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시와 비가 동생공사를 해야만 하는 이치입지요

미당 시전집 강독 17: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서 세 편

by 노정연

1.


1980년, 세계 기행시의 발표를 끝낸 서정주는 곧바로 또 다른 거대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것은 단군신화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한국사 속의 일화들을 시집으로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으로 가는 달처럼…』의 연재가 끝나자마자 시집의 발표지였던 『문학사상』에 다시 이 새로운 작업을 연재하기 시작해 1982년 책으로 출간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인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입니다. 시집은 시대별로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13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 연달아 이런 큰 스케일의 작품을 시도했다는 것은 감탄스러운 일입니다. 또 한국사 전체를 주제로 하면서도 별다른 사전 준비 기간 없이 곧바로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 또한 놀랍게 느껴지는데, 이는 시인이 이미 예전부터 고전들을 어느 정도 섭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에는 출처에 해당하는 문헌들이 끝에 적혀 있는데, 그가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절요』와 『연려실기술』을 원전으로 삼아 작품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여행을 하는 동안 서정주는 세계의 현실, 특히 서양 사회에서의 타락한 측면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이 그로 하여금 정신적인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하도록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년의 한 글에서 그는 세계 여행의 감상에 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방랑에서 내가 실제로 겪은 것들은 시적인 매력을 주는 것보다는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동안에 내게 아조 좋게 감동을 준 것 한 가지를 말하라면, 그것은 서양의 젊은 여자들의 이지러지지 않은 활짝 핀 얼굴의 꽃다웁게 발랄한 웃음이요 그 찬란한 소리였다. (…) (그러나) 씽씽한 웃음 한 가지를 빼놓는다면 서양이 근대 이후 만들어 온 그 복잡한 과학문명이란 도대체 무얼 하자는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정말 아찔하기만 한 것이었다.(주1)


다시 말해 시인이 새로운 작업을 진행해야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이러한 정신적 가치의 회복의 문제를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마재 신화』를 다룬 부분에서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 시집에서는 관찰자의 시선이 주를 이루는 후기의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앞서 중기 시에서 이루어졌던 관념적인 구축에의 의욕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시집의 서문에서, 시인은 이 작업의 목적이 역사 일화 속에 담겨 있는 한국인의 정신이 무엇이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특히 풍류정신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신라 시절의 영원주의가 후기의 현실적 시선이 입혀지면서 변형된 형태라는 인상을 주는 이 '풍류'는 시인의 말에 따르면 '어느 경우에도 절망은 하는 일이 없던, 어느 역경에서도 웃을 힘을 가진 이 으젓하고 여유 있는 끈질긴' 삶의 태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20세기 이래로 이어져 오고 있는 이른바 한국미에 대한 논의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서정주의 시를 다룬 평론들이 후기 시집들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와중에도 그나마 그 중 많이 언급되는 것이 이 시집입니다. 김주연 평론가는 이 시집이 시인의 가치관이 현실과 부딪치는 문제를 거의 마지막으로 대결적으로 다루어보고 있다는 점에서 '미당 후기 시의 핵심에 해당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주2) 유종호 평론가는 '한국사에 가한 시적 논평'이라는 이 시집 특유의 개성적인 매력에 주목하여,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인 특유의 독창적인 해석과 표현이 돋보인다고 말합니다.


한국 역사에서 재미난 일화나 인물을 골라 간략하게 극화하거나 논평하고 있는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는 말투나 해석이 모두 진진하고 중층적이다. 경제적으로 상황을 제시하는 요약 능력, 현대 속어로 처리된 현대적 해석, 짤막한 논평이 특장인데 이것은 유례없는 시도로서 두루 완상에 값한다. 우리 역사책이 얼마나 흥미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인문적 가치로 가뜩한 시편들이다. (주3)


2.


시집의 1부인 '고조선시대 편'에는 열일곱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우선 시집의 맨 첫머리에 실린 「하느님의 생각」, 「환웅의 생각」, 「곰 색시」의 세 편은 단군신화를 시로 표현한 작품들입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내용이지만 시인의 입담과 재해석이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가령 처음으로 조선 땅에 내려가려 하는 환웅에게 환인은 이런 특이한 당부를 해줍니다.


