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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민 Apr 19. 2023

작은 것들을 위한 시__2

한 사람의 예술이 모두에게 닿을 수는 없지만


교환학생을 와서 무언가를 남기고 배워야 한다는 편견에서 늘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 온 게 뭔 대수인가 싶기도 하고. 유럽은 이렇더라, 하는 호들갑은 영 질색이다.

무엇보다 애써 의식하여 얻어지는 그것은 일차원적 자극에 불과하다. 어차피 진정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애쓰지 않아도 나에게 찾아온다, 늘 그래왔듯이.


좋아하는 르누아르 그림. <우산>


여러 나라를 다녀도 미술관은 꼭 들리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미술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고, 위대한 그림을 보고 나도 뭔가를 느껴야지!라고 유치하게 생각했다기 보단 불가항력적인 힘이 내 발걸음을 이끈다고 해야 할까. 그림을 그리는 엄마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당장 파리에 있는 오르세 오랑주리부터 해서 벨기에 마그리트 미술관, 런던 내셔널 갤러리나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까지. 꽤나 많은 그림을 보러 다녔지.


구글에서도 뻔히 볼 수 있는 그림임에도 미술관을 가는 이유는 분명 있다. 미술관은 화가와 나를 매개해 제3의 세계를 창조해 내니까. 물리적으로 1미터도 안 되는 그림과 나의 거리감은, 현재의 나로 하여금 시간을 거슬러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붓질을 하고 있었을 한 예술가를 사유하게 한다. 늘 말해왔듯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수수께끼 같은 작품의 완성은 관객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니까. 예술가가 내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은 관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예술의 지경은 한 차원 더 확장된다.


헌데 그렇게 수많은 그림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저게 왜 명화인가,라는 점이다. 일개 대중에 불과한 나지만, 적어도 예술을 완성시키는 관객의 입장에서 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폴 세잔의 사과, 반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극찬받는 세기의 명화들은 내게 일차원적 자극에 그친다. 그래서 난 인상주의 작품들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 줄 알았지만 바로크의 루벤스나 렘브란트 그림도 그랬다. 심지어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은 되려 반감을 일으킬 지경이다. 이 정도면 내가 눈 뜬 장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 다 좋다는 건 왠지 싫은 홍대병 기질을 벗어나 바라봐도, 도무지 저 작품들은 왜 극찬을 받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오디오 가이드를 열심히 듣고 작가와 그림에 대한 뒷배경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거기서는 해당 작품에 드러나는 기술적 특징부터 해서 작가의 생애, 때로는 해당 작품의 배경과 메시지를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렘브란트의 두터운 신념은 굳은 신앙심에서 우러난 것이며 ...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작품 해설은 되려 내게 반감을 일으키곤 한다. 그가 굳은 신앙심을 가졌다는 말은 어떻게 확언될 수 있는 것인지.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다면 무엇을 의도했다는 것인지. 작가 뇌 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나, 따위의 의문이 머릿속을 떠도는 것이다.

저렇게 친절하게 나열된 설명은 분명 배경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어쩌면 관객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종교적 의미나 명암 대비에 갇혀 작품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추앙하는 단일한 영화감독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을 만들고 나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없다." 역시 이 남자 멋있다


피 땀 눈물 흘려 만든 자신의 작품에 메시지 혹은 주제가 없다고 답하는 저 배짱의 배후에는 관객이 그것을 주체적으로 찾길 바라는 바람이 숨어있다. 과연 그렇다. 작가의 의도, 메시지 다 말해주고 나서 이래서 이 작품이 위대하다! 고 말한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나.


<기생충>에서 봉준호는 오프닝에서부터 기우네 가족이 왜 가난에 빠지게 됐는지를 묘사하지 않는다. 감독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사고하게 되고, 근원을 찾기 힘든 우리 사회의 암묵적 계급차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더 강하게 각인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의 마지막 선택에 관해, 설명을 들으려 하기보다 설명하려 할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도, 세잔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친절한 작품 해설이 설명해 준 작품의 의도에는 드러나지 않는, 오로지 심연으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의 큐레이팅이 그것에 테두리를 씌우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드는 요즘이다.  




