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내여 당신의 은빛 머릿단은

미당 시전집 강독 19: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에서 여러 편

by 노정연

1.


연작 시절의 여섯 권의 시집 중에서, 앞의 세 권에 비하면 뒤의 세 권은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다소 무리는 있겠지만 이 세 시집에 관해서는 한꺼번에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우선 짚고 넘어갸아 할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바로 1980년대에 있었던 서정주의 친독재행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앞서 70년대까지 있었던 그의 몇몇 논란과 관련한 문제를 언급한 바 있지만, 80년대의 경우는 아무래도 따로 다뤄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에 있었던 서정주의 행적 중에서 친독재와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1981년과 1987년에 각각 신군부 출범과 호헌 조치를 지지하는 발언에 참여한 일, 그리고 198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일에 축시를 써 보낸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건들이 특히 눈길을 끌게 되는 까닭은, 이전에 있었던 서정주의 다른 정치적 논란보다도 더욱 납득이 안 되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하다못해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보다도 정통성이 없는 권력이었고, 당시의 서정주는 이미 문학계에서 원로 중의 원로로 대우받고 있던 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는 답답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정주의 둘째 아들 서윤은 당시 아버지를 뜯어말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사람 말을 잘 믿으셨던 아버지는 당시 군부에서 주는 정보만으로 모든 혼란의 저변에 공산주의 세력이 깔려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오직 군사정권만이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시며 군사정권의 지지 연설을 하시겠다고 했어요. 저는 아버지께 군부가 주는 정보만을 믿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고, 군부에게 이용당하시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며, 평생 후회하실 것이라고 말렸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언성을 높이며 설득하고, 홧김에 가출까지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주1)


서정주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말년의 시인과 친분이 있었던 이경철 평론가는 『미당 서정주 평전』에서 이 문제에 관해 서정주 본인에게도 물어보고 문단의 여러 인사들에게도 자문을 구해보았지만 뚜렷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과거 친일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자신의 심정을 밝힌 바 있으면서도 친독재와 관련해서는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생전에 글로서 정리한 적이 없어, 오히려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쪽이 더욱 시쳇말로 '흑역사'로 느껴졌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80년대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대략 세 가지의 심리적 요인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로는 노년기의 정신적 노쇠에 따른 정치적 편향성, 둘째로는 서정주 특유의 순응주의적 경향의 가치관, 그리고 셋째로는 서정주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었던 정치적 사건들에 따른 트라우마가 그것입니다.


이 중 첫 번째 요인은 위에서 인용한 아들의 회고 속에서의 서정주의 행동에서, 또 그가 남긴 몇몇 발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의 위협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니 군부에 협조하는 것이 났겠다고 판단하고 있는 그의 논리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노년기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정치 편향의 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주2)


두 번째 요인은 평전에 실려 있는 그의 발언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정주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80년대의 행적에 대한 물음을 받게 되자, 군부의 행패로 인한 더 이상의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었다는 내용의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발언에서는 서정주 특유의 폭력적 현실에 대한 순응주의적인 대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도록 하세. 군인이 정권을 맡으면 불행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지 않나. 박정희 때 우리도 실컷 당하지 않았나. 내 막내아들도 박 정권 말기에 대학에 다니다 경찰에 끌려가 당하기도 하고 흉한 꼴 본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런 걸 보면서 나도 군사정권 큰 탈났다고 느꼈지. (…) 그때 잘 아는 한 기자가 와서 2대째 군인 정권이 되는데 큰 탈났다, 예전같이 국민이 당하게 되었는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전두환을 회유해 좋은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고 권유하는 거야. 해서 나가서 국민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여 바른 대통령이 되라고 충고를 한 것이야. 그것뿐이야. (주3)


한편 세 번째 요인의 경우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서정주의 자서전에서는 자신이 협조했던 정권 밑에서 오히려 봉변을 당한 내용의 사건이 여러 차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1944년에 그는 항일적 성격의 한 연극 모임이 체포되면서 7~8년 전에 시인과 친분이 있었던 그들이 그의 시에 감화를 받았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친일을 했었음에도 두어 달간 투옥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는 국군의 종군 문인 단체에 참여했었으나 신분증을 놔둔 채 돌아다니다가 국군에 잡혀 신원미상으로 끌려가 총살 직전까지 간 적도 있고, 5.16 직후에는 본인의 이름이 영문도 모른 채 혁신파 교수 명단에 올라가 있었던 바람에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80년대의 험악한 상황 역시 그가 이전에 겪었던 이런 경험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환기되면서 일종의 과잉 방어, 과잉 협조의 제스처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에서 경호실장을 지냈던 장세동이 정권 옹호 발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서정주의 집에 살다시피 했다는 동생 서정태 시인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주4)


그러나 하여간 그의 친독재행위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경철 평론가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건 유죄라는 말을 깊이 되새기던 문학도의 입장에서, 그 당시의 누구인들 미당을 말당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말하면서도, 서정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에게서 공식적인 사과의 입장 표면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고하기 얼마 전의 병상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얻어내게 됩니다. 거칠게나마 그가 자신의 행적과 관련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은 언급해둘 필요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자네도 계속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구만. 내가 몇 번이나 답해야 되겠는가. 그때 그 일들이 지금 생각해보니 무척 잘못된 일이었다고. 그때 그들에게 짓눌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협조했으나 돌이켜보니 내 짧은 생각이었다고.


