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Jul 16. 2019

#226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벌써 20년 쯤 지난 일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마, 아버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아직 학생일 때였으니까 장례식장에 가본 적이 있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는 더 드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수업이 다 끝난 저녁 즈음에 학급 아이들 거의 대부분이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때는 한 반이 50명을 훌쩍 넘겼을 때다. 조금씩 모은 조의금을 누군가 건넸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절을 했다.  


상을 당한 친구는 평소에 농구를 같이 하던 아이였다. 자세가 낮았고 드리블을 잘 했다. 말이 없고 순한 친구였다. 절을 마치고 친구의 손을 잡았을 때 나름 위로할 말을 찾기 위해 조금쯤 쩔쩔 맸던 기억이 난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별 위로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서툴게 조문을 마친 뒤에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기 뷔페였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에는 한 사람당 만원이 채 되지 않는 허름한 고기 뷔페가 유행이었다. 50명쯤 되었던 우리들은 냉동 삼겹살과 빳빳한 김밥을 접시에 담아 열심히 날랐다.  


장례식과 고기 뷔페의 모습을 빛 바랜 사진첩에서 꺼내 올린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을 찾아 뵈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늘 가느다란 기억의 실을 더듬어 어제와 오늘을 한데 이어보곤 한다. 그 때 그런 일이 있었지,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니... 시계바늘을 순식간에 옛날로 돌려놓는, 그래서 그만큼 많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음을 깨닫게 해주는 화제들. 그런 대화가 오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장례식장 갔다가 고기 먹은 기억 밖에 없지?”하고 선생님은 웃으셨다. 그랬다. 그 기억 뿐이다. 그것도 더듬어서 겨우 되살려낸 기억.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하긴 했다. 장례식 문상을 갔다가 왜 고기 뷔페를 먹게 되었을까.  


그 친구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집에서 가까운 산동네였다. 언젠가 친구가 집에 들렀다 나온다며 아주 작은 골목길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는 동네 전체가 다들 고만고만했고,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저 녀석이 가정 형편이 많이 어렵구나’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스스럼 없이 친하게 지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제대로 된 절차를 갖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례는 사흘을 다 채우지 못했다. 발인은 돌아가신 다음날이었다. 빈소도 식장에서 가장 작은 공간을 빌렸다. 우리가 장례식장을 찾은 것은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저녁인 셈이다. 작은 빈소에 50명 쯤 되는 학생들이 우루루 들어갔다.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조문객에게 내는 음식도, 차림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이끌고 병원 맞은 편의 고기 뷔페로 데리고 갔다. 종일 학교에 있었으므로 허기진 고등학생들이었다. 배불리 먹일 만한 곳이 거기 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냉동 삼겹살과 빳빳한 김밥을 접시에 담아 열심히 날랐다. 식혜가 달고 시원하다며 많이도 퍼 마셨다.   50명 분의 밥값을 누가 냈는지 나는 20년 동안 알지 못했다. 어쩌다 고기 뷔페를 가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아무래도 나중에 그 친구가 들은 것 같다, 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선생님이 살던 아파트 경비실에 누군가 속옷 상자 하나씩을 놓고 갔다. 이름도, 연락처도 없었다. 그냥 몇 호 사시는 선생님께 전해달라고, 그렇게만 부탁하고 갔다 한다. 얼굴 생김을 물어보고 나서야 선생님은 그 친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몇 년 동안 그리 하다가 끊어졌다고, 선생님은 그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일 궁금하다고 했다.  


작년 겨울 쯤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동창 친구들 몇 명이 모였다. 미국에 살던 아이가 잠깐 서울에 들어왔는데 급한대로 연락을 돌려서 시간이 되는 녀석들만 모인 자리였다. 옛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예전 선생님들 이야기가 나왔고, 그 가운데 한 분이 마침 근처에 사시는지라 전화를 드렸다. 평일 밤 10시, 지하철 역 앞의 커피빈. 중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훌쩍 지난 뒤의 느닷없는 만남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또 몇 년 쯤 뒤에 있을 느닷없는 모임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가끔씩 옛날 은사님을 찾아 뵙는 건 나 자신한테 정서적으로 굉장히 좋은 일인 것 같아. 그래도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 


나도 그 친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런 착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까맣게 모르는 이야기들, 시간이 한참 지나 들으면 분명 ‘아차’ 싶을 이야기들. 그리고 그런 착각들 때문에 나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삶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이런저런 잘못과 함께 산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오래 오래 지나면 덜 중요한 것들은 조금씩 씻겨 내려간다. 그리고 보다 소중한 가치들만 맨들맨들한 자갈돌처럼 남아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인간적인 도리, 사람으로서 할 일. 사람은 결국 그런 가치들로 기억되는 것이 아닐지. 나는 은사님을 찾아 뵐 때 그런 것들을 배우곤 한다.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배움이 있기에 선생(先生)님인가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