어름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밈둘레나 쑥니풀 같은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보라함인가


황토 언덕

꽃 상여

떼 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시에서의 상황을 이남호 평론가의 정리를 빌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시인은 세상살이가 너무나 팍팍하고 서러워 모진 마음으로 살고자 했었다. 마치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날아가는 추운 겨울 하늘의 기러기처럼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맺힌 마음은 끝끝내 끝끝내 모질지 못하여 마치 한강물 풀리듯이 풀려버리고 만다.'(주2)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갖은 환멸 끝에 사람이며 세상을 모질게 대하며 살아가리라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결국 마음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시 속에서는 그러한 전환을 결정적으로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겨울 지나 풀리는 강물이 됩니다. 3연의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물결을 내게 주는가'라는 구절에는 감동과 서러움, 반성과 반발감의 마음이 약간씩 섞인 복잡한 심사가 느껴집니다. 이어 4연과 5연에서는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두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굳이 이렇게 만들려고 하는 까닭을 속으로 묻고 있습니다. 겨울을 나는 풀꽃, 죽은 이를 싣는 꽃상여와 부군을 잃고 살아가는 과부들과 같은 모습을 보며 살아가는 의지를 다지라는 거냐고 화자는 생각합니다.


이 시에서의 화자의 어투는 감정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마음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마음 사이 어딘가에 갈 길 모른 채, 정확하게는 냉정함에서 따뜻함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단계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이 시의 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충 봐서는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미묘한 심사의 포착이 탁월하게 나타나는 작품입니다. 유종호 평론가는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서정주의 시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당의 시뿐만 아니라 우리말 시가 도달한 최고 순간의 하나를 울려주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해동철의 강가에서 촉발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은 겨울철로 파악된 삶의 인식과 어울려 보기 드문 비장미의 경지로 승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적인 기층 어휘로 성취되어 있음에 우리는 다시 놀라게 된다. '시의 목적은 놀랄 만한 사고로 우리를 눈부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혀지지 않는 순간으로 또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값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작가 쿤데라는 적고 있다. 서정시의 학문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위의 작품은 쿤데라의 정의를 실감나게 정당화시켜 주는 시편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3)


열한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은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9.28 수복 직후와 1.4 후퇴 직전 사이에 시인이 서울에 머무르던 때에 씌어진 시입니다. 당시 서정주는 지속적으로 환청에 시달리는 등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 속에 있었고, 이듬해에는 자살 시도를 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시 속에서 눈 오는 소리는 '괜찬타'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 말은 쉼표와 말줄임표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변주되어 나타나면서 눈이 오는 느낌에 독특하게 호응합니다.


자연 현상의 소리에 담긴 '괜찬타'는 말소리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목소리인 것처럼 다가옵니다. 무엇에 대해 괜찮다고 하는 것인지를 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를 향한 보다 넓은 포용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만, 부가되는 화자의 설명을 통해 드러나는 눈 오는 소리 속에 안겨 드는 존재들은 대체로 자연 세계의 동식물 그리고 어린아이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연스러움과 순수함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들이 현실 세계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열두 번째로 수록된 시인 「광화문」은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던 화자가 문득 눈에 걸어온 광화문의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 담긴 멋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2017년 황병기 작곡가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게 생각됩니다.


화자는, '광화문은/ 차라리 한채의 소슬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하늘로 살짝 올라간 처마를 가진 광화문의 지붕을 보며 그는 '왼하늘에 넘쳐흐르는 푸른 광명을' '저같이 으젓이 그 날개쭉지우에 살고 있는 자도 드물라'고 말합니다. 시 속에서 광화문이 '종교'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역학'(주4)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2층 지붕 위에 그득히 고이다 못해 넘쳐 흐르고, 흘러내린 하늘은 지붕과 지붕 사이에 있는 '신방같은 다락'으로 넘나들며 땅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화자는 이런 광경을 생각하면서, 4연에서 광화문이 세워진 뜻에 대하여 '옥같이 고으신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함이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실린 세 편의 시, 「입춘 가까운 날」과 「2월」과 「꽃 피는 것 기특해라」는 모두 4행에서 5행으로 된 소품들입니다. 초봄 무렵의 정경을 담백하게 그리고 있는 이 작품들은 앞에서 살펴본 시들과 비교해 본다면 다소 작은 스케일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솔나무는 오히려 너같이 젊고/ 스무 날쯤 있으면 매화도 핀다/ 천년 묵은 고목나무 늙은 흙우엔/ 난초도 밋밋이 살아 나간다'(「입춘 가까운 날」)와 같은 구절들은 소박하고도 정감 있어 호감을 줍니다.


4.