기실 내 시의 혼은 정치가나 지사와는 달리 에스프리야. 나의, 인간의 덜떨어짐을 곧이곧대로 인정하면서, 의(義)나 리(理)에 굳어버리지 않고 항상 바람처럼, 물처럼 떠돌고픈 시인이었을 뿐이라고 이해해주게나. (주5)


그러나 이 행적이 불러온 파장은 작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진보주의가 크게 대두되고 있었던 문학계에서, 서정주가 보여준 일련의 정치적 행보는 그에 대한 인식을 긍정에서 부정 쪽으로 돌려놓는 데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맙니다. 가령 80년대 당시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오세영 시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당시 대학가에서 서정주가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내가 대학 강단에서 느낀 시류성이란 이런 것이다. 당시 대학 교육은 거의 소위 운동권의 선배들이나 재야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때였다. 문학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입생이 입학하면 일단 소위 운동권 선배들이 이를 장악하여 의식화를 시키게 마련이었고 그 중요한 프로그램의 하나가 어용문학에 대한 단죄와 금서 혹은 필독서의 교양이었다. 서정주의 문학이 이 어용문학과 금서의 범주에 단골 메뉴가 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때로는 너무나 도식적이고 통속적인 차원에 머물러 문학의 객관적 이해를 방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내가 강의 시간에 서정주의 작품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빈정대는 투였다. 참다못해 내가 '서정주는 비록 그 삶에 있어서 과오가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러나 작품 자체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역시 훌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응수하면 학생들의 대답은 천편일률적으로 서정주는 문학작품에 있어서도 수준미달이라는 것이었다. 문학은 인간 삶의 반영인데 서정주는 어용을 했으므로 문학 역시 저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도식적이고 통속적인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이에서 더 나아가 아예 서정주의 시가 왜 좋은지 아무리 읽어 보아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훌륭한지를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형식주의 옹호론자, 어용문학 동조론자 나아가서는 반민중주의자로 몰렸다. 소위 일류 대학생들이 이 모양이니 대체 이런 학생들을 앞에 놓고 내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했을 것인가. (주6)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시각으로 본다면 또 다른 편향으로 보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머리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작품의 가치 때문에 작가의 과오가 가려지게 되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그 역의 명제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의 친독재행위가 결국 그의 생애에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행적으로 남은 것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정주의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평자들 또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정주 문학 전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힌 대표적인 글로는 최두석 시인과 임우기 평론가의 글을 들 수 있어 보입니다. 최두석 시인은 서정주의 시가 『귀촉도』 무렵 이후 순응주의를 저변으로 깔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문학에서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미덕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고, 임우기 평론가는 서정주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불교적 달관의 어투가 고통의 과정이 생략된 해탈이라고 지적하면서 그의 해탈이 거짓되고 기만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글에서 그의 시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과 「국화 옆에서」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각각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의 창작 시기는 6.25 당시이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 시적 자아는 온갖 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괜찬타'를 되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괜찬타'는 되뇜과 환청이 교차되는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미당에게 6.25 전쟁은 역사적 안목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운명으로 닥쳐왔고 그리하여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인식이 '괜찬타'는 주문을 되뇌게 한 것이다.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 드는 소리'에서 어림할 수 있듯 순응주의란 역사의식이 사라지고 운명의 힘에 굴복한 정신이 귀의할 곳일 터이다.


이러한 순응주의와 리얼리즘의 시정신으로서의 현실주의는 물론 현저히 다르다. 현실주의란 '괜찬타'고 체념하지 않고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집요한 대응을 요구하는 시정신이기 때문이다. 시적 리얼리즘의 성취는 주체와 세계 사이의 긴장된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정당한 역사적 안목의 획득은 주체가 세계 현실에 대응하는 데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목일 것이다. 하지만 순응주의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역사적 안목을 거세한 데서 나오는 것이고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항복과 다르지 않다. 즉 『화사집』에서 볼 수 있는 리얼리즘의 가능성이 『귀촉도』 이래 사라져가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서정주의 시적 변모를 추진시킨 동인으로서의 순응주의에 있다고 생각된다. (주7)


미당 시에서 세속적 삶이 겪는 갈등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미당의 불교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삶의 무갈등성은 시집 『신라초』를 비롯, 『국화 옆에서』에 실린 시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 과정이 빠진 결과로의 초월! 윤회의 구체적인 과정이 아니라, 윤회의 결과가 시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시구가 유명한 시 「국화 옆에서」의 다음 같은 부분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주목할 것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이다. 이 구절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은 세속적 삶의 맥락과 그 과정의 구체성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 삶의 구체성의 부재를 알리는 시어는 '뒤안길'과 '인제는'이다. 즉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과정이 그려지기 전에 구체적인 맥락이 없이 '인제'의 결과만이 그려진다는 것인데, 주목할 것은 과정의 구체성 없는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가 불교의 인연설과 연결되어 표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와 같은 소위 미당 식의 삼세인연설이나 전생 윤회설이 내포되어 있는 시구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미당의 윤회적 세계관 나아가 신라 불교에 대한 이해의 속내용을 매우 적절하게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미당 시는 신라 불교를 발견하고 거기에 시의 정신적 바탕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과연 신라 불교가 저렇게 세속적 삶의 고통의 과정을 무시했는가. 잘 알려진 바대로, 원효 대선사는 저잣거리에서의 해탈, 중생선(衆生禪)에 도달하기 위해 정진했다. 미당이 발견한 신라 불교는? (주8)


