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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13. 2021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미당 시전집 강독 2: 『화사집』에서 세 편

                    4.


시집의 세 번째 단락인 '노래' 편에는 일곱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수대동시」는 『화사집』의 시로서는 드물게 건강한 생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입니다.(주1) 거기에는 지난 삶을 차분히 돌아보고,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삶의 풍경을 긍정하고 거기 얼마간 귀의하려는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십년전 옛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인 '수대동'에 돌아온 화자가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사렀구나' 하고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설고 괴로운 서울여자'를 잊어버리고 '눈섭이 검은 금녀 동생'을 만나 '증조하라버짓적 흙으로 지은집' 같은 곳에서 살려고 하는 모습은, 이 시집에서 주류적인 경향을 띠는 다른 시들과는 정반대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를 비롯해 「엽서」, 「부활」 등의 작품에서 희귀하게 나타나는, 자못 의아해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지향에 대하여 이남호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몰입해 있던 어둠의 충동과 핏빛 욕망의 이면에 이러한 건강한 삶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뜻밖이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술 속에 표현된 치열한 배반과 퇴폐가 종종 극단적인 도덕성과 건강성의 추구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주2)


그런데, '머잖어 봄은 다시 오리니' 하는 구절도 나오는 이 시의 바로 다음 순서에 마치 의도된 것마냥 실려 있는 「봄」에서, 시인은 정작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짧은 이 시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병도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개인적으로 이 시는 마치 「수대동시」의 뒷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두 작품을 함께 놓고 읽어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향에 가서 그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살리라던 화자가, 살다 보니 심경이 바뀌어서 오히려 편안하지 않게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는 시간의 흐름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고, 거기 이어지는 '뱀이 눈뜨고'는 이러한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점차 일탈에의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화자의 마음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 구절의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과 그 위의 '혼령있는 하눌'은, 봄바람을 통해 전달되는 봄 기운, 그러니까 마치 봄 기운에 혼령이라도 있는 것마냥 그것을 받으면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피가 잘 도라……'는 이러한 감흥으로 나타나게 된 혈기가 오른 신체적 상태를 말하는 것 같고요.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음과 몸이 달아오르는 상태 속에서 화자가 연인인 것으로 보이는 '가시내'를 향해 이렇듯 평탄하게만 살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유종호 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평범하고 지난하기만 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려 보는 보편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잊혀진 에세이스트 김진섭은 '사람이 차라리 이렇게 살기보담은 한 개의 큰 비극이 몸소 되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하리만큼 그 생활이 평범하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 비슷한 생각은 세계 곳곳의 시문에 편재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신체 만사형통해서 별 탈이 없으면 차라리 슬픈 일이라도 있어야겠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낯익은 평범한 생활로부터의 일탈 소망을 노래한 이 작품은 간곡하고 경제적인 시적 성취를 얻고 있다. 널리 공감할 수 있다. 보편적 심성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3)


보편적 심성, 이것은 그 뒤의 순서로 수록된 작품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래' 편에 실린 시들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화사' 편에서의 이질적이고 특이한 세계에 비하면 한결 현실에 가깝다는 인상을 줍니다. 「서름의 강물」과 「벽」에서는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가셔질 길 없는 슬픔과 답답함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고, 「엽서」와 「단편」은 그러면서도 새롭고 건강한 생활을 살아갈 것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는 시들입니다. 이 중 「벽」의 경우 서정주의 의도치 않은 등단작에 해당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화사집』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에너지의 맹아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기도 합니다.


'노래' 편에서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는 「부흥이」는 앞서 '화사' 편에서 잘 볼 수 있었던, 어두운 에너지에 사로잡혀 있는 시인 자신을 객관화시켜 표현한 작품입니다. 시인의 내면에서 불어닥치곤 하는 어둠에의 지향을 밤만 되면 화자에게 와서 울어대는 부엉이에 비유한 것입니다. '피빛 저승의 무거운물결'에 젖은 채 자신의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수상한 주부(呪符)'처럼 울음소리를 흘려 대는 '부흥이'를 보며, 화자는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또 나와 나의 안해될사람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 두려워하는 심리를 내비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흥이'가 지닌 이러한 어두운 에너지는 저승의 물결에 젖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눌로' 향해 있다고 말해집니다. 그렇기에 그가 지닌 공격성은 마냥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상황을 박차고 나가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양상은 시집의 마지막 단락인 '문' 편으로 이어집니다.


