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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Oct 26. 2022

3. 연인의 쌍 (2)

한국미술, 열두 개의 변주 (9)

사랑 소재의 위축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결국 연인 또는 사랑 소재는 조선 말기로 가면 성풍속도의 등장과 같이 아예 장르적인 특화로 이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 밖의 일반적인 풍속화에서는 신윤복의 개척으로부터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민화의 경우가 있기는 하나, 민화가 기본적으로 전문적인 화가의 작품이 아니며 이 단점은 인물화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별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고 있지는 못하다.


이렇듯 조선 말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미술에서의 사랑 소재의 위축 경향은 근대로 가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우리 근대 미술에서 사랑 또는 연인 소재가 다루어진 작품이 너무나 적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 점은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근대야말로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예술에서 사랑과 같은 소재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에 부응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장을 보태서 말한다면 이것은 당시 우리 미술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어떤 보수성을 말해주는 현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작가들이 사랑에 대한 사고방식의 근대적 변화에 대체로 시큰둥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전통적인 장르였던 초상화의 세계에서는 근대적 사고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부 초상화의 본격적인 부활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나름대로 꾸준히 그려졌던 부부 초상화는 언젠가부터 제작이 사실상 끊어지기 시작했다. 강세황의 <복천 오부인 초상>을 비롯한 극히 드문 사례를 제외하면 여성 초상화의 제작 사례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 여성 초상화가 거의 그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흔히 여성 차별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물론 깔끔한 해석이지만,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가령 숙종은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지시한 바 있으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안휘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분명히 왕비상도 그려졌다. 그러나 숙종 때에는 도덕규범이 더욱 엄격해졌다. 낮은 신분의 남자인 화원이 존귀한 왕비의 얼굴을 치켜보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하들의 반대도 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엄격함과 경직성을 엿볼 수 있다.'(주1) 그러니까 왕비가 왕보다 낮아서 그리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화원이 왕비를 대면하여 그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제작하지 못한 셈이다. 유교 사회의 메커니즘이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겠으며 이로 보아도 여성 초상화의 쇠퇴가 보다 복잡한 논리와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근대에 들어서 이루어진 여성 초상화 및 부부 초상화의 부활은 근대 미술의 한 쾌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가장 많은 부부 초상화를 남기고 있는 화가는 가장 대표적인 초상화가였던 채용신이었다. 흔히 잊기 쉬운 사실이지만 그의 미술사적인 공로 중의 하나는 여성 초상화의 전형을 다수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초상화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조선시대에서 거의 공백에 가까웠던 여성 초상화의 자리를 그는 보충해 주었다. <황종관 부부 초상>(1933~34)을 비롯해 <노부인상>(1926), <노부인상>(1932) 등은 노년기에 그린 그의 주요 작품들로서 개인의 초상인 동시에 한 시대의 초상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채용신을 통한 초상화의 근대적 발전에 비해, 풍속화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신윤복 등의 선례를 계승할 만한 이렇다 할 작품을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거의 유일한 예외가 고희동의 <청계표백도>(1915)에서 찾아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고희동은 잘 알려진 대로 1910년대에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배웠으나 이후 보다 재능이 있었던 동양화로 전향했으며, 부분적이지만 기존의 동양화에 새로운 시도를 접목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청계표백도>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바로 그런 새로운 가능성의 실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소품이라고는 하나 이 작품은 전통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가 어색하지 않게 조화되고 있다. 멀리 있는 산의 경우 전통적 화풍이 구사되어 있지만 화면 가까이에 있는 강가의 파진 부분 같은 데에서는 서양화의 사실적 표현이 은근하게 묻어나고 있다.(주2) 화풍만큼이나 소재 역시 전통과 근대를 잇고 있다고 생각된다. 남녀가 함께 빨래를 하고 있는 작품 속의 광경은 인물들의 얼굴에 비친 은은한 미소라든지 남성의 웃옷 벗은 모습 등의 세부적인 표현들과 맞물리면서 평화롭고도 건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빨래가 흔한 주제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김홍도나 신윤복의 작품에서 빨래가 여성들만이 하던 일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풍경이 정말로 이러했다기보다는 이렇게 공존하는 모습을 지향하는 취지였을 것이리라고 짐작된다.


