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10)
근대 미술에서 나타났던 사랑 소재에 대한 낮은 관심이라는 문제는 해방 이후가 되면 다소간의 극복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가로 천경자를 언급했지만, 천경자는 이후 사랑의 문제를 보다 내면적인 세계에 대한 천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천경자 이외에도 해방 이후 사랑과 성을 자신의 주요한 주제로 다룬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중섭, 최영림, 김흥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중섭은 벌거벗은 아이들이라든지 부부의 모습을 자주 다룸으로써 직접적으로 사랑의 세계를 노래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최영림 역시 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아이들이 주로 등장하는 해학적 세계를 표현한 이중섭과 비교했을 때 최영림의 작품에는 성징이 드러난 성인이 주로 등장하며, 빡빡한 화면의 질감과 뒤틀리게 표현한 얼굴 표현 등을 통해 해학만큼의 어떤 무서움이 담긴 원초의 세계를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김흥수는 최영림의 경우처럼 성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천착하고자 한 또 다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김흥수의 작품은 이중섭과 최영림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이중섭이나 최영림의 인물들과는 달리 비율이 현실성을 띠어 훨씬 늘씬하고, 또 작품의 색조도 붉은색에서 노란색 계열을 주조로 하는 매우 자극적인 것인 데서 오는 이질감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김흥수가 이중섭과 최영림에 비해 외국에서의 활동 기간이 훨씬 길었고 또 자신만의 인물 도상을 설정한 그들과 달리 직접 모델을 두고 작품을 그려 온 데서 비롯된 차이일 수도 있다. 아무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중섭이나 최영림과는 또 다른 개성적 업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어 이 단락에서는 김흥수의 작품들을 다루기로 하였다.
1919년에 태어난 김흥수는 앞에서 다루었던 서진달이나 황술조보다는 10여 년이 연하고 이중섭, 최영림 등과는 동년배라고 할 수 있다. 중학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그는 곧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후 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밤의 정물>(1937)이 조선미전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간신히 가족들을 설득시켜 이듬해인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도쿄미술학교 입학을 목표로 가와바타화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기초를 쌓기 시작했다. 앞서 서진달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기본기를 갖출 수 있어야 했는데, 이를 위한 예행 교육을 담당하던 기관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가와바타화학교였다.
1938년의 입학 당시 한국인 신입생은 자신을 비롯해 박성환 등이 있었으며 얼마 뒤에는 이달주가 입학했다고 작가는 회고하고 있다. 김흥수는 이곳에서 배운 지 두 해 만에 이달주와 함께 입시에 성공해 1940년 도쿄미술학교에 함께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이달주는 이후 마흔을 얼마 넘기지 않은 1960년대에 요절했으며, 한편 다른 곳으로 진학한 박성환은 해방 이후 꾸준한 활동을 보여준 바 있다. 이들 외에 가와바타화학교에서 함께 수학했던 이로 박영익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해방 이후 이북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흥수는 작품도 제대로 못 챙긴 채 월남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함경도 미술가동맹에 속해 있던 박영익이 그의 자료를 모두 압수해 갔다고 한다.(주1) 이로 인해 전쟁 이전의 김흥수 작품은 사실상 현존하지 않고 있다. 조선미전 출품작의 경우 정도만 도판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김흥수가 도쿄미술학교에 재학한 시기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로, 일제 말기의 폐해가 가장 극심하던 무렵이었다. 이 시기에 대한 그의 회고는 무용담 같은 일화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 시기 유학생의 상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어 기록으로서도 상당히 흥미롭다. 재학 당시 그는 이달주와 함께 한상익과 친하게 지냈다고 밝히고 있는데, 한상익은 재학 중 일본 장교와 폭행 시비가 벌어지는 일로 인해 퇴학을 당하고 해방되기까지 국내에서 활동했다. 김흥수는 이 사건을 두고 '당시의 조선 학생들의 기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이라 평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작가의 작품세계와 별로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들은 1940년대의 도쿄미술학교 주변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선명하게 그리고 있어 인용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일본이 미국에 무모한 선전포고를 하고부터 일본 국내 정세는 급격히 달라지고 있었다. 동경미술학교의 학제가 5년에서 4년 반으로 단축되었다. 학교에서는 공부보다 공장에 근로작업 나가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고 미술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움직이는 사람은 교수가 아니라 배속장교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을 때였다.(주2)