'네가 인제 땅에 가서 살아 보면 알겠지만, 땅 위 사람들은 우리 하늘과는 달리 마누라를 여럿씩 얻어 살기도 해서, 소실한테 낳은 자식은 '서자'라고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 어느 땐가는 네 가장 하늘다운 자손들을 무력으로 이겼다고 어리석게 우쭐대는 모자라는 무리들이 생겨, 네 족보까지를 바꾸자고 할는지도 몰라. 너를 하늘의 '서자'라고 하고 즈이 선조를 갖다가 '적자'라고 말씀야. 혹시 그런 때가 오더래도, 내 귀여운 아들아, 아침이 언제나 맨 처음 열리는 나라 사람의 그 의젓한 본심을 묵묵히 늘 잘 지켜 가라고 네 자손 만대에 신신 당부해 두어라.' 명색이 신이면서도 무력으로 밀려나 되려 비주류 취급을 당할 걱정을 하는 그의 당부는 너무도 신적이지 않아 아주 특이하게 다가옵니다. 그의 당부는 현실의 힘에 의해 진리와 같은 것이 오히려 비난을 당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가리켜 줍니다. 과한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12.12 사태 직후의 한국의 상황을 꼬집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또 「환웅의 생각」에서 환웅이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은 이렇게 설명됩니다. '환웅께서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니, 영원히 이 겨레의 마음의 목숨이 하늘같이 늘 의젓이 이어 가자면 거기 거슬리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사나운 호랑이같이 못나게도 잘나게는 힘을 쓰는 것이고, 그 둘째는 곰같이 두두룩하여도 어리석게 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우리 환웅께서는 영원히 이어 살아가는 마음의 목숨을 아는 자기 아들딸을 낳아 기르자면 자기 아내가 될 색시부터 아무래도 덜된 버릇은 몽땅 고쳐 놓아야만 되겠다고 작정하시고, 곰같이 어리석은 계집애 하나와 범같이만 노는 계집애 하나를 골라 "너희는 햇빛을 바로 볼 자격이 없다"고 아주 깡깜한 데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참어라. 참어라. 제아무리 쓰고 매운 고생이 닥쳐 오더라도 참고 견딜 줄을 알아야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며 자손만대 이어가는 것이다. 아주 쓰디쓴 쑥하고 아주 매운 마늘만 어느 만큼씩 노나 줄 것이니 그것만 먹고 어디 잘 견디어 봐라. 잉. 끝까지 잘 견디는 여자걸랑은 내 마나님으로 해 줌자"고……' 단군신화를 읽으면서 누구나 어렴풋이 느끼곤 하는 곰과 호랑이의 기질을 보다 분명하게 짚어나가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어리석어도 잘 견디는 곰의 기질이 못나게도 잘난 맛에 사는 호랑이의 기질보다는 은근히 윗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순서로 실린 「흰옷의 빛깔과 버선코의 곡선 이야기」, 「풍류」, 「동이」 등의 시들은 고대 사람들의 정신을 시인 나름으로 구체화해본 시들이고, 「영고」, 「무천」, 「박혁거세왕의 자당 사소 손녀의 자기소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의 사주팔자」 등은 삼국시대 초기의 신화와 풍습을 설명한 시들입니다. 이 중에서 가령 부여와 예맥의 전통 행사를 소재로 한 「영고」와 「무천」은 짤막하게 남아 있는 기록 위에 시인의 상상력을 입힌 시들입니다. 시인은 영고가 한 해 중에서도 가장 추운 한겨울의 무렵에 치러졌고, 무천은 술을 밤낮으로 마시면서 치러졌다는 기록에서 착안해, 가장 맑은 정신으로 해야 할 하늘에 올리는 행사를 오히려 그런 상태를 가지고 잘 치를 수 있었던 옛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역설적으로 감탄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 속에서의 풍경의 묘사가 반드시 사실과 들어맞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깊이와 재치를 갖춘 해석일 것입니다.


3.