<청계표백도>는 얼핏 봐서는 별것 아닌 작품 같아 보여도 근대적인 세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다. 또 19세기까지의 풍속화의 전통을 참신하게 계승하여 근대까지 잇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기도 하다.


김인승의 <화실>과 이쾌대의 <카드놀이 하는 부부>


고희동의 <청계표백도> 이후 우리 미술에서 연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오래 기억될 만한 작품을 남긴 작가로는 역시 서양화에서의 김인승과 이쾌대를 꼽을 수 있어 보인다. 앞서 누드화에 대해 다룰 때에도 언급했지만 이 두 작가는 1930년대 이후 인체 표현에 큰 노력을 기울여 당시의 미술계로서는 거의 최상급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인승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던 1937년 <나부>와 함께 <화실>을 발표해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의 출세작에 해당하는 작품들이고 지금 보아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화실>은 중후한 색채, 이상적인 인체 비율, 안정적인 구도 등 그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후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또 다른 2인 인물화인 <잔디[芝生]>(1938)를 발표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구성의 불안을 안고 있어 이 작품에 못 미친다는 인상을 준다. 김인승은 이후 <춘조>(1943)와 같은 단체 인물화를 제작하는 등 스케일의 확장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다시금 1인상 위주로 돌아온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해방 이후의 작품 중에서 <골프장에서>(1964)는 몇 안 되는 그의 또 다른 연인 초상에 해당한다.


<정물>(1932)에서 볼 수 있듯이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사실적 표현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만 같은 이쾌대는 1930년대 후반 이후 사실주의에 주력해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창출했다. 이 중 <카드놀이 하는 부부>(1930년대)는 <2인 초상>(1939)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연인 초상으로 꼽힌다. 인물의 극단적인 명암 대비를 통해 화면의 개성을 노린 <2인 초상>에 비해 <카드놀이 하는 부부>는 한결 친근하고 실감이 느껴진다. 작품 속의 연인은 마치 보는 사람 쪽에서 방금 부른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는 화면의 실감을 키워 주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도된 기술이라고 생각된다. 인물의 묘사 역시 매우 정확하다. 스냅사진 같은 설정 때문에 순간적으로 화면 속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준다. 이쾌대는 이후 여러 가지 개성적인 작업들을 보여준 바 있지만 이런 현실 소재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장우성의 <화실>과 천경자의 <목화밭에서>


한편 동양화 쪽에서는 연인 소재에 가까운 작품으로 장우성이 <화실>(1943)을 발표한 바 있다. 조선미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의자에 앉아 도록을 읽고 있는 여성과 그 뒤로 이젤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 남성을 그리고 있다. 독창적인 소재와 바닥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안정적 구도가 돋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반대쪽을 향해 앉아서 친밀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도록을 읽는 인물이 화가의 연인이 아니라 모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델이 앉은 자리가 화구 바로 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위치상 가운데의 의자는 화가의 의자라고 보아야 맞다. 이 상석을 차지할 수 있는 이는 화가의 연인밖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장우성 자신과 그의 아내를 소재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우성 이후 동양화 분야에서 연인 소재를 훌륭하게 다룬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천경자였다. 해방 이후 그는 자기 화풍을 확립하기까지 이십여 년간 매우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목화밭에서>(1954)나 <전설>(1962)은 그의 이 1950~60년대의 대표작으로, 각기 다른 화풍으로서 서정적인 연인 도상의 전형을 이룩하고 있다.


이 밖에 연인 소재가 구사된 근대 작품으로는 안승각의 <호반>(1939) 등이 확인된다. 호숫가의 나무 아래 피리를 부는 인물과 그를 바라보는 인물, 그리고 염소처럼 생긴 동물을 위의 작품들과는 달리 생략적인 필치로 그린 <호반>은 당시 심형구로부터 '피사로를 연상할 만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주3) 그는 해방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호반>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분위기의 작품인 <피난민>(1942)이 소장되어 있다.




1) 안휘준, 『한국의 미술문화와 전시』(사회평론, 2022), 173쪽.

2) 홍선표, 『한국 근현대 미술사론』(솔과학, 2022), 525쪽.

3) 심형구, 「제18회 조선미전 인상기」, 『동아일보』(1939.6.10.~6.14).


도판 출처:

1) 김인승, <화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

2) 이쾌대, <카드놀이 하는 부부>: 미디어대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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