시집의 끝 순서로 실려 있는 다섯 편의 작품은 모두 산문시에 해당합니다. 이 중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시는 「무제」입니다.


오늘 제일 기뿐 것은 고목나무에 푸르므레 봄빛이 드는 거와, 걸어가는 발뿌리에 풀잎사귀들이 희한하게도 돋아나오는 일이다. 또 두어 살쯤 되는 어린것들이 서투른 말을 배우고 이쿠는 것과, 성화(聖畵)의 애기들과 같은 그런 눈으로 우리들을 빤이 쳐다보는 일이다. 무심코 우리들을 쳐다보는 일이다.


이 시는 매우 단순해 보이고 그런 만큼 무시되기도 쉬워 보이지만, 볼수록 매력 있는 시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재삼 시인은 이 작품을 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지만 무심코 지나가기 쉬운 대목 속에 세련된 처리가 크게 돋보이고 있다는 점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가령 우리 시에서 '-일이다'라는 어투를 가진 시가 자신이 알기로는 이 작품이 최초이며 처음 접했을 당시 매우 신선했다는 감상을 밝히면서 '이런 특수하고 새로운 어미 구사를 일반적으로 콜럼버스의 달걀로 생각하기 쉬운 데에 기법상의 묘미를 놓치는 어리석음이 있는지 모른다. 실상 이런 미세한 작의에 독자가 하나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면 시의 맛은 그만큼 반감하고 수용하는 것이 되리라'고 적고 있습니다.(주5)


화자는 오늘 가장 기쁘게 여겨졌던 것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제일' 기쁜 것이라면서 여러 가지가 열거되고 있는 것은 화자의 해맑은 마음씨를 보여주고, 또 그 다음으로 기쁜 것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여지를 남기게 합니다. 시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쁜 것들은 공통적으로 돋아나는 생명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늙고 오래된 고목과 사람들에게 밟히는 발뿌리에서는 '희한하게도' 푸른빛이 돋아나기 시작하는데, 이 모습은 고생을 딛고 다시 생명을 일구어내는 것에 대한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또 두어 살쯤 되는 어린아이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우리들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는데, 아이들의 이런 모습들은 어른에 해당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살아가는 동력을 북돋워주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성화의 애기들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 '무심코'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매우 순수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화자에게 하루 동안 가장 기쁘게 느껴졌다고 말하는 것들이 이렇듯 삶의 소소한 모습들에 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시인은 이 작품을 1951년의 자살 미수 직후에, 오히려 삶에 대한 간절함을 깨닫게 되고 난 뒤의 무렵에 썼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연을 듣고 나면 소박하게 다가오던 이 시의 내용이 정말로 소박하기만 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전쟁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생활이 박살나는 아픔을 겪고도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 사람에게는 봄볕에 돋아난 풀잎이나 어린아이의 눈빛 속에서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그 다음 순서로 실려 있는 시는 「기도 1」과 「기도 2」입니다. 「기도 1」은 앞서 볼 수 있었던 긍정적인 시선과는 다르게 담담한 어조 속에 삶에 대한 초연한 체념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어서, 오히려 화자가 느꼈을 고통이 더 아리게 다가오는 그런 시입니다. 이 작품은 1954년 김환기 화가의 작품 <항아리와 시>에서 화제로 삽입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하눌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던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던지, 반쯤 물이 잠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던지 마음대로 하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화자는 자신이 텅 빈 항아리나 텅 빈 들녘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 비유는 화자의 마음속에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 상실감과 황량함의 분위기를 일으킵니다. '시방'이라는 사투리 단어의 선택도 이런 고백을 하는 화자의 허심탄회한 심정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화자의 내면이 그동안 고통과 불안 속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늘에게 자신의 내면에 '모진 광풍'을 계속 두든지, 아니면 반대로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나비'를 놓아 두거나 '물이 잠긴 도가니'와 같이 하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던가요, 감옥에 갇혀서 부인이 면회를 와 기도를 하고 있기에 가만히 들어보니 '남편을 도와주소서'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소서' 하고 있었더라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마음대로 하소서'는 그것과는 뉘앙스가 달라 보입니다. 그 일화 속의 '뜻대로 하소서'는 기도하는 대상에 대한 신앙인의 겸허한 신뢰에서 나온 말이지만, 시 속에서의 '마음대로 하소서'는 체념의 어감을 주는, 어떻게 보면 반항적인 태도까지 느껴지는 말입니다. 아마도 화자의 허무한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화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내면이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여진' 항아리 같다고 말합니다. 이 시는 누구나 겪어 봤을 만한, 모진 시간을 겪고 나서 마음속이 텅 빈 듯한 상황이 된 심경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편 이어서 수록된 「기도 2」는 허무에 젖어 있던 화자의 심정이 보다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앞의 작품에선 나타날 겨를이 없었던 자신의 소망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화자는 지난밤 꿈에 자신이 '어느 산의 낭떠러지 아래 못물가에서 낯모르는 소년과 함께 바윗돌을 깔고' 앉아 있었으며, 못물가에 자라난 감나무에서는 열매들을 물 위로 기울이고 있는 광경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하늘을 향해 '내 꿈과 생시는 늘 이와 같이 있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 살펴본 세 편의 시는 그 앞 순서로 실린 4~5행의 또 다른 세 편의 시와 함께 시집의 후반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모두 짧은 소품인 동시에, 사건 또는 사물의 나열만으로 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아주 간단한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우창 평론가는 이 여섯 편의 시를 염두에 두고, '『서정주시선』에는 과연,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는 시들, 함축된 정치적 의미는 물론 어떤 서사적 맥락도 없이 긍정할 만한 것들을 말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주6)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실린 「상리과원」과 「산하일지초」는 보다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자연에 대한 긍정과 예찬을 주요한 테마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서정주시선』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관점은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러한 특징과 관련하여 황동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집의 시들이 씌어진 기간에 시인이 1946년에서 1955년까지의 좌우익 싸움과 6.25 전쟁을 겪었는데도 일체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을 만큼 사회 현상에 관심이 없거나 초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단순한 도피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적극적으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내지 않는다'고 말하며, '누이의 어깨 넘어/ 누이의 수틀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라고 우리에게 권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을'이 아니라 '세상은'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이 수틀 같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며, 다만 사회 현상이 생의 전부 혹은 본질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실 상황 대신에 자연을 제시한다. 그 자연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동물(소쩍새), 자연 현상(천둥), 인간(나)이 모두 협력하는 그런 자연이다. 그 자연을 인간은 모방해야 한다. 인간이 모방해야 하는 자연은 「상리과원」에서는 과수 꽃들의 '굉장히 질거운 웃음판'이 된다. '머리나 가슴팩이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뿐 꽃숭어리들을' 단 과수들. (주7)