시집의 2부인 '삼국시대 편'에는 서른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삼국시대의 재미있는 일화들을 다룬 시들로 「팔월이라 한가윗날 달이 뜨걸랑」, 「가야국 김수로왕 때」, 「술통촌 마을의 경사」, 「백제의 피리」, 「애를 밸 때, 낳을 때」, 「지대로왕 부부의 힘」, 「신라의 연애상」, 「혜현의 정적의 빛깔」, 「지귀와 선덕여왕의 염사」 등이 나와 있습니다. 『신라초』를 다룬 부분에서 종종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 중 일부 시들은 서정주가 예전에 썼던 몇몇 다른 시들의 원천이 되었던 설화들을 다시금 주제로 삼고 있어, 그의 다른 시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꽤나 도움을 줍니다. 함께 읽어 보면서 상이한 매력을 느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삼국시대의 이야기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주가 되는 것은 신라의 이야기인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거의 의존해 소재를 얻은 탓에 고구려나 백제는 상당히 손해를 입고 있는 셈인데 특히 백제의 일화는 두 편밖에 없을뿐더러 그나마도 별로 좋게 이야기되고 있지 않습니다. 금동대향로도 미륵사지 사리장엄도 확인되지 않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하다못해 무령왕릉에서라도 소재를 얻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합니다. (물론 시집 속에는 초엽에 실린 「풍류」라든지 끝자락에 실린 「이조 무문백자송」, 「단군의 약밥」과 같이 시인의 사유만으로 씌어진 작품도 없지는 않습니다.)


2부에서의 신라의 일화들을 다룬 시 중에서 그 속에 담긴 정신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차돈의 목 베기 놀이」, 「황룡사 큰 부처님상이 되기까지」, 「바보 온달 대형의 죽엄을 보고」 같은 시들을 들 수 있어 보입니다. 가령 「이차돈의 목 베기 놀이」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야소 기독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그 마음의 힘을 무한대히 늘여 야소교를 세운 효과와, 이차돈이 "내 목을 쳐 보이소" 자원해 숨넘어가서 마음적으로 간절히 살아남아 그 효력으로 신라에 불교가 있께 한 것은 결과로 보아선 많이 닮았소./ 그러나 그 육신의 죽음까지의 작태는 매우 다른 것이니, 야소 쪽 이얘기는 대단히 처참하고 처량하고 또 아픈 데가 있는 데 반하여, 이차돈 쪽은 그게 그렇지 않고 순전히 어린아이의 한때의 무슨 놀이와도 같아서 적당히 웃기기도 하면서도 아조 연한 배나 먹듯이 사운사운 그것이 진행된 점이오.'


알려져 있다시피 이차돈은 참수를 당했을 때 목에서 하얀 피가 뿜어져 나왔다고 말해집니다. 이것은 비극과 고통이 묻어나는 예수의 죽음의 장면과는 달리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시인은 이러한 특성의 비교를 강조해 보이고 있습니다. 앞서 웅녀의 간택 과정처럼 누구나 느끼곤 하는 설화의 묘한 분위기를 정확하게 포착해 내는 내용의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3부인 '통일신라시대 편'에는 열일곱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시들은 모두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앞서 '삼국시대 편'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는 발해가 손해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실린 「만파식적이란 피리가 생겨나는 이얘기(소창극)」는 신문왕 시절에 만파식적이 생겨나게 된 설화를 극시 형식으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후기 시에서 종종 보여주었던 이러한 시도는 외국에서의 장르를 한국어의 틀 속에서 실험해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 참신하게 다가옵니다.


신문대왕

(동해 바닷가에서)

"죽어서도 이 나라를 길이 지켜 내자면

챙피치만 비늘 돋힌 용이라도 돼야겠다.

내 죽으면 바다에서 하늘까지 뻗치는

호국룡이 될 것이니 바닷속에 묻어 놔라."

내 아버님 문무대왕 말씀하신 꼭 그대로

바다에 묻은 지도 많은 해가 바뀌어서

학두루미도 여러 직을 새끼들을 까 놨는데,

바다에선 여직까지 새 기별이 안 오느냐?

아니라면 우리 눈이 흐려지고 만 것이냐?


해군 제독 박숙청

저기 저기 바다 쪽을 살피어 보옵소서.

제 눈에는 분명하게 동해의 섬 하나가

더는 이상 못 참겠다 몸부림을 쳐대면서

문무황제 폐하의 감은사를 향하여

유유히 떠오는 게 아주 잘 보이나이다.

