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히 동그스럼히 그리 어찐 살 수 없어?

미당 시전집 강독 16: 『서으로 가는 달처럼…』에서 네 편

by 노정연

1.


총 열다섯 권의 서정주의 시집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거의 웬만하면 첫 6~7권의 시집에 쏠려 있습니다. 독자에게나 평론가에게나 이는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이후 그가 여덟 권의 시집을 더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실린 시들은 거의 완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사실 그럴 만하기도 합니다. 이 여덟 권의 후기 시집들은 많은 양에 비해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그가 이 시기에 작품을 너무 남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백낙청 평론가는 이와 관련해 그가 '여든 살이 넘도록 현역시인으로 남았던 점은 장한 일이나 『떠돌이의 시』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중 일부를 빼고 나면 환갑 지난 뒤의 창작은 대부분 긴장이 풀린 '관광객'의 기록이나 객담에 가까운 것들이다'(주1)라고 간단하게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정주의 친일 전력의 문제와 더불어 그의 이른바 친독재행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도 한 꺼풀 꺾일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쯤에서 그의 친독재행위와 관련한 문제를 잠깐 다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다룰 시집인 『서으로 가는 달처럼…』이 딱 1980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70년대까지의 그의 정치적 행보를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정주의 전기적 행력을 정리하고 있는 황종연 평론가의 글 「신들린 시, 떠도는 삶」에서는, 해방 이후의 그의 정치적 행보 몇 가지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네 가지 대목을 추려 보았습니다.


① 해방 직후 일군의 우익문인들이 좌익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활동에 나서 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자, 미당은 김동리, 조연현, 조지훈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었다. 조선문필가협회의 전위대격인 이 협회는 1946년 4월 출범 당시 우익 정치세력의 관심을 끌어, 출범 총회가 열린 총회장에는 김구를 비롯한 유력 인사들이 상당수 참석했고, 이승만은 장문의 격려사를 보내기도 했다.


② 대학 전임강사로 일하던 1947년, 미당은 당시 『민중일보』를 발행하면서 이승만기념사업회를 운영하고 있던 윤보선에게서 이승만 전기를 써달라는 위촉을 받는다. 그것은 민중일보사에 근무하고 있던 동료 문인들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미당은 방학 중에 김좌진 장군 전기를 써본 적이 있는데다가 이승만이라면 추앙부터 하고 있던 터라 대학교수직을 흔쾌히 포기하고 수개월에 걸쳐 이승만의 숙소를 드나들며 집필 준비를 했다. 그의 이승만 전기는 민중일보에 연재되다가 신문이 폐간되면서 중단되었고,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나 이승만의 마음에 들지 않아 발매금지가 되고 말았다.


③ 미당에게는 4.19 혁명도 그렇게 대단한 흥분을 주지 못했다. 그는 정권이 교체되어 본댔자 민족의 현실이 달라질 리 만무하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4.19는 한쪽으론 시원스럽기는 하면서도 또 한쪽으론 참으로 딱하고 가공할 일이기만 했다.'(「속 천지유정」, 1974) 그의 각종 자전적 기록들에 따르면 4.19에 대한 그의 반응은 젊은이들의 희생에 통분을 느끼는 평범한 부형들의 심정을 크게 넘어서지 않았다.


④ 미당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복과 존경 속에서 60대를 맞이했다. 1970년대 전반은 아마도 미당의 문학적 영예가 정점에 달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문단에서는 이미 미당의 문학적, 이념적 입장과는 구별되는, 또는 대립되는 입장이 득세하고 있던 참이었다. (…) 이러한 문단의 새로운 기류에 대해 미당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순수-참여 논의가 분분하던 1963년에는 과거의 사회주의 문학 운동의 과오를 근거로 들어 문학의 사회 참여를 허황한 것으로 일축하는 글을 발표했고, 1971년 박정희 정부의 비상사태 선언과 민족보위법 공포 이후에 씌어진 어떤 수필에서는 당대의 현실에 초조해하지 말고 영생을 먼저 생각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문인세력 내에서 일찍이 차지한 지도적 위치를 줄곧 고수했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세 차례 부회장을 역임한 그의 이력은 1977년 회장 취임으로 이어졌다. (주2)


①과 ③은 해방 이후 서정주의 정치적 성향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당시 그는 대표적인 우익 계열의 문학인이었고, 우익 단체의 활동에 여러 차례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큼 그 이후에 일어났던 4.19에 대한 평가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렇게 문제가 될 만한 사실들은 아닙니다. 서정주의 친독재행위와 관련하여 대체로 언급되는 것은 ②와 ④의 대목과 관련된 것입니다. ②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쓴 사실에 대한 것이고, ④는 문학계의 유력자로서 독재적인 정권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것입니다.