                    5.


시집의 네 번째 단락인 '지귀도 시' 편에는, 시인이 1937년 제주도에 머무르면서 쓴 시 네 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단락은 '화사' - '노래' - '문' 편으로 이어지는 시집의 전체적인 구성과는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루고 있는 심상 자체는 시집의 다른 시들과 이질적이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로 수록된 「정오의 언덕에서」는, '화사' 편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넘치는 혈기와 욕망에의 긍정을 다시 노래하면서, 그것을 강한 자존감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시입니다. '황금 태양을 머리에 달고' 있다는 화자 자신에 대한 묘사나 '시약시야 나는 아름답구나'라는 자기 과시의 표현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 독특한 면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과장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또 다른 시인 「웅계(上)」의 경우 이러한 과장의 부정적 측면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 보입니다. 시에서는 화자가 새벽 닭을 보며 감화되어 그를 따라 크게 울음소리를 내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에 대해 이숭원 평론가는 서정주가 훗날에 쓴 자전적 시편인 「제주도의 한여름」과 그 내용을 비교하며 이 장면의 모티프가 그저 술을 진탕 마시고 목울음을 내면서 토했던 일을 과장한 것이었을 뿐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주4) 함께 실려 있는 「웅계(下)」 또한 앞서 언급했던 「도화도화」처럼 난해한 구절이 많은 시입니다.


이 단락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은 「고을나의 딸」입니다. 우연히 본 해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화자가 수작을 걸려다가 싱겁게 끝나고 마는 얘기를 담은 이 시는, 역시 신비로운 색채가 입혀져 있기는 하지만, 「정오의 언덕에서」와 비교해보면 훨씬 소박한, 하지만 산뜻한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문득 면전에 우슴소리 있기에

  취안을 드러보니, 거긔

  오색 산호채에 묻처있는 낭자


  물에서 나옵니까.


  머리카락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바다에 떠보이면 아름다우렸다.


  석벽 야생의 석류꽃열매 알알

  입설이 저…… 잇발이 저……


  낭자의 이름을 무에라고 부릅니까.


  그늘이기에 손목을 잡었드니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눈이 항만하야 언덕으로 뛰어가며

  혼자면 보리 누름 노래불러 사라진다.


이 시가 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은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가진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비로움과 친근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맨 처음엔 '우슴소리'로 나타나고, 다음으로는 '오색 산호채'에 묻혀 있다가 물에서 나와 바다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콧구멍'을 반복한 것은 해학적으로도 다가오지만, 생명 또는 육신을 긍정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석벽 야생의 석류꽃열매'는 아마 그가 캐내 가지고 온 해산물들을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신비감을 입혀 그린 여인의 모습에 비해 화자의 모습을 평범합니다. '입설이 저…… 잇발이 저……'라는 주저함의 표현은 여인에게 다가가면서도 막상 그를 대했을 때의 순박하고도 소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화자는 용기를 내서 여인의 이름도 물어보고 손목도 잡아 보지만, 여인은 '몰라요'라는 말만 되풀이한 뒤 언덕으로 뛰어가 사라집니다. 여인이 '노래불러' 사라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자의 태도가 반드시 강압적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이 시는 제주도에서의 한 소박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정감 가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시집의 마지막 단락인 '문' 편에는 네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로 수록된 「바다」는, 앞의 시들에서 엿볼 수 있었던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 대한 타개 의지를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에서는 화자가 '청년'이라는 대상을 설정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냥 화자가 자신의 자아를 타자화한 것,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좋아하는 시는 아니지만, 『화사집』에서 현실 타개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어서인지 평자들 사이에서는 자주 언급되어 왔습니다. (가령 진보적 성향의 평론가들은 대체로 이 작품을 필두로 한 『화사집』 수록 시편들을 현실에 대한 비판적 토로와 그 타개에의 추구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서정주의 시들 중에서 가장 높이 쳐 왔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다루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기의 시들이라고 반드시 현실 비판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귀기우려도 있는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아- 반딋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우름에 젖은얼굴을 온전한 어둠속에 숨기어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에 홀로 타오르는

  한낫 꽃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란 하눌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깊이우에

  네구멍 뚤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게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우에 풀닢처럼 흣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젖은 국토가있다.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푸리카로 가라!