어조의 차이는 있지만 서정주 시에서 엿보이는 순응주의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대체로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껏 비교적 긍정적으로 말해 오기는 했지만 사실 성취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히 있는 것이 서정주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방향성은 분명하며 그렇기에 그 한계도 분명합니다. 일제 말기에 쓴 「꽃」에서의 '벗이여 우리도 쉬어서 가자// 만나는 샘물마다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 볼 하늘을 보자'는 구절에서부터, 환갑 무렵에 쓴 「곡」에서의 '무력이여 무력이여 안으로 굽기만 하는/ 내 왼갖 무력이여/ 하기는 이 이무기 힘도 대견키사 하여라'는 구절에 이르기까지, 서정주는 삶의 고통을 비끼어 가는 방식을 작품 속에서 거의 일관되게 견지해 왔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고, 이 부정적 측면에 대해 아쉬움과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일 역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글들에서 피력된 비판적 견해는 이후 '미당의 시세계는 책임 없이 아름답다'(주9)고 말한 황현산 평론가의 글 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만 위의 글들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아쉬운 점은 서정주 문학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긍정적 측면을 너무 제쳐 두고 있지 않은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비판 의식 때문에 무리한 해석을 시도한 대목도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가령 그가 현실 세계의 고통을 무시하는 입장에서만 있었다면 자전적 내용의 시집을 두 권이나 쓰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끼어 가는 삶의 태도를 노래하는 것이 주를 이루면서도 그에 대응되는 현실 직관이나 도덕성을 의식하는 심사도 얼마간 들어 있는 것이 서정주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내세운 삶의 태도가 도덕성 추구 일변도의 우리 현대시에서 유례가 드물게 개성적인 것이며 이는 그 자체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여간 이제 서정주는 문학계에서 찬사와 비난의 양극단의 평가에 선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스운 이름이 되었지만 고은 시인의 두 편의 글은 이 점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70년대 초반에 씌어진 글인 「서정주시대의 보고」와 서정주 사후인 2001년에 발표된 글인 「미당 담론」은 서정주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위상을 각각 드러냅니다. 앞의 글에서 그는 문학사적 관점에서 서정주가 한국 시문학의 정부라고 추켜세우고 있지만, 뒤의 글에서는 반대로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기억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실언을 앞세운다. 서정주는 정부다. 그가 그의 당대에 보여주고 있는 비술적 카리스마와는 달리, 한국 시문학사는 그를 언어의 정부로서 논술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일이 문학사의 평면에 대해서 또는 그 자신의 불명예에 대해서 일종의 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필요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 1930년대로부터 1970년대로 서정주의 창조적 시제를 일단 설정할 때 그 기간에 만들어진 그의 문학적 업적은 적어도 그가 문학사 공간을 임의로 강점했다는 증거로 채워지고 있다. (주10)


1983년 모처럼 내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 어느 회합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만나지 않은 처지였다.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 내 입에서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한마디 대꾸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세상 떠나시면 가겠습니다." 한동안 그는 내 하반신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나도 돌아섰다. (…) 미당과 나와의 만남을 요청하는 매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런 노력들에 대해서 나는 서투른 열중쉬어 자세로 대하다가 미당 별세의 소식을 기자들로부터 들은 이틀 뒤에 빈소의 사진과의 대면으로 그와의 만남을 마감한 것이다.


미당 85세의 생애는 그가 생전 내내 자처한 '떠돌이'로 떠났으나 그와 반대로 그는 세상의 주인이고자 한 집착도 없지 않았고, 세상에는 그에 대한 평가와 맹신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의 규탄으로도 얼룩져 있어야 했다. 그런 것 이전에 김수영은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한 이유가 셋이었다.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 둘은 그의 늘어지는 서정성이었고, 셋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 (주11)


김수영 시인의 입을 빌려 말하긴 했지만 서정주에 대한 자신의 평가도 이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리라고 짐작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어조로 말한다면야 김수영의 시 역시 언어 감각이 거칠고 급진성을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주12)


2.


시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1983년, 『안 잊히는 일들』의 연재를 끝낸 서정주는 곧바로 전작의 연재처였던 『현대문학』에 새로운 시들을 연재하기 시작해 1984년 책으로 출간하는데, 이것이 바로 열한 번째 시집인 『노래』입니다. 이 시집은 앞서 선보였던 세 권과 비교해 보면 그 주제에 있어서 다소 결이 다릅니다. 세계의 풍물과 한국의 역사, 자신의 인생 편력 등 종전까지 독특하고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데 열중했던 시인은 이번에는 뜻밖에도 평범한 정형시 창작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전의 작업이 시의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 작업은 형식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그간 주로 풀어진 산문 스타일의 시를 쏟아내었던 것이 시인 자신으로 하여금 형식성에 다시 마음을 돌리는 쪽으로 가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서문에서 밝힌 것으로 보아, 시인은 이 시집 속에 있는 시들이 제목의 걸맞게 작곡의 대상이 되기를 목표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감상으로는 여기의 시들이, 작품으로서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노래로 만들어지기에는 무언가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정주의 시가 몇 차례 노래로 만들어지면서도 이 시들이 작곡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도 이 무언가 애매한 구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집은 '봄 노래', '여름 노래', '가을 노래', '겨울 노래'의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56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48편이 『현대문학』에 연재한 시들이고, 나머지 8편은 앞서 『질마재 신화』의 2부에 실렸던 열두 편에서 골라 실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질마재 신화』에 실렸던 열두 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을 거명하자면 「새벽 애솔나무」, 「2월의 향수」, 「매화에 봄 사랑이」, 「노자 없는 나그넷길」, 「초파일의 신발코」, 「단오 노래」, 「유둣날」, 「칠석」, 「무궁화에 추석 달」, 「국화 향기」, 「시월이라 상달 되니」, 「오동지 할아버님」으로, 발표 당시에는 각각의 시가 그 달의 감상을 시로 노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월령가 비슷한 스타일로 생각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여기에서는 계절마다 피는 꽃과 나무를 보면서 드는 산뜻한 마음을 그린 시도 있지만, 반대로 풍경에 실린 쓸쓸하고 아픈 심정을 노래한 시도 있습니다. 저는 이 중 후자에 속한 사례로 다음과 같은 작품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이