미술학교에는 하나의 엄한 교칙이 있었다. 그것은 본과 3년이 되어야 공모전에 출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일본 춘양회(春陽會)전에 출품, 입선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의 일본 사람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에 빠져갔다. 식량난은 갈수록 더했고 대중교통 수단인 전철이나 지하철은 언제나 만원을 이루었으며 빈번하게 시행되는 방공연습으로 밤에는 그림 그리기가 힘든 상태였다.(주3)
43년 9월 학기의 졸업생들이 졸업하자 얼마 안 되어 문과계 학생들의 징병연기제도가 철폐되고 일제히 동원령이 내려진 것이다. 학교는 텅텅 비어 있었다. 급우들 모두가 전선으로 끌려간 후 텅 비어 있는 교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멋쩍은 일이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몇 안 남은 학생들은 매일같이 군수품 공장으로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하던 근로동원이 문과계 학생들에게 내려진 동원령 후는 아예 매일같이 공장으로 출근해야 되었다.(주4)
1943년 귀국해 간신히 징병을 피한 그는 이후 <밤의 실내정물>(1944)로 마지막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해방 이후 한동안 국내에서 활동했는데 1949년에 열린 1회 국전에서는 <나부군상>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가 강제로 전시가 검열되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도 있다. 이후 4회 국전에 발표된 <한국의 봄>(1954)은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며 추상성을 접목하기 이전의 실감 있는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쓰인 구도는 이후 프랑스 유학 시절에 <한국의 여인들>(1957)에서 바뀐 화풍으로 다시 그려지기도 했다.
1955년, 김흥수는 프랑스로 유학하여 1961년까지 활동했다. 이 시기에 입체파를 비롯한 현대미술의 양식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고 작가는 회고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화풍도 뚜렷하게 바뀌게 된다. <길동무>(1957)나 <콤포지션>(1957) 등은 인물화에서의 그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생략화된 인물 표현과 점묘법을 연상케 하는 필치가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은 비슷한 시기의 가령 이성자의 작품과도 닮아 있다. 이 중 <길동무> 등의 경우 <한국의 봄>에서 볼 수 있었던 향토적 소재가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콤포지션>이나 <사랑>(1958), <고민>(1960) 등의 경우 서 있는 누드와 누운 누드의 두 인물을 그린 것으로서 성적인 테마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파리에서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한 김흥수는 이후 1967년에 미국으로 활동 거처를 옮겼다. 1960년대가 되면 그는 기존의 유화 필치에서 콜라주 등의 새로운 기법에 천착해 <절터>(1964), <세모>(1965), <군무>(1966)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모자이크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표현 방식으로 이동해 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도미 이후의 <무한>(1970)이나 <무기와 창살>(1970)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크고 작은 원과 사각형이 자주 등장하는 자신만의 추상화풍도 확립하게 된다.
이러한 양식적인 확립에 이어 비로소 등장한 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조형주의' 미술의 개념이었다. 조형주의 양식이란 쉽게 말하면 개별적이고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두 화면을 붙여서 하나의 작품으로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보다 간단한 개념처럼 보인다. 작가의 입을 빌어 말하면 이 양식은 '하나의 주제를 놓고 눈에 보이는 구상세계(양)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세계(음)을 두 개 이상의 화면에다 그려 작품으로 조화시키는 작화방법'이다. 즉 아무 이질적인 것이나 붙여도 좋은 것이 아니라 구상과 추상을 각각 그려도 동일한 주제를 생각하고 그려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한 것이다.
김흥수는 구상 작품과 추상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전시를 보던 중 이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획기적으로 느껴지는 한편으로 기독교 회화에서의 3단으로 된 제단화 등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그의 작업은 비슷한 시기의 가령 곽인식이나 안상철의 작업과 함께 회화에서 화면이 지니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작업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조형주의 작업을 시작한 1970년대의 작품들을 구상 작품의 주제별로 묶어보면, <염(念)>(1977)이나 <오(悟)>(1977)와 같은 불상 소재의 그림들이나 <백봉승무도>(1978)를 비롯한 일련의 승무 그림들이 있고, 또 <조국을 그리는 용진이>(1979)와 같이 자신의 아들을 소재로 다룬 경우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꿈>(1973), <모린의 나상>(1977), <누드>(1978), <지희의 나상>(1979) 등 일반적인 누드화와 추상을 결합한 경우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물과 정신의 관계를 비교적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앞의 주제들과는 달리 누드화를 소재로 한 작품의 경우 그 연관관계를 찾기가 비교적 난감해지는 것이다.