시의 초반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화자의 현실 인식입니다. 첫 구절에서, 화자는 '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이라고 말합니다. 바다가 화자의 내면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인 건지 아니면 화자가 진짜로 바다를 앞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여 보았고 그 속에서 '바다'가 관념적 존재로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화자가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보았으나 바다밖에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존재가 없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뭐가 되었든 바다는 화자에게 비유적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바다는 세상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가기 위한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바다와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 구절은 세상 앞에 선 화자의 고독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다는, 그 이미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거대하고, 복잡하고, 나보다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무섭고, 또 그렇기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바다와의 공존은 역설적으로 화자의 고독을 강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인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한다는 바다에 대한 묘사는 바다의 특성을 통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공간의 광대함과 시간의 무한함이라는 성격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는 구절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화자의 난처한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법의 가짓수는 무한한 것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확실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 있는 길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1연의 여러 구절들은 사람들, 특히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은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세계 인식의 면면을 적절하게 집어 보이고 있습니다.


2연에서 나타나는 것은 화자의, 또는 '너'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우름에 젖은얼굴'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반딋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어둠 속에 숨기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 괴로워하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화자는 그에게 바다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무언의 해심(海心)'에서 홀로 타오르는 '꽃같은 심장'을 지닌 채 차라리 참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3연에서 화자가 청년으로 하여금 바다로 나아가서 하도록 하는 행동은 '구멍뚤린 피리'를 부는 일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기보다도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침몰'의 길이 동시에 화합을 향한 길이기도 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시, 그것은 고통의 길입니다. '애비'와 '에미' 그리고 '마지막 네 게집'까지 잊어버려야 한다는 4연의 구절은, 이러한 '청년'이 가야 할 행로에 철저한 고독 또는 방황이 있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주저되는 일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화자는 주저하는 '청년'에게 먼 곳으로 가라는 말과 침몰하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현실 극복의 의지를 격정적으로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때 어감이 비슷한 네 개의 지명은 강박적인 느낌을 더욱 돋우게 합니다.


6연에서 화자는 '나'로 돌아와, '이리도 괴로운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라며 괴로움을 호소하지만, 그는 다시금 '청년'에게 '사랑하는 눈을뜨라'고 요구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젖은 국토가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얼른 이해되지는 않는 구절입니다. '아라스카' 등과 대치되는 느낌을 주는 '국토'는 화자의 괴로움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이곳을 가리키는 말로 느껴지는데, 그것이 어디에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7연에서 화자는 다시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고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현실 타개의 의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수록된 「문」 역시 「바다」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밤에 홀로 눈뜨는 건 무서운일이다'라고 하면서도 어조를 바꿔 '아름다운 일이다'라 말하고, 이어 '뉘우치지 않는사람'으로 지칭되는 시적 대상에게 '집과 이웃을 이별해 버리자'고 요구합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시적 대상에게 화자는 '오느라, 여긔 지혜의 뒤안깊이/ 비장한 네 형극의 문이 운다'고 말합니다. '문'은 화자의 현실 극복 의지를 통해 나타난 존재이지만, 그 문이 '형극의 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고통의 길을 예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실린 「서풍부」는 지극히 낯선 내용을 감쪽같이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서정주의 언어 감각이 지닌 매력의 일면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시의 리듬은 가령 「오다 가나」나 「산 너머 남촌에는」 같은 시에서 볼 수 있었던 7-5조의 변용을 주조로 하고 있지만, 이런 형식으로서는 대단히 낯선 단어들과 전개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녘에서 부러오는 바람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와 같은 이미지나 상황의 나열만으로 이루어진 구절들은 해석하기엔 당황스럽게 다가읍니다. 아무래도 이 시는 앞서 본 「봄」과 같은 작품에서 나타났던, 시인의 피를 돌게 하는 '하늬바람'(서풍)에 대한 일종의 성분 분석을 해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사집』의 마지막 순서로 실려 있는 시는 「부활」입니다. 이 시는 '순이'라는 연인을 잃은 화자가, 종로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잃었던 연인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주5) 화자의 감흥을 산문시의 형태로 내비치고 있는 이 작품의 초두에서 '새벽닭이 울때마다 보고싶었다'와 같은 구절, 그리고 그 뒤로 죽 이어지는 연인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화자의 사무치던 그리움의 표현은 절절합니다. 이어 언급되는 '부흥이 우는 돌문'을 열면 나오는 몇천 리의 강물, '한번가선 소식없든 그 어려운 주소'의 묘사는 연인이 떠나간 곳이 저승임을 가리켜 줍니다. 하지만 이제 화자는 그렇게 영영 떠나간 줄 알았던 연인이 거리 위의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의 모습 속에 뚜렷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못 볼 줄만 알았던 연인의 모습을 그들의 모습으로 마주한 화자의 감격으로 시는 마무리됩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로 죽은 연인을 다시 만났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만큼 현실의 다른 사람들을 다시금 정감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황동규 시인의 말마따나 이 시에서의 '부활'은 단순한 연인의 부활이라기보다도 현실의 긍정적 재발견이라는 의미에서의 부활에 가깝습니다.(주6) 『화사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고통의 몸부림을 주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이 시집의 마무리를 이 작품으로 끝맺고 있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야 하고 그러한 극복의 비전을 성공적이든 아니든 간에 보여주어야 하겠다는 시인의 의식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부활」은 감동적인 시편이기는 하지만, 상황 설정이 지나치게 환상적이어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얼마간의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이 시는 서정주가 가장 초기적으로 선보인 정신을 통한 긍정성의 시편의 하나이지만, 이 작품을 통해 나타난 비현실성의 극복이라는 문제는 이후 그의 필생의 과제의 하나로 부상하게 됩니다.