무엇이 남았는가 생각해 보네.

무궁화에 추석달 보고 또 보고

보고 보고 또 보고 생각해 보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이

어머님 거울 하나 생각해 내네.

무궁화에 추석달 보고 또 보고

보고 보고 또 보고 생각해 내네. (「무궁화에 추석 달」)


어머님이 끓여 주던 뜨시한 숭늉,

은근하고 구수하던 그 숭늉 냄새,

시월이라 상달 되니 더 안 잊히네.

평양에 둔 아우 생각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안 잊히네. 영 안 잊히네.


고추장에 햅쌀밥을 맵게 비벼 먹어도,

다모토리 쐬주로 마음 도배를 해도,

하누님께 하누님께 꿇어 엎디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암만 빌어도,

하늘 너무 밝으니 영 안 잊히네. (「시월이라 상달 되니」)


「무궁화에 추석 달」은 추석이 되었건만 가슴엔 공허밖에 남지 않은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시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무궁화와 그 위에 뜬 추석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으로 '어머님 거울' 하나가 있음을 생각해내고 있습니다. '보고'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는 시의 뒷 구절은 단순하지만 그가 얼마나 달을 바라보는 행위를 계속했겠는가를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시월이라 상달 되니」는 이북에 아우를 둔 채로 살면서 가을을 보내는 이를 화자로 설정하고 있는 내용의 시입니다. 실제로 서정주가 이산가족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정주의 동생 서정태 시인은 형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근년에 작고하기까지 이십여 년간 고창 형의 생가 근처에서 시를 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산의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를 살았던 누구에게나 절절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일 테고, 시인 자신도 적지 않은 친구들이 북으로 떠나 헤어진 처지였으니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노래』에서는 유독 분단의 슬픔을 노래한 시편이 몇 편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무르익는 시월이 되자 어릴 적 어머님이 끓여 주던 숭늉 냄새로 과거를 회상하다가, 자연히 북에 있는 그의 동생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빌어도 영 안 잊히기만 하더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잔잔하지만은 않은 여운을 남기게 합니다.


십여 년 뒤에 씌어진 다른 시편들 역시 크게 이 산뜻함과 쓸쓸함의 두 가지 분위기로 대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아홉 편의 시가 실린 '봄 노래'와 열네 편의 시가 실린 '여름 노래'에서는 대체로 전자의 분위기가 우위를 이룹니다. '봄눈 오는 골목에서 생각해 보니/ 사랑에 에누릴랑 못하겠습네./ 대밭 속에 둘이 숨어 싸각이거나/ 솔밭 속에 둘이 숨어 서성일망정/ 그 에누린 죽어도 못하겠습네!'라고 말하는 「봄눈 오는 길목에서」를 비롯해 「3월이라 한식날은」 「두견새와 종달새」 「진부령의 처갓집」 「비 오시는 날」 「구약」 「땡감」 「열무김치」 「불볕더위」 등이 그렇습니다. 이 중에서 세 편을 인용해 봅니다.


한밤중에 슬프게 목울음 우는

선운산 두견새에 그 까닭을 물으니

"서러워도 너이는 울 줄도 몰라

내가 대신 우노라"고 대답합디다.


이른 아침 하늘 높이 깔깔거리는

선운산 종달새에 그 까닭을 물으니

"너이는 어린애 때 웃음도 잊어

내가 대신 웃노라"고 대답합디다. (「두견새와 종달새」)


진부령 까치마을 우리 처갓집

찾아들어 한 사흘 편히 쉬구서

떠나려니 이슬비가 축축이 오네.

"더 있으라 이슬비가 저리 온다"고

장모님은 좋아라고 만류하시네.


"가라고 가랑비가 내리는데요."

내가 살짝 한마디를 건네었더니

"진부령서 제일로 미련한 곰도

그런 소린 않을 거다." 미소하시네.

진부령 처갓집에 있을 이슬비. (「진부령의 처갓집」)


감나무에 땡감이 열리어 있네.

이슬비가 그 우에 내려 뿌리네.

그 밑에서 애기가 오줌을 누네.

찌그만 풋고추로 오줌을 누네.

단군 할아버님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에 숨으셔서 웃고 계시네.