서정주의 행보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종종 ②의 일에 관해 조롱조로 말하는 경우를 더러 본 적이 있지만, 그를 친독재적인 인사라고 비판할 경우에는 ②보다는 오히려 ④가 더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정주가 이승만을 처음 만난 시기는 1947년이고 그의 전기를 써서 출간한 시기는 1949년이기 때문에, 이것을 친정부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있어도 친독재행위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정주는 이승만을 만났을 당시의 기억을 종종 산문으로 남긴 바 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무렵과 전기를 출간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그는 다소 시니컬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곧 앞에 나타날 20세기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제일 원로를, 훨씬 크고도 근량이 아주 묵직하게 나갈 인물로 상상하고 미리서부터 기가 아주 죽지 않게 의지를 꼿꼿이 해 가지고 있었다. (…) 그런데 조그만 중년 서양 여인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들어서는 영감을 보니, 키는 내 키보다도 더 작은 - 난쟁이 겨우 면한 키에, 말할 때마다 안면신경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듯 살이 부르르 떨리는, 벌써 완전 백발의, 전 의치의 하얀 위아래 이빨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미 라디오로 들어 두루 잘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말의 음조까지를 우리 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많이 잊어버려 어떤 데선 영어식의 억양으로밖에는 말할 줄도 모르게 되어 있었다. (…) 나는 처음 그와의 대면에서 내가 한 주일에 두 차례씩 그를 찾아 우선 전기 자료를 직접 구술을 받아 노트할 것, 나머지 자료는 그의 비망록 등을 내게 빌려줄 것 등에 합의했다.


1949년에 나는 그의 전기를 이북통신사라는 출판사에서 조르는 부탁에 못 이겨 찍어 냈다. 그러고 얼마 있었더니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하며(이때는 이 박사가 이미 대통령이 된 뒤였다) 이 책을 치안국 이름으로 모두 압수하고 나를 그 무슨 계장이라던가 하는 총경의 앞에 내세웠다. "서 선생님. 선생님이 해방 후 공산당하고 싸워 오신 경력을 저희는 잘 압니다. 선생님의 책이 훌륭한 걸 잘 압니다마는, 각하께서 이렇게 몰수하라 하셨으니 우리로선 할 수가 없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래 내가 이 박사를 끝까지 존경해서 쓴 『이승만 박사전』은 송두리째 몰수 처분을, 법 밖에 이 박사 개인의 자유로운 권한으로 집행해 냈다. (주3)


그 일이 있고서 한참 뒤에야 서정주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를 지내기도 했던 김광섭 시인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책이 몰수당한 이유가 이승만의 선친의 이름에 경칭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집에 실린 글들을 통해서 살펴보면 역대 대통령 중에서 서정주가 호감과 친분을 아울러 갖고 있었던 인물은 이승만 한 사람뿐이었던 것 같고, 다른 이들과는 의례적인 면을 제외하면 거의 접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의 그의 발언을 보면 친밀감에 따른 지지이기보다는 정치적 시각에 따른 지지 행위 정도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의 전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것에 대한 기록이 딱 한 번 등장합니다. 교수 생활을 하던 1975년 한글날에 우연히 마주친 일이 그것입니다.


동국대학교 국문과의 학생 대표들을 이끌고 여주 세종대왕릉에 화환을 바치러 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뜻밖에 만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극히 간소한 행차와 참배는 또 나를 적지 아니 놀라게 하고 감명 깊게 했다. 들으면 그는 지난해 8.15 경축절 흉탄에 영부인을 잃은 뒤 주위의 권고로 공식 석상에 직접은 잘 나오지 않기로 된 걸로 아는데, 오늘 이 자리에만은 아무런 공식적 참가의 예고도 없이 한 사인의 자격으로서 간략한 일행으로 나타나 극진한 절만을 올리고 간 것이다.