                    7.


서정주의 작품 연보를 보면 『화사집』에 수록된 작품들 이외에 발표되었으나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이 여럿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화사집』뿐만이 아니라 이후의 다른 시집들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시집을 낼 때 시인 자신이 어느 정도의 자기 검열을 거쳐서 완성도가 높지 않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걸러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초기 시편들 중에서 가령 「풀밭에 누어서」나 「살구꽃 필 때」와 같은 작품은 시집에 실렸어도 괜찮았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주7) 실제로 해방 직후의 앤솔로지인 『현대시집 3』에서는 시집 미수록 시편으로서 「풀밭에 누어서」와 「저녁노을처럼」의 두 편이 수록되기도 한 바 있습니다. 다변조의 산문시인 「풀밭에 누어서」는 1938년에 씌어진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제 후반기의 팍팍한 현실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무렵의 한국 시에서는 이런 긴 산문시가 더러 시도되기도 했었습니다.


  오늘도 할수업이 못가고 마럿다, 내일은 어떠케 떠나야할텐데……. 우선 입질(入質)헌 옷이나 찾어입고, 이원오십전 주고 고무바닥헌 백단화(白短靴)나 하나 사신고, 이발이나 좀허고 목욕이나 좀하고…….

  오늘도 내가 풀밭에 누어서 혼자 생각하는 것은-

  (우리 둘의 행복을위하야) 그런것은 아니다 불상한 안해야

  혹, 어쩌다가 담배나잇스면, 북향의 창에 턱을고이고 으레히 내가 바래보고잇는곳은 국경선박갓, 봉천(奉天)이거나 외몽고(外蒙古)거나 상해로가는쪽이지 전라도는 아니다.

  내게 인제 단한가지 기대가 남은것은 아는사람잇는 곳에서 하로바삐 떠나서, 안해야 너와나사이의 거리를 멀리하야, 낯선걸에 서보고싶은것이지(성공하시기만)…… 아무리 바래여도 인제 내마음은 서울에도 시골에도 조선에는 없을란다.

  차라리, 고등보통같은것 문과와같은것 도스터이엡스키 이와같은것 왼갖 번역물과 같은것 안읽고 마럿스면 나도 그냥 정조식(正條植)이나심으며 눈치나살피면서 석유호롱 키워노코 한 대(代)를 직혓을꺼나. 선량한나는 기어이 무슨 범죄라도 저즈럿슬것이다.

  어머니의애정을 모르는게아니다. 아마 고리키이작(作)의 어머니보단 더하리라.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게아니다. 아마 그아들이 잘사는걸 기대리리라. 허나, 아들의지식이라는것은 고등관도 면소사(面小使)도 돈버리도 그런것은 되지안흔것이다.

  고향은 항상 상가(喪家)와같드라. 부모와 형제들은 한결같이 얼골빛이 호박꽃처럼 누-러트라. 그들의 이러한체중을 가슴에언고서 어찌 내가 금강주(金剛酒)도아니먹고 외상술도아니먹고 주정뱅이도 아니될수잇겟느냐!