땡감 웃음으로 웃고 계시네. (「땡감」)


「두견새와 종달새」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와 기쁘게 우는 종달새는 울음과 웃음의 의미를 잃어버린 세속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진부령의 처갓집」에서는 이슬비와 가랑비의 어감을 대조한 언어유희가 산뜻한 분위기와 함께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풍경 곁에 단군할아버지가 '땡감 웃음'으로 웃고 계신다는 「땡감」 역시 매력적입니다. 애당초 스케일이 확보되지 않는 구성이라고 하겠지만 단순한 대로 시의 역할을 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이 시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결 명확한 뜻이 확고한 리듬감 속에서 전달되고 있어 노래로서의 시라는 목표를 잘 달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아홉 편의 시가 실린 '가을 노래'와 열네 편의 시가 실린 '겨울 노래'에는 후자의 쓸쓸한 성격을 지닌 작품이 조금 많아지는 편입니다. '저 구름 어디서 와 어디로 가나?/ 어디서 섭섭하게 떠나서 와서/ 어디를 또 찾으려 저렇게 가나? (…) 으스러지게시리 안고서 딩굴/ 그런 님이 어느 나라 어디메 있어/ 그렇게도 애달프게 찾아 헤매나?/ 안타까운 눈을 가진 하얀 구름아.'라고 말하는 「가는 구름」을 비롯해 「이 가을에 오신 손님」 「국화 향기」 「눈이 오면」 「기럭아 기럭아」 「겨울 소나무」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3.


시인의 나이 예순다섯에서 일흔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네 권의 시집을 써낸 서정주는 이후 속도를 조금 늦추어 3년 만인 1988년에 『팔할이 바람』을, 다시 3년 만인 1991년에 『산시』를 펴냅니다. 연작시 시절인 80년대를 전후한 동안 그는 그 밖의 자유시는 별로 발표해오지 않은 편입니다.


『팔할이 바람』은 『안 잊히는 일들』에 이어 시인 자신의 삶의 내력을 다시 한 번 작품으로 표현해 본 시집입니다. 이 시집은 서정주의 다른 시들과 비교해봤을 때 형식 면에서 극히 특이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한 편의 분량이 여타의 시들에 비해 훨씬 길고, 시의 호흡도 거의 완전히 분방하게 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가 워낙 심하다 보니 어떤 작품들은 심하게 말하자면 이게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보면 서정주의 시 중에서도 실험성이 가장 강한 작품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인은 이 시집의 표현상의 스타일과 관련하여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상재하게 된 졸시 『팔할이 바람』은 말하자면 자유시형 담시(Ballade)의 문장 형식으로 시험적으로 표현된 내 요약된 자서전으로서, (…) 이 장시에서 나는 내 어렸을 때부터 70의 고희에 이르기까지의 내 생애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들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시에서 형용 수식의 미가 아니라 행동들의 조화의 패턴이라는 것을 내 나름대로 여러모로 시험적으로 추구하여 이것들을 현대의 욕구 불만자들에게 참고로 제시해 볼 목적이었는데 이게 어느 만큼이나 그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을는지 그건 나로서도 미지수일 따름이다. 이것이 무엇으로건 우리 시의 한 매력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걸어 볼 뿐이다.


이 시집은 호사가 취향의 사람들에게는 일흔 이후의 노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것마냥 조롱조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시인의 이와 같은 표현으로 보아, 그가 단순히 노쇠 때문에 그런 표현 방식을 채택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왜 이 무렵에 들어 갑자기 이렇듯 철저하게 풀어진 문장으로, 또 극히 세부적인 상황 설명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시집을, 동어반복의 위험을 안고도, 굳이 발표한 걸까요? 제 생각에는 그것이, 그의 시에서 중기에 줄곧 지적되고 후기에 극복이 시도되었던, 현실 묘사의 구체성을 아주 극대화시켜 보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의 욕구 불만자들'은 당시 그의 반대파였다고 할 수 있을 리얼리즘 문학의 추종자들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인의 실험과 거기에 건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그의 실패작으로 이야기되며 또 그것이 맞다고도 생각됩니다. 그가 자전 이외의 다른 괜찮은 서사적 소재를 이 실험에 접목시켰다면 전반적인 완성도가 좀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52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팔할이 바람』은 장의 구분은 되어 있지 않지만, 청년기까지의 편력을 다룬 서른 편의 전반부와 해방 이후 노년기까지의 일화를 다룬 스물두 편의 후반부로 편의상 나눌 수 있어 보입니다.

