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시전집 강독 18: 『안 잊히는 일들』에서 네 편
한국사의 일화들을 주제로 한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를 다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아쉬움의 하나는 근대 이후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시인이 전근대의 삶의 모습에 경도된 나머지 오늘날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 시집의 다음 작업으로서 자신의 인생 편력으로 시선을 옮기게 됩니다. 1981년, 전작의 연재를 마친 서정주는 다시 곧바로 문예지 『현대문학』에 자신의 삶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이나 장면들을 소재로 한 시들을 연재하기 시작해 1983년 시집으로 출간하는데, 이것이 그의 열 번째 시집 『안 잊히는 일들』입니다. 시집은 시인의 나이 순서를 따라 1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92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서정주는 '인생의 간절한 것들'을 추구하는 자세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런 만큼 그에게 있어 근현대사의 정리는 객관성을 추구하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작업은 그 점에서 필연적이고도 절묘합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신이 겪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최대한 개인사의 흐름 안으로 집어넣어 설명하고자 하며, 특정 사건에 대한 후대인의 통념에 구애되지 않는, 증언자만이 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기억을 덧붙여 줍니다. 가령 고등학생 시절에 참여했던 광주학생운동이나 중년 시절에 맞닥뜨린 4.19에 대한 증언이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합니다. 그의 이러한 시선은 역사가 개인사적인 기억과 집단적인 기억의 집합체임을 말해 주며, 특히 집단적인 기억이란 것이 객관성의 명제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히 중층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시선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말솜씨가 그와 착 맞붙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록적 가치에만 집중했다면 기록이야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집은 되지 못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안 잊히는 일들』에는 화자의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의 지난 시절의 한 장면을 절묘하게 포착한 작품이 적지 않으며 그 점에서 다소 저평가된 시집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유종호 평론가는 가령 유년 시절 서당에서의 한 장면을 그린 「당음(唐音)」이라는 작품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절의 한 기억할 만한 순간을 안 잊히는 언어로 정지시켜 놓고 있다. 미당이 아니었다면 소망(消忘)의 건너편으로 떠내려갔을 문화사의 한 국면을 비끌어매어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안 잊히는 일들』이란 시로 된 자필 이력서는 허술하지 않은 무게를 가지게 된다. (주1)
한편으로 시집의 매력을 덧붙여주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멋있기보다도 우습게 그린 듯한 시인의 독특한 어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서정주 자신의 진솔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 유종호 평론가의 언급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 잊히는 일들』의 매력은 기탄없는 자기 토로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도 털어놓고 있는데 절묘한 자기 희화적 어조가 어울려 감칠맛나는 글이 되어 있다.'(주2) 개인적으로 서정주의 시의 큰 매력이자 미덕의 하나가 바로 이 진솔함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시집의 첫째 단락인 '유년 시절'과 둘째 단락인 '만 아홉 살에서 열두 살까지'에는 각각 여덟 편씩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보았던 광경들을 그리고 있는 이 시들은 어떤 사건을 다루기보다도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어, 말 그대로 안 잊히는 과거의 모습들을 그림 그리듯이 보여줍니다. 「마당」, 「개울 건너 부안댁 감나무」, 「당음」, 「내 할머니」, 「처음 본 꽃상여의 인상」, 「만 십 세」, 「서리 오는 달밤 길」, 「첫 질투」, 「반공일날 할머니집 찾아가는 길」 등의 작품들이 인상적인데, 이 중 앞에서 언급한 「당음」을 인용해 봅니다.