나는 비록 먼발치로일망정 이런 대통령의 거동이 이날의 유난히 쾌청한 공기 속에 또 무척 반가웠다. 한 10년쯤 전인가 한잔하는 자리에서 옆에 앉은 대통령의 빈 잔을 보고 "각하, 잔이 비었군요. 같이 한잔하실까요?" 내가 말하니 "서 선생, 언제 조용히 한잔하십시다" 하던 기억, 또 5년쯤 전인가 정부에서 내게 국민훈장 3등의 동백장을 수여했을 때 나는 아내의 자원대로 대신 그네를 보냈더니 대통령이 손수 나와 그걸 내 아내 가슴에 달아 주며 내 안부를 간곡히 묻더라는 아내의 전언의 기억, 또 육 여사 재세 시의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육 여사와 함께 어느 지방 시찰에 동행할 수 있느냐는 의뢰를 받고도 사사로운 일로 승낙지 못했던 기억 - 이런 세 가지의 기억들을 더듬다가, 역시 끝은 너무나 쓸모없는 내 자존심만을 탓하는 데 이르렀다. (주4)


여기에서 가령 식사 자리를 함께한 것을 두고 의심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부 때나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하는 일은 빈번하게 있는 법인 만큼 수상쩍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그는 앞의 인용에서와는 달리 극히 점잖은 어조로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친분의 문제에 따른 것도 있을 것이고 글이 씌어질 당시 박정희가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는 것도 심리적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여간 서정주의 이런 행보가 어딘가 불쾌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가령 비슷한 연배로서 『거미와 성좌』 등의 시집을 통해 독재 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작품을 수다하게 남겼던 박두진 시인과 같은 사례가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질마재 신화』와 『떠돌이의 시』 이후 서정주의 후기 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그가 연작시 형식의 창작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시기의 시집들은 무엇보다도 주제가 대단히 다양하고 양적으로도 훨씬 풍성해지고 있어서,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서정주 시의 새로운 진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절의 시집들을 주제별로 열거해보자면, 세계 기행 시집인 『서으로 가는달처럼……』, 한국의 역사를 주제로 다룬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자서전적인 기록을 담은 『안 잊히는 일들』과 『팔할이 바람』, 정형시 형식을 집중적으로 시도해 본 『노래』, 세계의 산들을 소재로 삼은 『산시』까지 총 여섯 권이 됩니다. 이는 편수로 따지면 모두 합쳐 500여 편이나 되는데, 기간으로 치면 이것들은 겨우 십 년이 조금 넘는 기간 사이에 씌어진 것들입니다. 시인이 노년기에 와서도 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그의 노년기의 다작을 평자에 따라서는 기행이며 노쇠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는 않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기 그의 다작의 원동력은 다양한 소재에의 관심과 스케일에의 의욕이라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질마재 신화』 이후 일어나는 시인의 관찰자로의 전환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세계를 선도하는 입장이 아니라 바라보는 입장이 된 이상 보다 정확한 세계 묘사를 위해서는 소재의 확대와 스케일의 확보가 필수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범작의 과잉 생산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혐의도 없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80년대 이후의 그의 다작 경향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양적 확대에 따라 범작이 많아졌을 뿐이지 그가 수작을 내는 수효 또한 이전에 비해 그렇게 줄지도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전 시기에 버금가는 괜찮고 매력 있는 시편들이 이 시절의 시집들 속에서도 충분히 찾아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안 잊히는 일들』까지의 시집에 관해서는 이 점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연작시 시절의 첫 번째 순서를 이루는 것은 여덟 번째 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입니다. 이 책은 진짜로 시인이 세계 여행을 하고 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쓴 시집입니다. 『떠돌이의 시』를 출간한 이듬해인 1977년 11월에서 1978년 9월까지, 서정주는 여행기 연재를 조건으로 하여 『경향신문』사측의 도움을 받아 세계 여행을 다닐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는 여행을 다녀온 직후인 1979년 여행기 『떠돌며 머흘며 무엇을 보려느뇨』를 출간함과 함께,(주5) 문예지 『문학사상』에 기행시를 연재해 1980년 시집으로 출간했습니다.