  안해야 너또한 그들과 비슷하다. 너의소원은 언제나 너의 껌정고무신과 껌정치마와 껌정손톱과 비슷하다. 거북표류(類)의 고무신을 신은여자들은 대개 마음도 같은가부드라.

  (네, 네, 하로바삐 취직을 하세요)달래와 간장내음새가 피부에젖은안해. 한달에도 맺번식 너는 찌저진 백로지(白露紙)쪽에 이러케 적어보내는것이나, 미안하다, 취직하곳도 성공할곳도 내게는 처음부터 업섯든걸 아러라.

  미안하다 안해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직까진 시골에 버꾹새도 울꺼니까, 대추나무 밑에 마포적산이나 다듬든지, 친정에 가잇든지, 또다른데 가잇든지, 그러케하여라.

  그럼 너와 나사이에는 만흔산천과 세월로 가리우고 서로의 기억속에서 그림자처럼 열버저가자. 그러한 공부를하자. 비록 애정같은게 잇다해도 그건, 시간문제니까.

  잘잇거라. 그럼 인제 나는 봉천으로 갈라니까. …… 유면이씨가 이십원만 꾸어주면- (씨는 이번에 나와배군(裵君)에게 약주를 이원어치 멕여주엇으니까)- 양복을차저입고, 이원오십전짜리 백단화를 하나 사신고 차ㅅ갑슬 삼십전만 애껴가지고 조선관으로 박병일군을찾어가서- (군은 나의 중학의동창이니까)- 한오십원만 어더가지고 고햐꾸(合百)를 한번해야할텐데 …… 유면이씨도 병일군도 고햐꾸도 이것도저것도 다 틀리는 날이면 거러가야겟다. 거러가야겟다. 거러가야겟다.

  안해야 너잇는 전라도로향하는것은 언제나 나의배면(背面)이리라. 나는 내 등뒤에다 너를 버리리라.

  그러나

  오늘도 북향하는 동공을달고 내피곤한육체가 풀밭에 누엇슬때, 내 등짝에 내 척추신경에, 담배불처럼 뜨겁게 와닷는것은 그 늘근어머니의 파뿌리 같은 머리털과 누런잇발과 안해야 네 껌정손톱과 흰옷을입은무리조선말. 조선말.

  -이저버리자!


유종호 평론가는 이 시에 대해 '시적 변용이 없는 '자화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는 피가 섞여인 '시의 이슬'로 사뭇 비장하게 그려지던 것의 정체가 사실은 위와 같은 극히 지난하고 구질구질한 것이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애매하게 먹물을 머금은 백수 처지인 화자가 풀밭에 누워서 아내의 '껌정손톱'과 '조선말'을 '이저버리자!'고 속으로 다그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만큼 자신에게 중요한 것, 해결해야 할 것으로 맴돌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발표된 서정주의 글들은 몇 편을 제외하면 이른바 친일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글들입니다. 그는 회고에서 자신이 친일 행위를 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생활고의 문제와 정치 상황에 대한 오판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서정주의 문학적 자서전인 『천지유정』에서 두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군기 제조를 위한 쇠붙이의 공출이니 뭐니 그런 것은 다 접어 두고라도 양식마저 거의 다 강제로 빼앗겨 첫째 배고파서 살 수 없는 때가 되었다. 농민들의 먹고 살 곡식마저 반나마 빼앗아 가고 나니 혹 암거래되는 말쌀이나 됫박쌀이 있다 해도 그건 너무나 비싸서 여간 큰 부자가 아니고선 그걸 팔아 살아 내는 재주도 없었다. (…) 1943년 여름부터 1945년 8월의 해방까지 이 두 해 동안은 대다수 서울 시민들의 한 단식 수행기라고 할 수 있다. 잘 굶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해방까지 남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신음하다가 그 숨들을 하늘에 풀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전역은 거의 다 일본군에 점령되어 가고 있는 소식만이 날이 갈수록 번성해 갔다. 중국의 독립 정부는 중경 구석으로 몰린 채 재기한다는 기별은 영 캄캄하고, 유럽은 완전히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손아귀에 들어간 걸로 알려져 왔다. 물론 거짓말이 너무나 많은 보도들이었을 것이지만,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된 건 1945년 8월 15일 해방 뒷일이고, 이때엔 나는 이걸 거부할 만한 딴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 창피한 대로 꽤 길 미래의 일본인의 동양 주도권은 기정사실이니 한국인도 거기 맞추어서 어떻게든 살아 내야 한다는 생각을 세우고 만 것이다. 정치 세계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내 그릇된 인식을 만들고, 이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언행들이 내 생애의 가장 창피한 일들을 빚었다.