"아미산월가라
아미산월이반륜추하니
영입평강강수류를……"
일고여덟 살 또래의 우리 서당 패거리들이
여름 달밤 그 마당의 모깃불 가를 돌며
요렇게 병아리 소리로 당음을 합창해 읊조리는 것은
고것은 전연 고 의미 쪽이 아니라
순전히 고 뜻 모를 소리들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이턴, 모깃불의 신바람에,
달밤에 우리 소리를 울려 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이뿐 눈썹' 같은 거니 뭐니
고런 생각일랑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시골 서당의 한 장면이 보지 않았어도 어렵지 않게 그려지는 시입니다. 몇 안 되는 행 속에 그 모습을 생생하게 잡아놓고 있어 당시 사회 풍경의 구체적 재현이라는 측면에서도 소중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뒷날의 시인 행로의 예감은 전혀 느끼지 않은 채, 한시를 외면서 그 내용보다도 '고 뜻 모를 소리들의 매력'에 끌려가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집니다.
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는 3장 '만 열세 살에서 열여섯 살까지'에서는 점점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는 소년 시절의 모습이 주로 담겨 있습니다. 「중국인 우동집 갈보 금순이」, 「광주학생사건에 1」, 「아버지의 밥숟갈」, 「혁명가냐? 배우냐? 또 무엇이냐?」 등의 시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시들에서는 성이라든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눈뜨기 시작할 무렵에 그가 벌이곤 했던 치기 어린 행동들이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일들을 다룬 일련의 시들은 그가 중학교 퇴학, 고등학교 권고자퇴라는 이력을 갖게 만든 경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중 「광주학생사건에 1」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시선에서 겪었던 당시의 진압 현장이 어떠했는지를 짧고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1929년 11월 어느 날/ 광주학생사건이 서울에서도 불붙어 일어났을 땐 (…) 조선총독부 앞까지 오니/ 기마경찰대는 우리를 양 떼처럼 에워싸 몰고 갔는데,/ 경찰서 마당에 우리를 모아 세워 놓고는/ 하나씩 따로따로 방으로 끌고 가서/ 웃통을 셔츠까지 두루 다 벗기고/ 가죽 채찍으로 일률적으로 열댓 번씩 되게는 갈겨 댔었지./ 그러구서 우리 많은 졸개들은 풀어 내주었지만/ 그 뒤 여러 날을 두고 그 맞은 자리가 아파서/ 밤자리에서도 반듯이는 눕지 못하고/ 약이 올라 혼자서 종알대고 있었지/ "백정놈의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고……'
퇴학 이후로도 소년기의 일탈의 이력은 몇 해를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경도되어 빈민의 삶을 체험해보겠다고 집을 놔두고 빈민촌에 들어가 살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돌아오기도 하고, 상해에 가서 혁명가가 되어 보겠다고 아버지의 돈 삼백 원을 훔쳐 달아났다가 싱겁게 돌아오기도 합니다. 노년기의 시인은 그때의 자신이 불효자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절 자신의 불효의 탓을 어린 치기에 크게 돌리고 있지만, 그 속에는 또 시대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기도 합니다. 항일 운동에 참여한 죄로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출소한 날, 집으로 들어오는 자신을 본 아버지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힘없이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며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는 내용의 「아버지의 밥숟갈」의 장면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4장 '만 열여덟 살에서 스무 살까지'에는 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방랑의 행적이 계속되던 시기의 서정주의 모습이 다뤄지고 있는데, 「얼어붙는 한밤에」, 「석전 박한영 대종사의 곁에서 2」, 「금강산으로 가는 길 1」 등의 작품이 기억에 남습니다. 