돌아오는 어선처럼 희희낙락 오는 것이

거울 같은 마음눈에 비쳐 보이나이다.


신문대왕

하늘의 일, 땅의 일과, 이승 저승 모든 일을

누구보다 잘 본다는 일관(日官)아 나오너라.

그대 맑은 만리안(萬里眼)엔 무에 시방 보이는고?


일관 김춘질

예에 폐하. 여러 겹겹 마음눈으로 보아 하니

문무황제 폐하께선 그 생전의 소원대로

우람하게 날개 돋은 호국룡이 되어 계시고,

그 옆에는 김유신 장군께서 서 계신데

김 장군은 삼십삼천 왕자님이 되셨군요.

둘이 만나 이 나라를 고시랑고시랑

이마 맞대 걱정타가 무릎들을 치시더니

무엇인지 별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네요.

앞으로 나아가사 받으실 채비하옵소서.


신문대왕

(동해 바닷가의 감은사 이견대에 올라, 해군 제독 박숙청이 "떠오고 있는 게 마음눈에 보인다"고 한 그 섬을 바래보고 있다가 한 사신을 보내 그 섬을 탐색케 한다.)


사신

(드디어 그 섬의 탐색을 끝내고 돌아와서 신문대왕께 보고하기를)

저 섬이 생기기는 자라 모가지 같사온대

거기서 대나무 하나가 자라나 있습더이다.

그런데 낮이때는 두 개로 보이다가

밤이면 한 나무로 합해져서 지냅더이다.

소신의 마음눈은 꼭 그렇게 보았으니

그 까닭은 폐하께서 직접 가시어 아옵소서.


신문대왕

(바다를 배로 건네 그 섬엘 들어가니, 숨었던 용이 하나 나와서 맞이하고 있는지라.)

이 섬에 대나무는 낮에는 두 개였다가

밤이 되면 포개어져 하나만이 된다 하니

그 무슨 이치인가, 어서 좀 말해 보게.


손바닥을 마주 쳐서 소리를 내잡시면

한 손바닥만으로는 절대로 안 되옵고

두 손을 마주 쳐야 되는 이치이올시다.

문무대왕님과 김유신 장군님이

두 손의 손뼉처럼 신라 통일 이루시고

인제는 그 넋 담아 이 합죽이 되었니다.

폐하시여. 이 합죽으로 피리를 만드시와

이 뜻을 그 가락에 고이 담아 전하시면

신라는 영원토록 살아서만 가오리이다.


신문대왕

(그 합죽의 피리 '만파식적'이 만들아졌을 때, 그걸 지긋이 불어 보고 있다가)

여보게 천리안의 해군 제독 박숙청이.

여보게 만리안의 밝은 일관 김춘질이.

자네들 마음눈은 하늘눈 그대로고,

다정하고 다정키는 지옥보다 훨씬 깊어

이 어려운 피리를 다 찾아내서 만들았네.

두고두고 눈이 맑고 다정한 자손 길러 내서

내 아버님 문무왕과 김유신의 손뼉 소릴

길이길이 이 피리에서 듣고 살게 하여 주게.


만파식적 이야기는 가령 「백두와 한라의 1974년 봄 대화」와 같은 서정주의 다른 시 속에서도 종종 등장한 바 있어, 시인이 상당히 좋아했던 설화의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시의 내용 자체는 원래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예컨대 '지옥보다 훨씬 깊'은 다정함을 이야기한 것과 같은 구절은 시인만의 개성적 어법에 해당합니다.


그 밖의 이 단락에 실린 주요한 시들로 「원효가 겪은 일 중의 한 가지」, 「의상의 생과 사」, 「신라 최후의 성인 표훈 대덕」, 「수로부인은 얼마나 이뻤는가?」, 「큰비에 불은 물은 불운인가? 행운인가?」, 「처용훈」, 「백월산의 힘」, 「토함산 석굴암 불보살상의 선들」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령 경덕왕이 자식이 생기지 않아 고승 표훈에게 부탁했더니 아들이 생겼더라는 일화에 딴지를 거는 대목이라든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드러운 '부들이'와 단단한 '빡빡이'로 바꾼 대목이라든지, 「처용훈」의 첫 구절에서 '달빛은/ 꽃가지가 휘이게 밝고/ 어쩌고 하여'라고 파격적인 어투로 운을 떼는 대목 등은 시인 특유의 개성적인 관점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부분들에 해당합니다.