당시 그는 이런 큰 스케일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상당히 즐겁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행기의 서문에서 그는 이런 기획이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드문 일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시집은 한국문학사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여행 기록이 담긴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행문학의 측면에서 획기적인 성과라고도 할 수 있어 보입니다. 한편 그의 시 「추천사」의 한 구절에서 따온 시집의 제목은 당시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고 있었던 이어령 평론가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주6)


당시 서정주는 멕시코를 다니던 중 다량의 객혈을 해, 병원에서 멕시코 사람의 피 45퍼센트를 수혈받는 수술을 받아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은 아마도 1951년의 자살미수 사건 이후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죽을 고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집은 대륙별로 7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고, 총 116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2.


첫 번째와 두 번째 단락인 '미국 편'과 '캐나다 편'에는 총 열아홉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시인 「네바다 사막」을 비롯해 「요세미테 산중에서」, 「루이지애나 밀림 속의 외론 고양이」, 「나이아가라 폭포 옆에서」, 「<거위가 황제인 나라>라는 그림을 보고」 등의 시들은 북아메리카의 자연이나 풍물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가령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듣는 사람들은/ 그 넓이 750미터로, 그 높이 48미터로/ 한번 목청을 돋궈 통곡하고 있는 것을,/ 동시에 "아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아파서 아파서 못 견디어서/ 비명을 울리고 있는 걸 까마득히 모르고/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헷점을 치며 엉터리로 좋아들 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 아마도 몇억만 명은 좋이 넘는 사람들의/ 피의, 피의, 피의, 피의 합쳐진 폭류(瀑流)인 것이다.'라며 나이아가라 폭포의 의미를 특이하게 해석하는 대목은 인상적입니다.


한편 「라스베가스」, 「쌘프란시스코」, 「텐 달라 모어!」 등은 미국의 향락적인 문화를 비판적이면서도 다소 우습게 그리고 있는 시들입니다. 사창가에서 바가지를 쓴 동양 청년을 화자로 내세운 「텐 달라 모어!」 같은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창부가 자신을 꼬드겨 놓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겨우 마악 내 그것이 쓸 만해지면/ "텐 달러 모어!"/ 하고는 쑤욱 빼 버리고,/ "야, 야, 10달러 여기 있다." 그걸 주고서/ 또 마악 내 '거시기'가 쓸 만해지면/ 다시 또 "텐 달러 모어"가 되고, (…) 19세기 미국 시인 E. A. 포오에게 있던/ 그 '네버 모어' 같은 건/ 약으로 쓸래야 영 보이질 않고,/ 텐 달러 모어/ 텐 달러 모어……/ 맨 그것뿐이더군요./ 어유, 어유, 나무대비관세음.'


반대로 「노스캐롤라이나의 노쳐너 미스 팍스」, 「시카고의 나의 친구 미스 티클」과 같은 시는 미국에서 만났던 순수한 마음씨의 사람들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미스 팍스'는 육십여덟 살이고 후자의 '미스 티클'은 다섯 살인데, 이 중 전자의 시를 인용해 봅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군(郡) 도서관장을 오랫동안 지내다가 정년퇴직한 예순여덟 살의 노처녀 팍스 양에게 "용하게 잘 견디셨군요." 내가 위로의 말을 한마디 했더니, 대답 대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이끌고 그네의 쬐그만 식물원 방으로 가서 분홍빛 동백꽃 한 송이를 꺾어 내 저고리 웃호주머니에 꽂아 주며, 어떤 화분에 심어져 있는 일년생의 풀꽃 한 무더기를 손가락질하면서

"이 꽃 이름은 '못 견디는 꽃'이라고 합니다" 했다.

"보세요. 잎사귀만 만져도 부들부들 떨고, 씨를 배면은 누가 거기 살짝 스치기만 해도 그만 그걸 터뜨려 와르르 제 씨를 쏟아 버리죠."

"미스 팍스. 그럼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오셨나요?"

내가 물으니, 거기에도 그네는 대답은 않고, 다시 그네의 거실로 나를 데불고 가 자리에 앉힌 다음에 이번에는 "팬니!" 하고 잔잔하고 조용한 소리로 불러 그네의 누이동생이라는 또 한 할머니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내 누이 팬니는 귀머거리요. 그래 둘이서 서로 도와 여지껏 살아왔어요."