앞에서도 이름을 몇 번 언급한 바 있는 승려 석전 박한영은 서정주에게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을 주선하는 등 한창 방황하던 시기의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장에서 특히 재미있게 읽혔던 것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 1」을 비롯한 일련의 금강산행 시편들이었습니다. '석전스님더러/ "금강산에 가 참선을 해보겠습니다." 하니,/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웃으시며/ "금강산 구경이겠지? 다녀서 오게." 하고,/ 그가 신던 편리화를 내게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아마 삼천대천세계로였겠지/ 잠시잠깐만 외면하시더니/ "걸어서 가는 게 썩 좋겠구만." 하고,/ 씨익 또 한번을 웃었다.' 그는 갖은 고생 끝에 목적지였던 영원암에서 만공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장면의 묘사가 아주 특이합니다. 만공은 뒷날의 비유로 맥아더 장군을 연상케 하는 큰 체구에, 화려한 꽃밭 속에서 아리따운 여승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해집니다. 스님을 만난 그는 승려답지 않은 것만 같은 그 화려한 모습에 그만 머쓱해져 하루 만에 그곳을 떠나가게 됩니다. 이는 일견 그를 부정적으로 그린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지만, 계속 읽다 보면 오히려 만공이 도통한 사람 같고 당시의 시인이 꽉 막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5장과 6장인 '이십 대 시편'에는 총 열여섯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정주는 등단을 하게 되면서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고, 또 혼인하여 아이를 갖게 되는 등 점차 안정적인 생활을 정착시킬 수 있게 됩니다. 5장에 실린 시들에는 30년대 후반 시인으로서의 방황을 아직 겪던 시기의 모습을 그린 것들이 여럿 있는데, 가령 「ㅎ양」, 「우리 시인부락파 일당」, 「나의 결혼」 등이 그렇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독특하게 다가오는 작품은 「ㅎ양」입니다. 시집에서 이례적으로 사건이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시편에 해당합니다.
실버들 늘어진 네 갈림길에서
이뿐 암여우가 둔갑하여
"아이갸나!" 튀어나오는
아지랭이랄까? 그 허리의 사향주머니랄까?
그때 성황당에 걸어논 비단 헝겊이랄까?
나는 선잠에서 깬 어느때부턴지
바람 불 때마다 싸아한
여기 말리어 헤매다니고 있었다.
여러 달밤이 이울 때까지
전신주처럼 서서 울며
또
양말 뒤축이 다 빵꾸나도록
이 도량 안을 헤매다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풀려나기 비롯한 것은
내 빵꾸난 양말의 발꼬린내에
그네가 드디어 못견디어서
양말 안 빵꾸나는 사내에게로
살짝 그 몸을 돌려버린 그때부터다.
이 시는 가령 「사십」과 함께 서정주의 대표적인 짝사랑 시편이라 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사실은 『화사집』 시절의 치기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시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빵꾸난 양말'의 에피소드는 청년 시절의 다소 추레한 짝사랑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임이 거의 분명한데, 이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습니다.
그 여자는 나처럼 문학소녀였고, 일본 유학의 대학생이었고, 또 전라도의 한 고향 사람이었는데, 이런 여러 가지 같은 점을 떠나서 나와 다른 것은 언제나 선택한 여성 앞에 내가 못난이였던 데 비해 이 여자는 모든 남자 앞에 두루 잘날 수 있는 사람이었던 일인 것 같다. 이 여자는 자기만이 그럴 뿐 아니라 남자도 또 어디서나 잘나야 하는 남자만을 골라 데불고 다녔다.
나는 기름때가 번지르한 껌정 세루의 학생 정복에 발뒤꿈치를 기운 양말을 신고 이 여자의 하숙을 찾아가서는 우두머니 장승처럼 서서 이 여신을 질투하고 사랑했지만, 말은 영 한마디도 하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몇 줄의 연애편지라는 걸 써 놓았는데, 그건 '나는 당신의 옷고름 하나에도 감당하지 못할 버러지 같은 겁니다' 어쩌고 한 그런 것이었던 듯하다. 김동리가 마지못해 이걸 갖다가 전하긴 한 모양인데 물론 한마디의 대답도 오지 않았다. (…)
그것이 몇 해 뒤, 1941년이던가, 내가 아버지의 고르신 처녀를 얻어 결혼해서 큰아이를 낳아 데불고 아내와 함께 잠시 고향 집을 다녀서 상경하는 열차 속이었는데, 거기서 우연처럼 딱 그 여자와 만났다. 그래 잠깐 인사말을 나누곤 헤어져 우리 세 식구는 사뭇 딴 자리에 앉아 갔는데, 서울역에 내려 밖으로 나오자 여자는 자기와 동행하던 딴 여인을 시켜 내게 한 초청의 뜻을 전했다.