앞서 김흥수는 이중섭이나 최영림과는 달리 현실성이 강한 인물로서 누드를 그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 한편으로 1장에서 언급했듯이, 현실성을 강조한 누드화가 우리 미술에서는 에로티시즘 없는 인체 탐구의 목적으로서만 추구되어 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김흥수는 결국 성을 자신의 주요한 주제로 다루면서 동시에 현실성을 중시한 누드를 그렸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는 곧잘 서양 회화에서의 성적 테마의 딜레마로 이어지기 쉬운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공허함이 바로 그것이다. 조형주의 양식의 채택은 그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만한 경로였을 것이다.
1979년의 화집 후기에서 작가가 적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나름대로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된다. '(내) 작품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말할 것이다. 제일 마지막 원색판에 수록된 <지희의 나상>을 다시 한 번 들춰보라고… 그리고 손으로 추상 쪽을 덮어 보고 나서 다시 나상과 추상을 함께 보라고! 그때 그 나상은 추상화의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빛날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성적 소재가 지닐 수 있는 공허함의 위험성을 추상의 정신성을 통해 보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더러 단순한 해결책으로 보이는 혐의도 없지 않지만, 아무튼 조형주의 양식은 그로 하여금 성적 소재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그의 연인 소재 작품은 누드화에 비하면 적은 편이지만 이에 대한 상당히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두 인물의 모습을 그린 <사랑>(1973)을 끝으로 그의 연인 소재 작품은 모두 조형주의 양식을 하고 있는데, <두 포즈>(1981)나 <두 여인>(1982)의 경우처럼 가벼이 누운 두 사람을 그린 작품이 있는가 하면 <쌍>(1986), <정>(1987), <파천>(1989) 등의 작품은 절망한 듯 쓰러져 있거나 그런 서로를 감싸안고 있는 두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밖에 <잉태>(1989)와 같은 작품은 직접적으로 성관계를 하는 연인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 소재의 파격성이 주목되며, <3인>(1987)과 같은 작품은 끌어안은 연인과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인물을 배치한 특이한 상황을 그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김흥수의 연인 소재 작품에서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경우로는 <망부가>를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두 연인은 한쪽은 구상 쪽의 공간에, 다른 한쪽은 추상 쪽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이 그림 외에도 그의 작품 중에서는 <염원>(1979), <성에 눈뜬 소년>(1991) 등 두 공간에 구상과 완전 추상을 대비시킨 것이 아니라 구상과 추상화된 구상을 배치시킨 경우가 종종 보인다. 작가의 어법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이런 구도는 인물의 외면적인 상황과 내면적인 심리를 병치시켜 본 것임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가령 <염원>의 경우 외면의 상황이 북을 치며 춤을 추는 아름다운 장면인 반면 내면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무거운 심정임이 드러나 있고, <성에 눈뜬 소년>의 경우 외면이 천진한 아이의 얼굴이라면 내면은 얼굴이 두 갈래로 나뉘는 등 여러 복합적인 심리가 어우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새빨간 분위기 속에 서 있는 인물의 모습을 왼쪽에 놓고, 이와는 상반되게 휘갈겨진 인물의 얼굴을 오른쪽에 놓은 <망부가>의 구성 또한 따라서 이와 비슷한 관계로 판단할 수 있다. 작품 속의 두 인물을 연인으로 본다면, 왼쪽의 인물은 괴로움과 혼란 속에 서 있는 연인 중 한 명의 모습으로, 그리고 오른쪽의 인물은 그가 떠올리고 있는, 어렴풋한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떠나간 다른 연인의 모습일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망부가>인 것 또한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망부가>와 그 계열의 작품들은 김흥수의 조형 원리와 그것이 주는 감흥을 보다 문학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작품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기의 작품에서 김흥수는 자신이 과거에 시도했던 거대한 규모의 작품들을 다시금 제작하기도 했다. <미의 심판>(1982) 및 같은 주제를 더욱 확대시킨 동명의 <미의 심판>(1997)을 비롯해, <낙원의 봄>(1985), <전쟁과 평화>(1986),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88) 등은 후기에 제작된 군상 소재의 대작들이다.
1) 『예술가의 삶: 김흥수』(혜화당, 1993), 59~65쪽 참조.
2) 위의 책, 81쪽.
3) 위의 책, 84쪽.
4) 위의 책, 89~90쪽.
도판 출처:
1) 김흥수, <사랑>: artnet 홈페이지
2) 김흥수, <파천>: 서울경제 홈페이지
3) 김흥수, <잉태>, <망부가>: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