나누어 본다면 앞의 서른 편은 청년기까지의 편력을, 뒤의 스물두 편은 해방 이후 노년기까지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시들은 동어반복의 혐의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천지유정』이나 『안 잊히는 일들』에서 느꼈던 정감을 어느 정도 다시 느껴볼 수 있는 면이 있지만, 후반부의 시들에서는 문장이 너무 풀어지는 바람에 다소 맥빠지게 읽히게 되고 만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시집의 전반부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초반부의 유년기 소재 시편들입니다. 세 편으로 된 「줄포」를 비롯해 일곱 살 무렵 천자문을 떼고 난 뒤의 아버지와 선생과의 뒤풀이를 그린 「사내자식 길들이기 3」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뒤 10대부터 20대 시절의 편력을 그린 시들 역시 「제2차 연도의 광주학생사건」이라든지 「노초산방」 「금강산행」 등에서 이미 보아 익숙하지만 재미있게 읽히는 정경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해인사에서」, 「제주도에서」와 같은 시들은 『화사집』 시절의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만주에서」, 「사립국민학교 교사」, 「아버지 돌아가시고」, 「일정 치하의 막바지 때」와 같은 시들은 일제 후반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시집이 일말의 눈길조차 얻지 못하면서도 여기서의 한 편만큼은 유독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친일 행위에 대한 심정을 소재로 다룬 「종천순일파?」입니다. 이 시가 사람들에게, 특히 서정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중반부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親日派)'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라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일본이 좋아서 한 일도 아니었고 일본에 빌붙어서 떵떵거리고 살려고 한 일도 아니었으니, 그저 식민지의 상황을 하늘의 뜻으로 체념하고 거기 순응해 살려고 한 일이었으니 '친일파'나 '부일파'라는 말보다도 '종천순일파'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근래에 그 문집을 읽은 기억 때문이지 조선 말기의 지사였던 수당 이남규가 생각났었습니다. 그가 을사늑약 직후 자결하기 전에 임금께 올린 마지막 상소에는 '이것이 정녕 하늘의 뜻이란 말입니까. 하늘의 뜻이란 말입니까.'라고 탄식하는 내용의 말이 등장합니다. '하늘의 뜻'이라는 같은 말로 표현하면서도 수당은 그 상황을 거부한 채 자결했고, 미당은 목숨을 위해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살아갔다는 것이 대비되는 장면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시의 내용을 두고 자신의 과오에 대한 시인의 감정이 너무 뻔뻔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저는 오히려 시인이 그것도 생각 안 하고 이 시를 썼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인으로서의 서정주는 낙제점일지 몰라도 시인으로서의 서정주는 단수가 엄청나게 높은 사람임을 염두에 두고, 이 시의 어조가 친일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다른 산문인 『천지유정』이나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에서의 어조와는 애당초부터 사뭇 다르다는 점을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컨대 그는 반성을 적게 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시 속에서 의도적으로 내비침으로써 오히려 독자로부터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메타적 시선인 셈입니다. '종천순일파?'라는, 물음표를 붙인 시의 제목 자체가 이 시를 읽는 이들이 시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담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점은 제목에서도 그 단서가 엿보이고 뒤에 실린 그 1944년의 영문도 모르고 잡힌 일화를 다룬 시 「다시 걸린 독립운동 혐의」의 희화화된 제목에서도 엿보이는 것이지만, 발췌 인용이 많이 되는 탓에 잘리기가 일쑤인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간취됩니다. '서울 용산 주둔의 일본군 사단이/ 김제 만경평야 일대에서 전쟁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어느 휴식 시간의 어느 귀퉁이 풀밭에서던가/ 같이 종군해 있던 최재서 씨가/ 문득 내 목을 끌어안고 딩굴며 울던 일은/ 지금도 눈에 역력히 보이는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무슨 소설 속의/ 심리 이얘기를 하고 있던 판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었다.'


문학에 관심이 적으시다면 생소하실 수도 있겠지만 최재서는 이 무렵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939년 문예지 『인문평론』의 창간을 주도했지만 두 해 만에 일제로부터 어용 일문(日文) 잡지로 바꿔라, 싫음 때려치든지, 하는 압박이 거세지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따르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문학』입니다. 서정주도 여기에 친일적 성격의 글을 몇 편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다소 한심해지고 만 자신의 처지가 억울해서 울었겠지만 화자인 시인은 '눈물도 나지 않았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체념의 정도가 컸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양심에 치미는 바가 적었다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역시 작게나마 시인 스스로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저는 서정주가 위의 구절과 같은 생각을 안 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정확하고도 싱거운 해답은 그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 안 하기도 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정주의 텍스트가 도덕적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의 구절과 같은 진술이 그의 솔직함을 최대한으로 보여줄 만한 방식이라고 시인이 판단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점에서 「종천순일파?」는 서정주 특유의 다소 발칙한 솔직함을 극대화시킨 시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만약에 서정주가 정말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과오를 주제로 다룬 시를 쓸 때,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빌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하지만 시인 자신이 어느 때보다도 '정말'을 이야기하는 자리라고 말했던 여기에 와서는 가장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 속의 모습이 시인 자신이기 때문이기보다도, 시 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팔할이 바람』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힌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6.25 이후 암담했던 피난 상황에서부터 점차 심경의 안정을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대목들입니다. 「1950년 겨울 북괴와 중공 연합군 대거 침략의 때까지」, 「전주 풍류 일 년간 1」, 「전주 풍류 일 년간 2」, 「광주에서 1」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이 중에서 두 편으로 된 「전주 풍류 일 년간」을 인용해 봅니다. 안 그래도 긴 시를 두 편이나 이어 붙여 놓는 게 괜찮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 편만 떼어서 인용하기도 애매한 구석이 있어 그냥 전문을 인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시는 1951년 초 전주로 피난 갔을 무렵의 일들을 그린 작품으로, 1장에서는 전주고등학교에 교직을 얻은 일과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총살 직전의 상황에서 겨우 풀려난 일, 2장에서는 좌익으로 몰리게 된 신석정 시인의 신변을 구하는 데 협조한 일과 자살미수 소동을 벌인 일이 그려져 있습니다.


1


좋은 자연과 인정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풍토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전주에 어느 만큼의 연줄을 바라고

큰 세간들을 서울에 놓아둔 채

트럭에 실려 이리까지 온 우리-

과부된 처이모와 두 딸, 그리고 우리 내외와 내 아들 승해는

이리→전주 90리길은 조랑말 마차에 보따리들을 싣고

터덕터덕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로 해서

전시의 답답한 우리에게 산보의 여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늘 우리를 따라 우아하게 굽이치며 우리를 위로하던

주위의 고운 산둘레들의 덕도 톡톡히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중에 해가 저물어

삼례라는 곳의 마부집에서 호롱불과 함께 밝힌 하룻밤이

조랑말이 발굽을 구르며 콧소리를 하는 것이 밤내 잘 들리던

그 고전적이고 풍류적인 하룻밤을 나는 잊을 길이 없다.