"호머의 『오디씨』가 생각나는군. 그 무어던가 하는 섬에선 어떻게나 곱게 우는 새들이 사는지, 배 타고 가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홀려 그 섬을 갔다간 모조리 목숨을 뺏기고 만다고, 오디시어스는 같이 배 타고 가던 그의 부하들의 두 귀를 모조리 초로 틀어막게 했었지요. 하늘이 오디시어스 노릇을 해서 댁의 누이를 도우신 것인가 보오."

나는 또 위로의 말을 안 할 수 없어 또 그걸 했더니, 이번에도 그네는 역시 대답은 않고, 나와 그네의 누이동생까지를 일어서게 하여 또 이끌고 창 쪽으로 가서 그걸 드르르 열어제치고, 때마침 하늘에 자욱히 돋은 또렷또렷 빛나는 별들을 손가락질해 가리키고 있었다.

"참 성하지요?"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팍스 씨는 어려운 인생의 소유자였을 것으로 추측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화자의 위로를 정중히 받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이 불행했노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요소들을 은근히 드러내 보일 뿐입니다. 창문을 열어 별들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의 의미는 삶이 불행해도 별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고 힘을 낸다는 뜻이겠지만, 반대로 삶이 이렇게 불행한데도 별들은 아무렇지 않게 빛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합니다.


2.


세 번째 단락인 '중남미 편'에는 열네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남아메리카의 풍물을 다룬 시로 「멕시코에 와서」, 「파나마의 시」, 「페루의 당나귀 웃음」, 「잉카문명 시절 여자들이 손가락 끝마다 끼었던 순금 골무들을 보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정뱅이 꽃나무」, 「아르헨티나 농촌 근처」, 「쌈바춤에 말려서」 등이 실려 있습니다.


예컨대 「쌈바춤에 말려서」는 브라질에서 있었던 삼바를 추는 행사에 참여했을 때의 경험을 다룬 작품입니다. '여(余)도 지난 무오년 늦여름 밤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난생처음으로 이 쌈바춤에 말려들어 봤는데,/ 나의 짝- 흑인 예편네가 하자는 대로/ 한참을 껑충거리다 보니 두 다리에 쥐가 나버려서/ 퍽지건히 바닥에 주저앉았드러니,/ "애개개 요새끼! 머이 이따웃게 있어?"/ 하며, 내게 등을 두르고 돌아서서는/ 그녀 볼기짝 밑의 사타구니를/ 저의 할아버지뻘은 되는 내 코에/ 몽땅 바짝 들이대는데/ 야! 찐하기도 찐하기도 한 그 냄새의 벌이라니!// 하눌도/ 이런 남미 리오데자네이로의 밤 뒷골목 같은 데 와선/ 이런 찐한 짓거리도 가끔은 시키며 노시는 거라.'


또 아르헨티나에서 자란다고 하는, 그곳 말로 하면 주정뱅이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꽃나무를 소재로 한 시도 재미있습니다. 화자는 배불뚝이 같이 부른 배를 가진 그 나무들을 보고 마치 디오니소스를 품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고는, 술에 취한 이곳 주민한테 말을 걸어 봅니다. '때도 정히 해 질 녘이라/ 나도 불가불 몇 잔 거나해져가지고/ 지나가는 이곳 국산 주정뱅이 하나더러/ "야, 저게 디오니소스 새끼를 뱄지?"/ 귀에다 대고 귓속말로 물었더니/ "짜식아 그건 사실이다./ 몇 잔 하더니/ 너도 눈이 좀 두두룩해졌구나./ 하지만 이것 하나가 겨우 우리 마지막 국보니,/ 도둑 꾈라,/ 그런 말은 딴 데 가선 내놓지 마라."/ 역시나 귓속말로 대답하더군.' 인용한 이 시들은 반드시 깊은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외국의 장면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행문학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시들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멕시코에서의 수혈」이라는 시는 특이하게도 앞서 언급한 각혈로 인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의 심정을 가감 없이 표현한 시인데, 돈에 미쳐서 무엇하러 여기까지 여행 와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서정주 자신의 후회(!)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재미있습니다.