"모월 모일 개성을 한번 가 보고 싶은데 무엇하시면 동행하시라구요."
나는 왜 그랬는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바로 거절했다. (주3)
시의 전반부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짝사랑에 빠져 있던 때의 감상적이고 치기 만만했던, 그러나 딴에는 진지했던 심정입니다. '여기 말리어 헤매다니고 있었다'에서의 '말리어'는 휘말린다는 의미인데 뒤의 '빵꾸난 양말'의 직설적인 어감 때문에 양말 같은 것을 바람에 말린다는 뜻으로 헷갈릴 수 있습니다. 짝사랑에 눈이 멀어 치기 어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일견 낭만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만큼 그의 가치관이 미성숙해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짝사랑의 대상이 '양말 안 빵꾸나는 사내에게로' 몸을 돌린 것을 본 화자는 점차 자신이 홀려 있던 마음속의 '도량'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감상적인 짝사랑의 실패의 충격은 시인의 정신적 성장을 가져다주는 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 이후 40년대 초반의 풍경이 담긴 6장에서는 「장남 승해의 이름에 부쳐서」, 「만주에 와서」, 「기우는 피사탑 위에서」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 시들은 일제 말기 당시의 팍팍했던 삶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가령 「장남 승해의 이름에 부쳐서」에서 첫째의 이름을 지었을 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추 달린 녀석이 생겨났기에/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른 대로/ '승해(升海)'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지./ 바닷물을 됫박으로 품고 있으란 것이지.// 옛날 옛적에 어리석은 사내는/ 바닷속에 구슬을 빠뜨리고는/ 그것을 되찾아 낼 목적으로서/ 됫박으로 바닷물을 품고 있었다는데,/ 내 자식도 그 방법밖에 더 묘수는 없을 것 같애/ 꾸준히 그 바닷물을 품고나 있어 보라고/ 메주 같은 생각으로 붙여 놓은 것이지.'
바닷물과 됫박의 비유는 앞서 「무제」 등의 시에서도 쓰인 바 있습니다. 갓난아기 자식을 보면서 이 아이도 됫박으로 바닷물을 퍼내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의 저변에는 궁핍했던 삶의 비참함이 깔려 있습니다.
시집의 7~8장인 '삼십 대 시편'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1945년의 해방에서부터 6.25 전쟁 직후인 50년대 초반까지에 해당합니다. 7장에서는 「해방」, 「인촌 어른과 동아일보와 나」, 「3급 갑류의 행정 서기관이 되어서」 등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시인이 해방 직후 동아일보 문화부에 발탁되어 일하던 일,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문교부에 지원해서 예술과장으로 일하게 된 일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8장에 실린 「1950년 6월 28일 아침 한강의 다이빙」, 「청산가리밖에는 안 남아서요」, 「생불여사」, 「자살미수」와 같은 작품에서는 전쟁 직후에 시인이 겪었던 일들이 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 시들은 전쟁의 비참한 실상을 간결하면서도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한강의 다이빙」에서는 전쟁 발발 직후 서울에 살던 세 사람의 시인이 피난을 가기 위해 겪었던 일 한 가지가 이야기됩니다. '김일성 두목의 명령일하에 이 나라는 쑥대밭이 돼/ 피란 농부들은 소를 몰고 서울 남대문로를 누비고,/ 이승만 대통령 각하 일행은 한강 인도교를 건네/ 한밤중에 모조리 남으로 뺑소닐 치시고, (…) 그리하여 1950년 6월 28일 아침에/ 조지훈이와 이한직이와 나는/ 원효로 4가의 어느 절벽 우에서/ 저만큼 떠 있는 배들을 바래고/ 이판사판 메뚜기처럼 강물로 뛰어내렸는뎁쇼./ 허허이! 뭐니 뭐니 해두/ 이런 때에 쓸 만한 건 그래두 그 용기라는 것이드라구./ 하여간에 요로코롬 하구서야 겨우/ 그 배라는 것도 하나 잡아타긴 타고,/ 남으로의 뺑소니 대에 한몫 끼일 수나마 있었으니깐드루!'