거기다가 이튿날 해돋이에 우리가 도착해본 대장촌(大場村)-

정말로 아름다운 처녀들의 눈썹의 연속처럼

곱게 곱게 뻐쳐 있는 산맥의 묘경을 눈여겨서

찾아와 내려 첼로 소리로 모든 것의 가슴을 울리는

수만 마리의 기러기들의 집산지인 그 대장촌에 들어섰을 때에는

우리의 이 보행을 나는 아! 소리쳐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구러 전시의 살 맛도 만드는 것인가?


저주에 들어가자 나는 시우(詩友) 이철균과 하희주를 만나

그들의 교직이 있는 전주 고등학교에 국어 교사 자리를 구했더니

대장촌의 그 기러기들의 첼로 소리 영향인지

교장 유청 씨의 호의로 재깍 그 한자리가 차례가 와서

삼례 마구간의 조랑말이나

대장촌의 기러기만큼은

팔자가 그만 괜찮게는 되었지.


그러나 이 팔자의 풍류라는 것도

늘 첼로의 태평한 소리 같기만 한 것도 아니니

내가 전주 고등학교에 선생자리를 얻어 놓은 다음에

정읍의 처가에 좀 쉬러 갔다가 당한 일 그것은 또 꽤나 위험한 일이었네.

2월 어느 날의 으시시 치운 해질녘

나는 한복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처가집 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데

때마침 이 곳 여고에 선생으로 있던 내 청소년 때 친구 한태석이가

"잘 된 밀주를 금방 개봉했으니 어서 와서 자시게" 하는

쪽지를 인편에 보내어

나는 입고 있던 한복에 오바코트만 걸치고 가서

밤이 꽤나 깊을 무렵까지 그걸 고래 물마시듯 마시고 있었는데

여기서 돌아가는 어두운 길에서 나는 헌병의 불심 검문에 걸렸으니,

이 때 여기는 내장산의 좌익 빨치산들이 밤에 출몰하는 일이 있어

비상 계엄령 치하였는 걸

나는 취중에 그것마자 깡그리 잊고 흐느적흐느적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주민등록증까지도 벗어둔 양복 저고리에 넣은 채 잊어버리고 나온 터라

이것의 제시에 내가 속수무책이 되자

헌병들은 “이 새끼 빨치산 앞잡이구나!” 하며

나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총대로 마구잡이로 후려갈기며 또 군화로 차고 밟았다.

나는 그저 얼얼하고 먹먹해 있었는데

그들은 다시 나를 일어세워

두 헌병이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 서자

그 상사인 듯한 사람이 저만치에서

"너희들 그 자를 냇가로 끌고 가 즉결로 그만 처치해 버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두 헌병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너무나도 허망하게 총 맞아 죽으러 가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도 오실 수 있는 건 역시 천우신조라

그 두 헌병 중에 하나가 인정이 두터운 사내여서

"그래 영감아 잘 생각해 봐.

이 정읍 천지에 영감을 보증할 만한 유력자가 하나도 없어?"

물어주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이 곳 경찰서장도 나와는 중학 동창이기도 해


그걸 더듬더듬 말했더니, 재깍

이 말의 사실 여부를 밝히는 확인 과정을 거쳐

비로소 또 한번 나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네.

운수는 좋았지만, 이 날밤 얻어맞은 덕으로 나는 뒤에

만성늑막염 환자가 되어 여러 해를 앓았지.


2


전주 고등학교에서의 수업은

오전만 하기로 하고,

대우는 교감과 동격,

나는 여기 있는 동안에 이 학교 교가도 새로 지었고,

1950년 6.25에 전몰한 이 학교 출신의 학도병들을 위해

교정에 세운 충혼탑에는

해공 신익희 씨 글씨로 탑명(塔銘)의 글도 지었다.

나는 또 당시의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의 전북 지부장이기도 했던 관계로

전주 시민을 위한 여러 연설장에도 나갔고,

이 곳 전시 연합대학에서도 가람 이병기 선배와 함께

강좌도 가졌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보다도 내게 더 안 잊히는 일은

체포되면 죽게 된 시인 신석정 씨를 살려내는 데 일조가 되었던 일이다.


1951년의 3월인가 4월의 어느 날이던 것 같은데,

이 때 전북일보의 주필이었던 내 대학생 때의 동기생 오명순 군이

북노송동의 내 숙소로 숨이 턱에 차 찾아와서 하는 말이

"부안 신석정의 마음이 좌익이 아닌 건 자네도 알지?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난 여름의 북괴 남침 때

부안에 별 인물이 없는 관계로 강제로 뽑히어 그 곳 군인민위원장이 되었다나.

그래 우리 국군이 수복해 오자

어쩔 수 없이 변산 속으로 빨치산들을 따라 들어갔었는데

가족들 생각에 얼마 전에 그 곳을 빠져나와

부안에서 숨어다니다가 안 되게 생기니

지금은 여기 전주에 숨어들어 나한테 도움을 청하고 있네.

자네가 들면 살려낼 길이 있는데

어떻게 하려나?" 하는 것이었네.