4.


시집의 4부인 '고려시대 편'에는 스물한 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고려시대의 일화를 다룬 시들로 「왕건의 힘」, 「현종의 가가대소」, 「덕종 경강대왕의 심판」, 「땅에 돋은 풀을 경축하는 역사」, 「옥색과 홍색」, 「매사는 철저하게」, 「노극청 씨의 집값」, 「고려 고종 소묘」, 「충렬왕의 마지막 남은 힘」, 「정몽주 선생의 죽을 때 모양」 등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는 특히 고려시대의 왕들의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 시들이 여러 편 있습니다. 몇 편의 예를 들자면, 태조 왕건은 투항해 온 견훤에게까지도 아양을 부릴 수 있는 포섭력으로 창건의 힘을 일으키고(「왕건의 힘」), 현종은 거란의 침공으로 퇴격하는 와중에도 너털웃음을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을 키워 반격에 성공하며(「현종의 가가대소」), 열아홉 살의 덕종은 살인사건의 심판에 대하여 '죄란 목숨보다야 어느 거나 가벼운 거니 (…) 죽일 것까지는 없어. 그럴 것까정은 없어./ 매나 몇 찰씩 아프게 갈겨서/ 마음 편한 무인도로나 보내 주라구'라고 말합니다(「덕종 경강대왕의 심판」).


이 시집은 크게 보아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전반부와 고려시대 이후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어 보이는데, 전반부의 시편들이 대체로 신라를 그리던 시절과 같은 다소간의 환상성이 섞인 긍정적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면, 후반부로 올수록 점차 현실성이 짙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는 고대에서 근세에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시인은 신라와 현대와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신라 이후를 모두 다룸으로써 그 변화하는 과정을 분석해보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일견 번잡해 보이는 시집의 구성을 두고 현실성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려시대 이후의 일화로 오면 해맑은 태도의 삶와는 오히려 대치되는 듯한 분위기를 보이는 작품도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령 「매사는 철저하게」와 같은 시는 시집 속에서 이례적으로 독한 마음씨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어 주목됩니다. 시의 전문을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산속에서 식곤증에 빠져 누워 있는 것을 찾아낸 수원의 효자 최루백이는 가지고 있던 날센 도끼로 먼저 그걸 패 죽인 다음에, 배를 갈라서, 그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아버지의 살과 뼈를 가려내어 장사를 지내고, 그 호랑이의 살일랑은 따로 발라서 옹기 항아리에 잘 담아 맑은 시냇가에 깊숙이 묻어 두었다가, 몇 해 뒤에 상이 끝나는 날 그걸 파내서 뚜껑을 열고는 거기 남은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모조리 집어시어 버렸습니다. 그러구서야 3급 을류(乙類)의 양반 시험을 보러 나섰습니다.' 최루백은 나중에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렀습니다.


5.


시집의 마지막 단락인 5부 '이조시대 편'에는 스물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우선 조선 전기의 이야기들을 다룬 시들로 「이성계의 하눌」, 「세종과 두 형」, 「황희」, 「유비공소」, 「매월당 김시습 1」, 「정암 조광조론」, 「하서 김인후 소전」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편의 시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들의 하나인 태조 이성계와 세종 형제, 황희 정승의 일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태종의 왕위 계승을 불가불 인정해 주면서 천명을 논한 이성계의 일화를 그린 「이성계의 하눌」이나 노비들과도 무람없이 지내는 재상의 모습을 그린 「황희」도 인상적이지만, 가장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세종과 두 형」입니다.


