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Jan 02. 2021

새해 소원이 하루 만에 이루어진 사연을 나누려 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재우입니다.  오래간만에 글을 씁니다. 


2021년 새해가 되면서 세 가지 서원을 세웠더랬습니다. 서원이라고 함은 소원과는 조금 다릅니다. 맹세한 서에 원할 원. 원하는 바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겠다고 맹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쪽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노력인 셈입니다.  


아무튼 많은 분들이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소원을 빌고 목표를 세우듯, 저 역시 올해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세 가지로 정리했지요. 첫번째, 두번째 서원은 많은 분들이 소망하시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누구나 새해 벽두에 빌어볼만한 원입니다. 하지만 세번째 서원은 조금 드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부터 아잔 브람 스님의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잔 브람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이론 물리학자인데 태국의 숲속에 들어가 아잔 차라는 큰 스님 아래에서 9년을 수행하고 지금은 세계적인 명상 지도자가 된 그런 스님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큰 사랑을 받은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작년 1년 동안 서울대에서 신비주의와 종교심리학 수업을 두루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업을 통해 대학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관심을 가졌던 명상과 영성 쪽의 경험과 지혜들이 많이 통합되는 느낌도 받았지요. 복된 일입니다. 그러던 중 인연이 닿은 것이 아잔 브람의 가르침. 그의 책 <성난 물소 놓아주기> 안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드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라.” 



왠지 그 구절이, 마치 낯익은 음악 선율처럼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드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볼까.’  


군대에 있을 때 자주 들었던 표현 중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나다 싶으면 손들어라.’ 예를 들어 어떤 작업 지시 같은 것이 내려와서 자원할 사람을 모을 때, ‘왠지 내 몫인 것 같은데.’ 라는 느낌이 오면 실제로도 그런 거니까 손들고 자원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우습게도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는 구절을 읽을 때 그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내 이야긴가? 내 몫인가? 


그래서 작년 마지막 날, 새해 서원을 꼽아보면서 세번째 것으로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새해에는 언제 어느 때라도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기를 서원합니다.” 이사도 가야하고, 아이도 태어나고, 돈도 벌어야 하고, 하여튼 해야할 일이 부쩍 늘어날 새해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상당히 의미있는 과제이자 서원이었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하기 힘든 날이 더러 있을테니까요. 


물론 서원을 세웠다고 당장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그렇게 원을 세우면 이런저런 일들이 들이닥칠 때 아무래도 훨씬 낫겠지요. 적어도 노력의 방향은 그렇게 정했습니다.  작년에 펴낸 책 <태도 수업> 안에 들어있는 이 문장처럼 말입니다. 


"태도가 상황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2021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하루 일정을 시작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 차 키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차 앞에 다른 차가 평행 주차를 해두었더군요. 전화를 해서 차를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금세 내려왔고 제가 운전석에 앉아서 볼 때 왼쪽 편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흠, 원래 저는 보통 차를 왼쪽으로 빼서 나가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정면에는 누군가가 해 놓은 불법주차 차량이 있었습니다. 빠져나갈 공간이 마땅치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오른쪽으로 핸들을 잔뜩 꺾고 액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부욱. 우지끈." 


자동차 오른쪽 옆구리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아찔하더군요. 자동차 옆구리를 주차장 기둥에 비벼댄 것입니다. 후진 기어를 넣고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내려서 살펴보았습니다. 조수석 뒤쪽 문이 긁히다 못해 푹 들어가버렸고, 기둥의 대리석들이 깨져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원래 조금 깨져있던 대리석들이었는데, 차가 밀어대면서 왕창 깨진 것입니다.  



전날 밤, 그러니까 12/31일에도 돈을 벌어보겠다고 피곤을 참고 밤 10시까지 일하다가 들어 온 자신이 떠올랐습니다. 왼쪽 손이 저절로 올라가 제 뒷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씨…’ 라고 마음 속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느꼈습니다. 평행주차 해놓은 저 사람만 아니었어도,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휘발유를 잔뜩 적신 것처럼, 이런 생각들이 땔감이 되어 가슴 속에 불이 확 일었습니다. 순식간의 일. 그리고 그 순간, 고작 12시간쯤 전에 새해 서원을 세우겠다며 다짐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새해에는 언제 어느 때라도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기를 서원합니다.” 