더 충격적인 시편은 「청선가리밖에는 안 남아서요」입니다. 국군의 종군 문인단에 속해 있던 시인 일행은 만일을 대비해 복용할 독약을 좀 나눠 달라고 정훈국에 요청하는데, 좀 덜 독한 약들은 이미 시민들이 다 사가 버려서 없고 제일 독한 청산가리만 남았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고비에 놓여 있었던 전쟁의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9~10장인 '사십 대 시편'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9장에 실린 「미국 아세아재단의 자유문학상」, 「미아리 서라벌 시절」 등의 시들은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이후 시인으로서의 생계도 안정되어 가면서 문학상도 받게 되고 대학교수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기도 하던 무렵의 심정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60년대 초반의 일들을 다룬 10장에는 「1960년 4월 19일」, 「횡액」,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만득지자와 수의 계산」 등의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첫 번째로 실린 「1960년 4월 19일」은 4.19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고,
혹시 모르니
오늘은 각별히 조심해라."
1960년 4월 19일 아침
나는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안해
내 큰자식 승해의 대학 등굣길에
이렇게 간절히 당부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날 경무대로 몰려가던 학생 데모대의 선봉은
돌연한 발포로 죽기도 했는데,
내 아들은 그 도중에서 내 당부가 생각나
통의동 골목으로 새어 살아왔대나.
시(是)보담도 비(非)보담도 무엇보담도
이것 하나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시에서 특이하게 다가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인의 관점일 것입니다.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4.19를 글의 소재로 다룬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의 정신 혹은 당위성을 노래하게 마련일 텐데, 시인은 그와는 다르게 순전히 청년 아들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봅니다. 무자비한 발포의 위험 속에서 무사히 돌아온 자식을 보고 그는 시비를 가리는 일보다도 이 점 하나만큼이 우선 다행이었다고 안도하는 것입니다.
정치 성향에 따라서 이것을 일견 이상하게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시에서의 화자와 같은 입장이라면 당연히 들 수밖에 없는 생각일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은 이 시를 잘 해설해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이 시로서 살아나는 것은 마지막 두 줄 때문일 것이다. '시보담도 비보담도 무엇보담도/ 이것 하나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다.' 형식면에서 시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대목이지만 작품의 의미도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굳이 밝히기를 꺼리는 사사로운 일과 실감을 기탄없이 털어놓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그 솔직함이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른바 '소시민 근성'을 공격할지 모르지만 자식의 안전한 귀가가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는 실감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그러한 실감은 독자의 나이에 정비례할 것이다. (주3)
10장에 실린 또 다른 독특한 작품은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입니다. 처자식을 둔 지 오래인 40대 후반의 나이에 짝사랑하는 여성이 나타났을 때의 대처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입니다.
연애지상주의파의 한 노처녀가
사내인 그대의 사십 대 후반기쯤에 나타나서
"나는 줄곧 당신을 혼자서 사모해 왔거던요."
한다면,
그러고 또 그대가 이미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라면,
이거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지?
'너 좋알라 나 좋알라' 받아들여서
사람들 눈 피해서 붙고 노는가?
아니면 '참어라 참어라 참어라' 하며
멀찌감치 피해서 비껴 살아가는가?
우연처럼 참 우연처럼 꼭 한 번
내게도 이 시험이 사십 대 후반엔 왔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침묵함이 좋겠다.