「상리과원」은 자연에 대한 통찰을 통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결론을 얻고 있는 시입니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자살 미수 직후의 심경 속에서 시의 뼈대를 세우고 난 후 1952년 정읍에 있는 누이의 과수원에 가 있으면서 쓴 시라고 합니다. 시인의 상황과 연관지어 본다면 「기도 1」에서 나타났던 공허한 감정이 「무제」에서의 생명에 대한 재인식을 거쳐 점차 회복되어 가면서 이 시에 이르러 활기 있는 분위기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나 낙동강상류와도 같은 융륭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골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같은 굉장히 질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둥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네온 배나무의 어떤것들은 머리나 가슴팩이뿐만이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뿐 꽃숭어리들을 달었다. 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구치고 마짓굿 올리는 소리를허고, 그래도 모자라는놈은 더러 그속에 묻혀 자기도하는것은 참으로 당연한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할려면 어떻게했으면 좋겠는가. 무쳐서 누어있는 못물과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어서, 때로 가냘푸게도 떨어져네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닢사귀들을 우리 몸우에 받어라도 볼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들과 나란히 마조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속에 이것들이 자자들어 돌아오는- 아스라한 침잠이나 지킬것인가.

하여간 이 한나도 서러울것이 없는것들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하나도 없는곳에서, 우리는 서뿔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서름같은걸 가르치지말일이다. 저것들을 축복하는 때까치의 어느것, 비비새의 어느것, 벌 나비의 어느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것에 대체 우리가 행용 나즉히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귀소가 끝난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때가 되거던,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곳의 별을 가르쳐 뵈일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소리를 들릴일이다.


첫 행에서 화자는 꽃밭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꽃밭은 꽃 하나하나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마치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강의 흐름과 같이 어떤 거대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화자가 그것을 향기로 느끼고 있다는 것은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좀 더 가까이서 바라보면, 꽃 하나하나가 어울려 사는 모습은 마치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같은 굉장히 질거운 웃음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같다'가 아닌 '-이다'라는 단정적인 어조는 화자가 품고 있는 확신을 보여줍니다.


화자는 이런 즐거운 웃음판 같은 자연 속에서 만물이 벌이고 있는 기쁨의 향연을 봅니다. 2행에서 화자는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이어 언급되고 있는 자연 대상들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는 경쾌하기 그지없습니다. 꽃나무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려한 자신들의 모습을 내보이고 있고, 새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겁게 지저귀고, 꿀벌들은 악기 소리며 굿 올리는 소리 같은 움직임으로 요란합니다. 화자는 이 모든 광경, 자연의 구성원들이 모두 기쁨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일'이라고 말합니다.