한 숨 크게 몰아서 내 쉬고, 다시 차에 올라탔습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일단 잠깐 다녀올 곳부터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숨을 깊고 길게 두어 번 쉬었습니다. 평정심을 잃었을 때 얼마나 손발이 제멋대로 노는지, 저는 카페를 운영할 때 여러 번 겪어서 잘 압니다. 아주 작은 마음의 동요만 있어도 원두 가루를 흘리거나 스팀 우유의 거품이 고르게 되지 않거든요. 


'이 세상에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문장을 거듭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한 10분 정도 걸렸지 싶습니다. 그럭저럭 마음은 가라앉았고, 저는 다시 일을 보고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다녀오는데 제가 부딪혀 놓은 기둥에 종이가 붙어있더군요. "1월 1일 12시 30분 2439 차주분께서는 원상복구 바랍니다.” 



처음에 들은 생각은 ‘이게 뭐지?’ 였습니다. '누구를 뺑소니범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몇 년을 살아온 집 기둥인데 도망갈까봐? '


두번째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그새 써 붙였지?’ 곧장 답이 떠올랐습니다. 차 앞을 막고 있던 평행주차 차량. 내가 옆구리를 우지끈하는 것을 보고 집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더니, 이거 써붙이러 간 거였구나. 


그리고 세번째로 든 생각. ‘아니 눈 앞에서 차가 사고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자기 차량이 왼쪽 방향을 막고 있어서 내가 오른쪽으로 차를 빼다가 눈 앞에서 우지끈 하면, 일단 괜찮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아무 일 없는듯 후다닥 뛰어 들어가더니, 내가 내 집에서 뺑소니라도 할까 봐 이걸 쓰러 갔어?’  


순간 웃음이 피식 나더군요. 뭐랄까.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이래도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 운운할 테냐?’라고 누군가 말하는 느낌. 저는 차에 있던 매직펜을 꺼냈습니다. 그 사람이 써놓은 종이 아래에 일단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네 확인하였습니다 2439’.  



쪼그려 앉아 그 말을 써넣는데 아래층에 사시는 용달차 아저씨, 또 다른 아래층에 사시는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차례차례 내려 오시다가 저를 보았습니다. 저희 집을 포함해서 10년 째 이 건물에서 사는 분들입니다. “아이구, 차 많이 망가졌네.” “정초부터 이를 어째. 액땜했다 치십시다.”  


집으로 올라가 인터넷에서 ‘대리석 기둥 복구’라고 검색했습니다. 비슷한 사고가 더러 있는지, 업체들이 금방 나오더군요. 몇몇 업체의 연락처에 문자와 현장 사진을 보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차량을 빼다가 주차장 기둥 대리석을 파손했습니다. 수리하려면 비용이 어떻게 될지 질문드립니다.”  



다들 금세 답변을 주셨고, 가장 견적이 낮은 업체에 추가로 문의한 후 수리 일정을 잡았습니다. 다행히 1주일 안에 수리는 완료될 것이라 했습니다. 보험사에 사고를 접수하고 나자 그럭저럭 큰 처리는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처음 겪는 자동차 사고. 그것도 새해 첫날 첫 운행에서 그랬으니 액땜 제대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이를 한 장 꺼내 글을 썼습니다. 주차장 기둥에 붙일 종이였습니다. “1월 4일 실측 후 다음 주 중 수리 예정입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439 드림”  






1월 1일 밤에는 명상 수련 시간이 잡혀 있었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나서 스님과 차담을 나누다, 오늘 겪은 사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해에는 언제 어느 때라도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기를 서원하였는데,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런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하며 웃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수행에는 원래 마장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마음 공부 잘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면 곧장 그것을 시험하는 과제가 들이닥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아잔 브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에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드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라.” 자동차 옆구리를 우지끈한 순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들어가야할 수리비에 대한 걱정과, 평행주차로 내 앞을 막은 저 사람에 대한 분노가 화염처럼 이는 것을 저는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아잔 브람이라면 그 순간 어땠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불길이 일지 않았겠지요. 혹은 불길이 일어나려 하는 순간 알아채고 사그라트렸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 일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할 수 있는 극히 드문’ 사람이 되어볼 수 있었던 딱 맞는 기회였던 겁니다.  


수련을 마치고 텅 빈 강변북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신은 능력을 발휘해야할 문제를 주셨다.’ 그 문장이 꼭 오늘 저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The universe likes speed. 우주는 속도를 좋아한다고 하지요. 새해에 세운 세 가지 서원 중 하나가 하루만에 이루어진 셈입니다. 작년 한 해, 다들 힘들었기 때문일까요. 참 좋은 출발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26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