'너 좋알라 나 좋알라'였대면
욕과 팔매질이 뒤따를 게고,
'참으세요 참으세요' 권면했대도
"짜식 참 되게는 깨끗한 체라고……"
어쩌고저쩌고 믿지도 안 할 테니……
공자가 이 경우에 써먹으시던 말씀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그거나 습용하며 침묵함이 좋겠다.
마지막 연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는 『논어』의 옹야편에 실려 있는 한 일화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음탕하기로 유명한 한 귀족 집안의 여성과 대면하고 왔다는 소식이 들려와 그의 제자 한 사람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공자는 그에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시인은 이 말을 묘한 뉘앙스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여인의 프러포즈를 받아주었는지 물리쳤는지의 여부에 관해 그는 침묵이 최선의 답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매우 특이한 관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할 텐데 말이지요. 아마도 시인은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하는 것도 싫지만, 이를 굳센 태도로 보여주는 일 역시 왠지 모르게 싫어지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은 능글맞게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고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는 가령 「봄볕」이나 「정말」과 같은 시에서 쓰인 바 있는 참말의 문제를 다시금 참신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시집의 11장과 12장인 '오십 대 시편'에는 총 열두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단락 이후의 시들을 보면 대체로 중년의 부드러운 시선에서 본 삶의 풍경들이 그려져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공덕동 살구나뭇집과 택호-청서당」, 「울산바위 이얘기」, 「김칫국만 또 마셔 보기」, 「사당동과 봉천동의 힘」, 「꿩 대신에 닭」 등의 시가 기억에 남습니다. 가령 막내아들을 데리고 설악산 여행을 가저 울산바위 전설을 들려주는 「울산바위 이얘기」라든지, 나이 든 아내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꿩 대신의 닭」과 같은 작품은 따뜻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집의 마지막 단락인 13장 '육십 대 시편'에는 여섯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회갑 1」, 「진갑의 박사학위와 노모」, 「지손란」, 「명예교수」 등의 시가 실려 있는데, 이 중에서 「진갑의 박사학위와 노모」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서정주의 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에 두루 늦기만 한 운수라
삼십 년을 대학에서 강의하고도
환갑에도 그 흔한 박사도 못했는데,
진갑에사 그게 하나 차례는 왔네만
내가 이미 중성도 넘게 여성적이 다 되어 그런지
숙명여자대학교란 데서 겨우 하나 그걸 얻게 되었네.
'이 세상에서 이걸 제일 좋아할 이가 누굴까?'고
고것을 가만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건 갓 구십의 내 편모일 것이어서,
난생첨으로 한번 효도도 해볼 겸
보재기에 그 박사 모자와 까운을 싸들고
어머니 앞에 가서 그걸 한번 쓰고 입어 보이고,
또 그걸 어머니께도 써 드리고 입혀 드렸네.
그랬더니 어머니는 내겐 처음의 존댓말로
"우리 서 박사님 어서 오시요" 하시었네.
시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시면서도
박사라는 그것은 어찌 들어 아셨는지
"우리 우리 서 박사님이요?" 하시며 무척 좋아하셨네.
진갑의 나이에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된 시인은 구십이 된 노모 앞에서 모자와 가운을 입어 보이며 재롱을 부려 보고 있습니다. '시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시'는 어머니는 출세하고 이름을 얻어서 박사까지 된 아들을 보고 아이처럼 기뻐합니다. 모자와 가운을 썼다가 입혀 드렸다가 하면서 좋아하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티없이 순수해 보입니다.
시인도 노모도 인생을 어떻게든 열심히 버티며 살아왔기에 결국 예순과 아흔이 돼서 이런 해맑은 기쁨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구십의 노모와는 반대로 자식의 방랑만을 지켜보며 한탄하다가 해방도 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뜨고 만 시인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 유종호, 「소리 지향과 산문 지향」, 『문학의 즐거움』(민음사, 1995).
2) 유종호, 「두루미가 된 분노와 설움」,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 2009).
3) 유종호, 주2)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