네 번째 단락인 '아프리카 편'에는 열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의 풍물을 다룬 시로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 「킬리만자로의 신화 1」, 「나이로비의 두견새 소리」, 「상아해안국 아비장의 내 깜둥이 친구 아자메」, 「띠아싸레 감옥의 검은 죄수들」 등이 실려 있습니다. 또 「아프리카 흑인들의 근일의 자신만만」은 그야말로 걸쭉한 입담을 보이는 시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나이로비의 두견새 소리」를 인용해 봅니다.


햇빛이 늘 너무나 밝고 뜨거우면은

슬픔도 슬픔대로 꽃봉오리가 돼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일까?


서러운 두견새의 서러운 소리도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쯤에 오면

이미 싱그러운 꽃숭어리가 되어서

따로 서러울 것도 없이만 되는 것을

나는 한밤중

나이로비 마사이 족의 마을에 와서

난생처음으로 비로소 알게 됐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우리 시인

영랑 김윤식이

내 곁에서 함께 들었으면 싶어졌다.

그가 말한 '찬란한 슬픔의 봄'의

"그 슬픔이 어디 따로 남았느냐?"고

나직이 다우쳐 물어보고 싶어졌다.


만 송이의 새 모란꽃 불 밝혀 피는 듯한

아프리카 마사이 마을의 화창한 두견새 소리

그 소리에 얼려 들어 뒤뚱거리고 섰다가

'큰 슬픔은 큰 기쁨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새로이 깨닫게 됐다.


동양에서 슬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이곳에 와서는 맑게만 들리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 쓴 시입니다. 김영랑은 서정주의 평론 속에서 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선배 시인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역시 매우 쉽게 읽히는 기행 감상의 시편이지만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슬픔의 기쁨으로의 승화에 관한 문제는 시인이 자신에게 부여한 오랜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충 읽고 넘어가게 하지 않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4.


다섯 번째 단락인 '유럽 편'에는 마흔두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실린 시들에서는 유럽의 전통문화나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등장시킨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서반아의 가가대소」, 「빠리의 노래」, 「취리히의 새벽 인상」, 「비엔나」, 「쾨른 성당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를 생각하며」, 「덴마크의 공기 속에서는」, 「노르웨이 미녀」, 「런던 탑의 수수께끼(오페레타)」, 「이오니아 바닷가에서」 등의 작품들은 각 나라의 인상들을 각기 참신한 방법으로 묘파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스페인의 가가대소」는 스페인 사람의 웃음소리를 '가가가(呵呵呵)'로 재미있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들 중에는 외국 사람들의 입담을 통해 그곳의 정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웃음소리 속 입담에는 시대 인식에 대한 그들의 만만치 않은 식견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2차대전이니 뭐니 뭐니 하는 건/ 또 그 을마나 육시 팥밥이었냐?/ 발 싸악 씻고 들어앉아서/ 우리는 거저 구경이나 했노라./ 불쐬주에 훌라멩고 춤이나 추시며/ 넌지시 멀찍이서 구경이나 했노라./ 우리가 못났냐?! 어?! 우리가 못났어?!/ 잡것들 지랄 마라. 가가가가 가가가!"// "말씀이사 바루 말씀이지만/ 싸움이사 우리가 먼저 선수들로서/ 남아메리카 전부를 도살장도 만들었다만/ 그게 뭐였냐? 그따윗 즛이 뭐였어?/ 인디오건 깜둥이건 마구 쑤셔서/ 모레노의 깡패들, 모레나의 창녀들,/ 그런 거나 구석구석 까 퍼트려 놓았네!/ 아이구 하누님 마시옵소사/ 그따위 낭비는 죽어도 인젠 다시는 안 해야지./ 가가가가가가가! 가가가가가가가!"'


개인적으로 유럽 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 중의 하나는 「쾨른 성당에서」였습니다. 쾰른 성당의 뾰족뾰족한 고딕 양식과 기독교의 정신을 대비시키고 있는 작품인데, 재미와 깊이가 동시에 살려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쾨른 성당 왈

하눌님이시여! 보소서! 보소서!

이 세상 그 누구의 신앙과 기도와 열모(熱慕)가

우리보다 더 높이 치솟아 오른 일이 있나이까?

하눌에 불구멍이라도 숭숭 뚫을 듯이

뾰족뾰족 높이 불타오른 일이 있나이까?

예에?