"어떻게?" 하고 내가 물으니

"이 곳 대한청년단 전북지원장겸 태백일보 사장 손권배 씨는 자네도 잘 알지?" 해서

내가 "이름만은 알지" 하니

"아직 면식이 없더래도

그 사람이 익히 자네를 알고 존경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나하고 같이 찾아가서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대로만 하면 돼.

손권배 씨더러 먼저 신석정의 본심이 좌익이 아닌 걸 책임진다고 하고,

그 다음엔 그 사람의 태백일보에

신석정 작의 대한민국 예찬시를 한 1주일 연재시키라 하고

고 다음에는 그 태백일보의 편집고문의 하나로 사령 광고만 내달라고 하게.

손권배 씨는 지난 해 여름의 북괴군 전주 점령 때

그의 단원들로 우익 빨치산을 꾸며 산 속에 숨어 살면서

이 곳 북괴군 진지를 박살내기도 한 용사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도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이 전주에서는 그를 거역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미당 알겠나?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어서 가세!"

그는 이렇게 주장하며 내 팔을 잡아 일어세우는 것이었네.


그래 우리 둘이는 어린애들처럼 모처럼의 신바람을 내서

오명순의 안(案)대로 해본 것이 들어맞아

우리 시인 신석정은 이 때 말로 즉결이라는 것의

그 고배를 면할 수가 있었던 걸세.

어허허허!


그러나 나 미당 이 사람으로 말하면

2월에 헌병들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속으로 곪느라 그랬던지

늘 속이 아프고,

길가에 새로 돋은 풀잎들이나

그 곁에 있는 어린것들의 웃음에는 서글픈 대로 공명은 하면서도

더 사는 것이 영 귀찮기만 해

아조 조용한 적멸 속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5월 어느 날인가의 저녁때엔

이 때 마침 내게 있던 학질을 핑계로

그 치료제인 극약 '데라보르'든가 하는 것 100알들이 한 병을 구해

그걸 몽땅 한꺼번에 다 먹어 버렸네.


이것 열 개 이상은 치사량이라 했으니

다섯 사람쯤이 적침(寂沈)에 잠길 만한 부유한 복용이셨지.

거기다가 이건 자살이 아니라, '빨리 나으려고 많이 먹은'

실수로 하기 위한

거짓말을 내게 끝까지 시켜야 했으니

정말 못나고도 또 못난 일이었지.


허지만 이걸로도 나는 죽을 팔자는 아니라

내가 음독하자 이내 시우 이철균이 쫌맞게 찾아와

이 근방에 살던 그의 친구 의사를 곧 데려와서

물과 토재를 몽땅 먹여 나를 우아래로 토해 내게 해

진달래꽃 빛의 많은 것을 나는 토하고

죽음을 그 한걸음 앞에서 또한번 면하게 되었네.

그러고는 꽤 오랫동안 나는 기억상실의 몽롱한 안개 같은 의식 속에 잠겨 지냈네.


전쟁 속에서의 급박함과 절망감을 몇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담아내고 있는 시입니다. 장면을 그리는 사실적이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가 돋보입니다. 피난길에 바라본 자연에서 살 맛을 다시금 느끼는 첫 장면이나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도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는 마지막 장면은 시인의 실제 행적과 일치하는 것이기에 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시에서 언급되는 '길가에 새로 돋은 풀잎들이나/ 그 곁에 있는 어린것들의 웃음'은 「무제」에서 소재로 다뤄진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시인 자신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동료 시인의 죽을 고비도 넘기는 데 일조한 중간 부분의 장면 역시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전쟁 속에서 정치 역학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느낄 수 있는, 어찌 보면 르포에 가까운 삽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시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여럿 등장합니다. 국군에 동참하면서 이른바 부역 문인 처단 심사위원장이 되었을 때 전원 무죄 처리를 한 일이라든지, 동료였던 구상 시인에게서 트럭에 실려 총살당하러 가던 지인을 구해준 이야기를 들은 일 등이 그렇습니다.





1) 이경철, 『미당 서정주 평전: 더 없이 아름다운 꽃이 질 때는』(은행나무, 2015)에서 재인용.

2) 이 무렵 진보적 정치관과 친북 성향을 연결지어 생각하고 있었던 서정주의 정치 인식에 대해서는 80년대 후반 그가 창간을 주도했던 문예지 『문학정신』에 게재한 권두언들이 참조됩니다. 『나의 시』(전집 11권, 은행나무, 2017) 참조.

3) 이경철, 위의 책에서 재인용.

4) 「미당 탄생 100주년, 문학적 자산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5)」, 『전북일보』(2015.9.1.) 참조.

5) 「미당 서정주 병석 인터뷰」, 『중앙일보』(2000.10.30.) 참조.

6) 오세영, 「미당과 그의 시대」, 『왈패 이야기』(화남출판사, 2003).

7) 최두석, 「서정주론」, 『시와 리얼리즘』(창작과비평사, 1996).

8) 임우기, 「미당 시에 대하여」, 『그늘에 대하여』(강, 1996).

9) 황현산, 「서정주의 시세계」, 『말과 시간의 깊이』(문학과지성사, 2002).

10) 고은, 「서정주시대의 보고」, 『서정주연구』(공저, 동화출판공사, 1975).

11) 고은, 「미당 담론」, 『창작과비평』(2001년 여름호).

12)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서정주와 김수영은 생전에 서로에 대해서 논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서정주의 전집에는 김수영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없고, 김수영의 전집에는 서정주에 대한 언급이 시 월평에서 한 줄씩 두어 번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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