양녕대군이 아직도 태종의 큰아들 자격으로 세자로 있을 때 왈패라 해서 그 폐세자론이 일자, 그 바로 밑 아우 효령은 그 자리는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여 매우 근신하며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형 양녕이가 그 옆을 지나면서 발길로 걷어차며 "에이 못난 놈아! 다음 왕 가음은 충녕이란다. 알기나 알아라!" 했다. 효령이는 물론 울화가 치밀어 쏜살같이 산골짜기 어느 절간까지 치달려 가, 그 절간 문루에 매달린 큰북을 하루 종일 두 손으로 두들겨 대서, 그 북가죽을 쑥대머리 귀신 모양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인데, 내 생각 같아서는 이만하면 왕 가음이 되고도 남을 것 같으나, 고로코롬은 되지를 않고, 그저 가만히 있던 셋째 충녕이가 고걸 차지한 걸 보면 역시나 이런 판엔 무엇보다도 가만히 있는 편이 낫기는 나은 것이라.


이 시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은 물론 마지막 구절입니다. 삼형제 중에서 세종의 비중을 가장 줄인 것 자체도 참신하지만 그를 가장 잘나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있'어서 왕이 된 것이라는 표현은 결정적인 파격성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을 두고 시인이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의 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유교에서 인의 완성은 곧 인을 체화하는 것이므로 충녕대군의 가만히 있음은 곧 수기(修己)의 생활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가 왕으로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은 군자의 덕을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편이 낫기는 나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서정주의 '비끼어' 간다고 말해지는 삶의 태도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님을 은연중에 가리켜 주는 통찰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시들로서, 가령 「매월당 김시습 1」과 「정암 조광조론」에서 대비되어 나타나는 김시습과 조광조의 삶의 태도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앞선 고려시대 편에서 '하눌의 옥빛을 가장 숭상하는 신선 마음'의 정지상과 '인륜의 붉은 핏빛을 얼굴에 자주 나타내는 시비(是非) 유생' 김부식을 대비시킨 「옥색과 홍색」에서 먼저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 1」과 그 밖의 시들에서 김시습은 그야말로 탈속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어느 날 김시습은 승려들에게 법문 설법을 하게 된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는 난데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소나 괜찮은 놈으로 한 마리, 이 절간 마당으로 끌어들이슈.' 스님들이 마을에서 소를 한 마리 빌려 오자 그는 또 말합니다. '소가 먹을 꼴은 없어도 되겠나? 그것도 어디 가서 한 다발은 갖다 놔야지.' 안 따르기도 무엇하니 그들은 또 불가불 풀 한 다발을 가져옵니다. 그러자 그는 소가 먹을 꼴을 소의 앞이 아니라 꽁무니 쪽에 놔 놓고는 깔깔거리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소 꼴도 앞에 있어야 먹을 것 아니야? 스님네들 나한테서 설법 듣자는 꼴이 바로 저 꼴 같구랴!' 다른 시 속에서도 김시습은 나뭇잎에 시를 적어 냇물에 흘려 보낸다든지, 친구면서도 지체 높은 대감인 서거정의 집에 가서 그를 두고도 드러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린다든지 하는 장면으로 나타나고 있어 역시 자유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정암 조광조론」 속에서의 조광조의 모습은 전형적인 강직한 유생의 그것에 해당합니다.


정암 조광조가 갓 젊은 나그넷길에서 어느 집에 한동안 묵으려 했을 때, 그 집 시악씨가 한눈에 반해 홰를 치고 바짝거려 오고 있었던 걸로 보면, 조광조는 생김새도 아주 잘생긴 미남자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광조는 그 여인의 추파를 받아들이질 않고, 냉큼 딴 집을 찾아 옮겨 가려고만 하고 있었다.

여자가 마지막 작정으로 그 머리에 꽂은 비녀를 빼 광조에게 주었을 때, 광조는 그걸 위선 받아 가지고 가긴 했지만, 이내 되돌아와서 그 비녀를 그 여자의 집 한쪽 벽 틈에다 꽂아 놓고 물러가 버렸다.

어땠을까?

광조가 그때 그 여자의 추파를 받아들여 한때 히히덕거리며 즐길 수도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의 서른여덟 살 때의 그 음독 사형 같은 건 면할 수도 있지 안했을까? 적당히 그때그때를 끌끌끌끌 히히덕거리면서 부모처자 안 울리고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시의 모티프가 된 일화는 조광조의 대쪽 같은 사람됨을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의 그런 성격이 비극적인 생애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서정주 특유의 완곡을 추구하는 인생론이 여기서 다시 엿보입니다. 그의 적지 않은 시가 그렇듯이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통찰력이 깃든 해석입니다. 유종호 평론가는 서정주의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잘 드러나는 사례의 하나로 이 작품을 들기도 했습니다.