절대로 무시해 보진 못하실 줄 아옵나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로 좋은

쾨른의 진짜 향수로 몸과 마음을 씻었사옵고,

하눌의 별들보다도 한결 더 깨끗이 간절히

당신의 곁에 바짝 가까이 있길 욕망합네다.

보소서! 보소서! 보소서!

키다리 수풀처럼 늘어서서 불타는 우리 뾰족탑들을……

우리는 누워서 자는 돌에도 모조리

불을 붙여설랑 일어세워 놓았나이다!


하눌님 왈

고로코롬 안달이 닳은

정성이사 가상키도 가상키도 하네만서두

지나치게 자네들이 뾰족뾰족 치솟아 오르는 통에

사실은 바른대로 말을 하자면

나로서도 좀 아프고 뜨끈뜨끈하여서

견디기 어려운 때가 더러 있구만.

목숨엔 불가불 정신 등급도 있는 것인데

부뚜막에 강아지 올라앉듯이

또는 데모로다가 떼로 몰고 오듯이

그렇게 하눌에까지 드나드는 건

나는 본심으론 좋아하지 안허이.

동글동글 그렇게 살 순 없는가?

나직, 나직, 동글, 동글,

나직히 동그스럼히 그리 어찐 살 수 없어?

그러나저러나 간에

무불통지인 내가

나지막히 사는 자네들이라고 해서

모르고 지내는 것도 아닌 바에 말씀야.


그 밖에도 「까르띠에 라뗑」, 「서서 목동의 각적」, 「도이체 이데올로기」, 「마네켄 소년이 오줌을 잘 깔기고 있는 걸 보고」, 「필요한 피살」 등도 재미있는 시들입니다.


한편 또 다른 시 「몽블랑의 신화」와 「괴테 생가의 청마루를 보고」는 『질마재 신화』에 실렸던 「신부」와 「외할머니네 뒤안 툇마루」의 내용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몽블랑의 신화」는 마치 「신부」의 내용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어져 있는 것 같은 신기함을 줍니다.


신부와 신랑이 겨울 몽블랑 산속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는데요. 가파른 어느 낭떠러지에서 신랑이 실족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버린 것이 아무리 찾아 보아도 영 눈에 띄질 안했습니다. 몽블랑의 산신녀가 그 신랑이 탐나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지요마는……

해가 바뀌도록 찾고 찾고 또 찾았지만 신랑의 모양은 어느 바위틈에도, 흙 위에도, 냇물 속에도, 아무 데도 나타나 보이질 안해, 신부는 할 수 없이 이 몽블랑 산골에 초막을 엮어 살며, 그를 찾아 기다리노라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다섯 해가 가고, 열 해가 가고, 여러 십 년의 세월이 첩첩이 흘러서 드디어는 파뿌리빛 머리털의 할마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초봄 산골의 눈녹이 때의 일인데요. 눈 녹은 물이 새로 흘러내리는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서 신부는 그 물속에 잠기어 떠내려오고 있는 그네의 신랑을 겨우 다시 보게는 됐는데, 그건 하도나 오랜만이라서 숨결이사 날라간지 오래였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나 머리털이나 살결의 젊음은 그때 신혼 때 그대로더라구요.

몽블랑 산의 중턱부터 위에는 일 년 내내 눈에 덮여 꽁꽁 얼어 있으니, 신랑은 그 어디 바위 사이에 걸려 냉장되어 있다가, 여러 십 년 만의 이상난춘(異常暖春)의 드문 기온에 풀려 흘러내려 온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말씀을 하기도 하고, 또 "아닐 거다. 그건 몽블랑의 산신녀의 짓일 것이다"고 하기도 합지요마는……


이미 「신부」를 읽어 본 우리는 이 작품 역시 동일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 속에서 '몽블랑의 산신녀'가 질마재 마을의 당산나무와 거의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구라'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한 추임새일 뿐입니다. 행방불명이 된 상대의 일로 인해 눌러앉고 만 연인의 이야기나 저온의 자연으로 인한 시신의 냉동 현상 역시 사실에 기반한 구라일 것입니다.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몽블랑의 신화」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 담겨진 철저한 현실의 슬픔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5.