『천지유정』에서는 서정주 자신이 친일 행위를 하게 된 경위와 그때의 심정, 시와 종군기를 비롯한 친일 소재 글들의 편수와 그 구체적인 내용, 심지어 자신의 창씨개명한 이름까지 모두 적혀 있습니다. 처음으로 쓴 일어 시 「항공일에」를 발표하자 일본 시인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해보았자 약점밖에 안 될 만한 일화도 가감 없이 적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만 보더라도 서정주가 자신의 과오를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글도 아니고 자서전에서 자신의 과오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렇게나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인물은, 과문한 제가 아는 한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정주의 친일 전력과 함께 그의 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머리글에서 나름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서정주에 대해 흔히 오해하곤 하는 사실 한 가지만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바로 그가 해방 이후 자신의 과거 행적을 묻어두려고 하지 않았느냐는 편견에 관한 문제입니다. 앞서 인용한 자서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과하고 있고(이 글은 1970년대에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 전집의 일부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행적이 다시금 논란이 된 이후 말년인 1992년에 발표한 산문에서도 같은 뜻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과오는 물론 과오이지만, 서정주가 자신의 과오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현실 사회에서는 물론 이 나라의 민족의 역사나 세계사 속에서도 내가 언행했거나 글로 표현한 것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만치 여러분은 누구거나 내게 지탄거리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것을 사실대로 지시해 주시기 바란다. 그래 나는 사실로 나타난 내 자격으로만 이 현실과 역사와 자연과 영성 앞에 놓여 살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실제 이상으로 눈감아 주는 우수리도, 나의 실제보다 얕잡아보는 에누리도 나는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이 글만이 아니라 딴 글에서도 솔직히 언급해 왔듯이 일정 말기에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로 일본의 지배가 오래갈 걸로 알고 자손지계를 위해 일본에 순응해 살기로 작정했던 사실에 대한 책임도 나는 조끔치라도 문제가 되는 날까지는 꾸준히 지켜 피하지 않을 것임을 여기 서약해 둔다. (주8)





1) 이 시는 시인이 혼인을 위해 서울에서 고향 쪽 전라도로 내려가 있을 무렵인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이숭원, 『미당과의 만남』(태학사, 2013) 참조.

2) 이남호,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열림원, 2003).

3) 유종호, 『한국근대시사』(민음사, 2011).

4) 이숭원, 위의 책.

5) 「부활」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은 최초 발표지면인 『조선일보』(1937)에서는 '순아'로 지칭되어 있지만, 『화사집』(1941)에서는 '유나(臾娜)'로 되어 있고, 『서정주시선』(1956)에서는 '수나(叟娜)'로 되어 있어서, 표기와 관련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서정주는 해방 이후에 쓴 산문인 「일종의 자작시 해설: 「부활」에 대하여」에서 이 이름을 다시 '순아'로 표기했는데, 이후의 한 대담에서는 또 '유나'라는 표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것이 '임유라'라는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이경철의 『미당 서정주 평전』에서는 임유라가 근래 재조명된 평론가 임순득을 가리킨다고 적고 있습니다). 윤정희 배우가 낭독했고 서정주가 감수했다고 알려져 있는 1991년의 낭독 음반에서는 '수나'라고 녹음되어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이름은 처음에는 '순아'였다가 『화사집』에서는 '유나'라고 고쳤고, 해방 이후 다시 '수나'로 바꾼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6) 황동규, 「탈의 완성과 해체」, 『풍장』(나남출판사, 1984).

7) 유종호, 「모나리자와 살구꽃」, 『작은 것이 아름답다』(민음사, 2019) 참조. 1950년대까지의 서정주의 시집 미수록 시편에 대해서는 최현식의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소명출판, 2003)의 부록이 참조됩니다. 그의 후기 미수록 시편에 대한 정리 작업도 요망되어 보입니다.

8) 서정주,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 『나의 시』(전집 11권, 은행나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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