어찌 됐든 큐레이팅과 친절한 작품 해설을 들은 이후에도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걸작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일차원적 자극에 의한 감탄이 밋밋하게 떠돌 뿐이었지.


느끼지 못해도 그만이지만 난 이번에도 작은 것들에 주목하고 싶었다. 수많은 언론의 찬사에 빛나는 걸작들 곁을 조용히 지키고 있는,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의 자그마한 작품들. 주목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의 슬픔이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지만, 운명처럼 다가오는 그림은 분명 존재한다.


George Hendrik Breitner, <The Red Kimono>


한 여자가 누워있다. 그녀가 발붙인 곳은 어둑한 방안이다. 발목 끝까지 내려온 붉은색 기모노는 여자의 다리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다. 붉은 기모노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는커녕 어둡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실내 공기를 부각할 뿐이다. 하지만 가장 차분한 것은 단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단일한 피사체인 한 여자다. 이 방 안의 분위기와 여자는, 채도와 명도 심지어 질감 까지도 대비를 이룬다. 그 어떤 푸른 색도 사용되지 않은 생명력 없는 이 그림 속에서, 방 안을 가득 메운 어둠에 여자는 언제라도 잠식될 듯하다. 관객의 시선은 여자의 손에 쥐어진 꽃 한 송이로 향한다. 이 꽃은 그녀에게 무슨 의미인가. 그녀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그 모습이 심히 고독해 보이지만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을 것만 같다.


단일한 피사체와 그 손에 들려진 꽃. 그림을 지배하는 어두움과 붉음의 강렬한 대비. 그리고 다가오는 동행자의 부재와 단일존재의 고독에 대한 인식. 그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마주한 그림이지만 명암의 대가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작품들보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이 그림은, 검정보다 짙은 빨강으로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을 왜 좋아하냐고?

진정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이제껏 내 인생에서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극히 드물지만, 거기엔 전부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가가, 고흐와 피카소를 건너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미적 체험은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한다.


살바도어 달리의 그림은 황홀하고 파블로 피카소는 내게 자의식 과잉이다.

제이 콜은 그 모든 음악이 훌륭한 래퍼인 반면 릴펌은 내게 단순히 무모한 소년일 뿐이다.

박찬욱은 추앙받아 마땅하지만 홍상수는 더 욕하기도 질릴 지경이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냐고 묻는 다면 결국 예술이 주는 가치의 완성은 관객의 몫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그렇다고 릴펌이 하는 음악이나 홍상수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는 얘기는 못하겠다.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 맘 아니겠어? 각자가 추앙하는 예술가가 있나 하면 냅다 내려치는 예술가도 있는 법이다. 예술가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무릇 한 사람의 예술이 모두에게 가닿을 수는 없지만...


그린 사람 : 승민맘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루벤스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 유전자를 받은 게 분명함에도 같은 것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개인전도 열고, 무엇보다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엄마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엄마의 유화들을 보면서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은 것들도 많다. 대신 그림을 왜 그리냐고 물어본 적은 있지. 내게 돌아온 답은 절제된 우아함의 추구, 사색, 개인적 성장...이었다.


예술은 여전히 위대하다.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표현과 성장 수단인 동시에 관객의 사고를 열어젖힌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심연에 닿는 순간 탄생하는 전혀 새로운 어떤가를 인간에게 선물한다.

빈지노가 말했지. Art, how fun is it? 과연 맞는 말.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반딧불이를 보낸다는 아이유의 가사처럼,

이별을 그릴 때 여자의 표정을 묘사하지 않고 관객에게 그 아픔을 넘긴 뭉크의 그림처럼,

낭만과 은유 가득한 예술을 난 사랑 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과 행동들도 그러한 예술에 닿길 바란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한 목동이 별이 내려앉은 밤이었다고 여기며 모든 기억을 간직하듯,

<라라랜드>의 세바스티안이 웃으며 피아노를 계속 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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