성격은 운명이라고들 했다. 환경이 운명이라는 새 생각이 퍼지기 이전의 얘기다. 아마 그럴 것이다. 매사에 원칙을 지키고 타협할 줄 모르며 항시 근엄한 인사는 경의에 값하는 사람이요 세상이 버리면서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의 도덕주의자나 명분론자는 남의 삶을 고달프게 하고 자기의 삶도 고단하게 한다. 유머 감각은 이 세상을 견딜 만하게 하는 데 유효하다. 조광조의 참대 같은 사람됨을 얘기하면서 시인이 정식으로 '조광조론'이란 표제를 단 것은 아주 시사적이다. 조광조 자신의 목숨이야 그의 것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처자를 울리는 일은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현실주의자의 관점에서는 조광조는 참 애석한 외골수의 인물이다. 소은(小隱)은 산간에 숨어 있고 대은(大隱)은 시정에서 산다고 하지만 『논어』를 통해 드러나는 공자는 결코 외통수의 인물이 아니다. 독선은 미덕이 아니라고 현실주의자는 말한다. (주4)


그러나 한편으로 역사적 상황에 개인이 부딪치게 될 때의 큰 문제는, 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김시습적인 것과 조광조적인 것을 아우르지 못하게 하고 둘 중의 한 길만을 가도록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때로 저쪽이 도덕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 총체의 아이러니를 담은 시편으로 「기허 스님」의 경우를 꼽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날씨가 아주 좋이 밝은 날이거나,

부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날에, 충청도 금산의 칠백의사총 가까이 가 귀 종기어 들어 보면, 지금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 대장과 그의 부장 기허 박영규 스님이 나즉한 소리로 말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 아스라한 대로 들리긴 들려 옵니다.

"내가 그 때 금산으로 진군령을 내리려 하고 있을 때, 자네가 승산이 없다고 처음 반대한 것이 사실은 매우 슬기로운 일이었네. 그런데, 왜, 자네는 금산 싸움에 우리가 패망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자네 주장을 굽히고 나를 따라와서, 여기 이렇게 함께 묻히어 있나? 어째서?" 조헌 대장은 이렇게 묻고 있고 기허 스님은 또 아래처럼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게, 그게, 시와 비가 동생공사(同生共死)도 해야만 하는 이치입지요. 때로는 말씀입니다."


스님의 입을 빌려 시인은 말합니다, 시와 비는 때로 같이 살 수도 있고 같이 죽을 수도 있다고. 목숨의 입장에서 본다면 승산 없는 전투를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보는 것이 시(是)요 질 싸움에 동참했다가 죽는 것이 비(非)일 것이지만, 전우애의 심정에서라면 함께 싸우는 것이 시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시와 비는 쉽게 갈라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인은 이 메시지를 순국한 의병장들의 일화를 통해 내세움으로써 도덕적 시비의 목숨의 시비에 대해 은근한 우위를 갖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뒤의 순서로 실린 시들을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의 임종 장면을 다룬 「죽음은 산 것으로」를 비롯해 당시의 당파 싸움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백사 이항복」, 삼학사 중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모습을 그린 「학자 오달제의 유시」 등이 있습니다.


한편 「석전 스님」은 시집에서의 유일한 근대 인물인 박한영의 일화를 다룬 작품이고, 끝 순서로 실린 「이조 무문백자송」과 「단군의 약밥」은 조선백자와 약밥에서 각각 단군의 모습과 옛사람들의 정신을 찾고 있는 내용의 시들입니다.





1) 서정주, 「나의 문학인생 7장」, 『나의 시』(전집 11권, 은행나무, 2017).

2) 김주연, 「신비주의 속의 여인들…… 시? 시」, 『사랑과 권력』(문학과지성사, 1995).

3) 유종호, 「서라벌과 질마재 사이」,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

4) 유종호, 「소리 지향과 산문 지향」, 『문학의 즐거움』(민음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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