3행에서 화자는 이러한 자연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겠는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으로, 땅 밑으로 침잠한 못물처럼 누워서 떨어지는 꽃잎들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산처럼 서 있으면서 생물들이 한낮을 춤추다가 밤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맞아준다든지 하는 방식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자가 내놓는 방안은 신선할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황동규 시인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이때 그는 자연을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려면,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 웃음판에 끼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시는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다. 위의 절창 속에서 서정주가 이룩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절실하고 구체적인 참여인 것이다. 이 문제는 되풀이를 필요로 한다. 이 시의 탈을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자연 찬미자와 구별시켜 주는 것은, 추상화되고 유형화된 자연과 만나지 않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자연과 사랑의 방법을 제정해 가며 만난다는 사실이다. 관조하지 않고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주8)


시의 마지막 부분인 4행과 5행에서 화자는 이렇듯 기쁨이 넘치고 서러울 것이 없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서뿔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서름같은걸 가르치지말일이다'라고 말하며, 생물들이 쉬는 밤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곳의 별을 가르쳐 뵈일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소리를 들릴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의 마지막 구절은 「무등을 보며」의 마지막 부분과 꼭 닮아 있기도 합니다. 화자는 결론적으로 자연 또는 세계의 본질에는 슬픈 것보다 기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또 그 다음 세대를 기르는 데 있어서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바라보고, 가르쳐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집의 마지막 순서로 수록되어 있는 시는 「산하일지초」입니다. 산 밑에서 사는 사람의 일지라는 제목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총 세 연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연에서 화자는 구름이 몰려왔다 가는 산둘레를 바라보면서 산과 구름이 왜 매일같이 몸을 맞대는 짓을 반복하는지 의아해하다가, 어느 날 그것이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서로 뺨을 마조 부비고 머리털을 매만지고 하는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화자는 이어서 땅 위가 '더러운 싸움의 찌꺼기들'이 있는 곳이고, 구름은 그것을 '맑힐 대로 맑히어 날아올라서' 하늘 위를 흐르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을 산과 구름의 애무는 서로 그 성격이 상반된 존재들이 벌이는 '한정 없는 그리움의 몸짓과 같은 것'이리라고 말합니다. 더러운 것이 많은 땅에서 솟아난 산과 맑은 것들로 이루어진 하늘에서 흐르는 구름이 서로 살을 맞대는 광경은 속된 것과 탈속적인 것의 뒤섞임과 조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연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난 그날 밤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화자는 산이 '낭랑한 창으로 노래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산의 노랫소리는 마치 '시집와서 스무 날쯤 되는 신부'가 '먼 처녀 시절에 본 꽃밭'을 떠올리며 '그런 꽃을, 아니 그 뿌리까지를 불러일으키려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불러보는 노래와도 같았다고 말해집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불리어 왔을 산의 노랫소리에 대해 '안 잊는다는 것이 이렇게 오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저런 소리는 정말로 산마닥 아직도 오히려 살아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3연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 이튿날의 광경입니다. 밝은 햇빛 속에서 화자는 산의 녹음에 눈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녹음 속에서 화자 쪽을 향해, '한 소슬한 젊은이를 실은 금빛 그네'를 내어밉니다. 그가 마치 '산 바로 그 자기 아니면 그 아들딸'과 같이 느껴졌다고 말하며 시는 끝납니다. 이 시의 결말은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자연을 계속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다 보면 자연도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 전까지 몰랐던 것들도 새롭게 보이고 들리게 된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시집 말미의 「상리과원」과 「산하일지초」에서 구체적인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서정주시선』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시인의 독창적인 해석이 많이 담겨 있는 시집입니다. 이십여 년간의 시인 생활은 그로 하여금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인생론에 대한 어떤 비전을 마련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생각이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950년대 이후 서정주는 점차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그리겠다는 과제에 천착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의 하나가 바로 신라였습니다. 네 번째 시집 『신라초』는 그런 서정주의 노력의 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서정주, 『천지유정』(전집 7권, 은행나무, 2016).

2) 이남호, 「겨레의 말, 겨레의 마음」, 『녹색을 위한 문학』(민음사, 1998).

3) 첫 문장은 「소리 지향과 산문 지향」, 『문학의 즐거움』(민음사, 1995)에서, 나머지 문장은 「서라벌과 질마재 사이」,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에서 인용.

4) 김화영,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

5) 박재삼, 「서정주의 「무제」」, 『서정주 연구』(동화출판공사, 1975).

6) 김우창, 「떠돌이의 귀향」, 『고전 강연』 8권(민음사, 2018).

7) 황동규, 「탈의 완성과 해체」, 『풍장』(나남출판사, 1984).

8) 황동규,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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