여섯 번째 단락인 '중근동/호주 편'에는 열세 편의 시가 실려 있고, 이어지는 마지막 단락인 '동남아 편'에는 열여덟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서아시아와 호주에서의 일화를 다룬 전자의 시로는 「나자렛 마을의 인사말」, 「토이기 신사의 지혜」, 「기자의 피라믿들을 보고」, 「아라비아 사막도」, 「젯다의 석유 졸부」, 「방랑하는 한 젊은 벽안 여인과의 대화」 등이, 동남아시아에서 대만과 일본에 걸친 나라들에 관해 쓴 후자의 시로는 「에베레스트 대웅봉이 말씀하기를」, 「살아 있는 여신 앞에서」, 「인도의 여인」, 「태국 여자들의 춤을 보고」, 「장개석 선생의 능을 다녀오며」, 「나라의 동대사 대불전 지붕을 보며」, 「오사까 역 화장실에서 보니」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에는 여행 중 만났던 재미있는 사람들과의 일화가 여럿 실려 있습니다. 「토이기 신사의 지혜」에서는 이스탄불의 현지인이 합승하는 지혜를 발휘해 관광객들이 바가지 쓰기 쉬운 택시 값을 오히려 절반으로 줄여주고는 자기도 싼 값에 돈을 내는 이득을 취하고, 「장개석 선생의 능을 다녀오며」에서는 장개석의 묘 앞에서 택시를 타니까 기사가 그곳의 명물인 말린 두부까지 한 봉지 사 주면서 '우리 장 총통님을 너는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너 같은 외국사람들한텐 에누리해 태우고 있다. 아무 염려 마라. 딴 쪽에서 더 벌면 되는 것 아니냐?'고 너스레를 떱니다. 이렇게 외국 여행에서 한 번쯤 겪어볼 만한 에피소드들이 시집의 군데군데에 실려 있어 실감을 더해 줍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항에서 만난 「젯다의 석유 졸부」입니다. 조금 길지만 재미있어서 전문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젯다의 사십짜리 석유 졸부는/ 코끼리 어금니의 지팽일 짚고/ 두둑한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즈이 아범 나이는 넉넉히 되는/ 나보고도 손 까불어 오라고 하데./ 허허허 이럴 수가 어디 또 있나?// '호로자식'이라고 불쾌했지만,/ 우리 일꾼 수만 명 받아 주었기/ 못 이긴 체 대지팽이 끌고 갔더니/ 대나무 지팽이는 처음 봤는지/ 제 것하고 내 것을 바꾸자 하데./ 허허이 이럴 수가 어디 또 있나?// 그런데 그 상아의 지팽이 값은/ 내 것보다 몇 갑절 비싼 것이라/ 그걸 셈해 꾹 참고 바꿔 줬더니/ 내 걸 짚고 살며시 으쓱하는 게/ 옥황상제보다도 한결 더하데./ 허허이 이럴 수가 어디 또 있나?'


반대로 「기자의 피라믿들을 보고」나 「에베레스트 대웅봉이 말씀하기를」과 같은 시들에서는 외국의 명소들을 본 감상이나 신화에 담긴 정신적인 측면을 발견하고 있어 차이를 이룹니다. 가령 영생을 위해 피라미드를 세운 이집트의 황제들이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현세에서만 복을 누렸을 뿐 내세는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전자의 시에서의 대목을 보면 그가 현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 과한 현실주의는 또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 백낙청, 「고은 시선집 『어느 바람』 발문」,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창작과비평사, 2006). 이 글에서 그는 고은 시인의 문학적 성과를 서정주를 '쉽게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좀 가소로운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2) 황종연, 「신들린 시, 떠도는 삶」, 『미당 연구』(공저, 민음사, 1994).

3) 서정주, 「내가 본 이승만 박사」, 『안 잊히는 사람들』(전집 9권, 은행나무, 2017).

4) 서정주, 「문치헌 일기초」, 앞의 책.

5) 서정주, 『떠돌며 머흘며 무엇을 보려느뇨』(전집 14~15권, 은행나무, 2018) 참조. 이 중 1권 전체와 2권 절반 부분까지가 이 70년대 후반의 여행기에 해당하고, 2권의 나머지 절반은 그 이후 90년대까지의 여행기들을 묶은 것입니다.

6) 서정주, 「문사 이어령」, 『안 잊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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