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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주 Jul 23. 2023

 2.  삶의 아우라를 되찾기

『아케이드 프로젝트 Ⅰ』, 발터 벤야민, 새물결

도박이란 바로 이처럼 운명이 평상시라면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무수한 많은 변화를 한순간에 초래려는 기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완만한 생애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감정들을 한순간에 긁어모으는 기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발터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Ⅰ』, 1128p, 새물결




요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고 있다. 19세기 파리, 자본주의의 유년기를 보며 이 시대를 이해해보는 중이다.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사진기와 같은 복제 기술이 발명되면서 예술이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공간과 시간을 통해 설명한다. 예술작품이 탄생할 때 당시의 공간과 시간의 직조 속에서 아우라가 탄생한다고 말이다.


아우라는 재현될 수 없다. 다른 시공간에서는 다른 아우라가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술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도 아우라에 대한 몫이 달려 있다. 아우라라는 것은 그 작품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인데, 즉 그 대상과 보는 사람이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아우라가 생긴다. 그런데 사진기와 같은 복제 기술은 오리지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까지는 복제하지 못한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작품이 탄생되는 맥락, 즉 아우라를 탈락시킨채로 작품만은 채취하고 절단하면서 아우라는 상실된다. 그리고 복제 기술로 대량생산되는 상품들에게 우리는 더이상 오랫동안 시선을 두지 않는다. 어차피 상품은 사방에 널려있으니까! 


예술이 아우아를 상실한 것에서 나아가 어쩌면 우리의 삶도 아우라를 상실한 면이 있지 않을까. 우리의 '경험'은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은 사진기, 인터넷, 핸드폰, 노트북 등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어떤 경험이든 쉽게 접할 수 있다. (경험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핸드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하아와이, 독일은 물론 가우디의 건축물 피카소의 그림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얻은 것에서 우리 눈길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 대상과 시선을 주고 받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경험했다고도 볼 수 없기 때문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경험을 통해 대상을 오랫동안 응시하기를 멈춘 것이며 인생의 맥락들, 즉 서사들이 거세당한 것이 아닐까.


저는 이 행위가 마냥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도 볼 수 있다니 충격적이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큰 노동을 들이지 않고도 자본만 있다면 무언가를 '쉽고 빠르게'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편리함을 준다.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편리성의 대가로 우리는 삶의 아우라를 잃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복제 기술이 단순히 물리적 기술을 넘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며 우리 생활 의식에도 들어온 것일터.


우리가 '쉽고 빠른 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쉽고 빠른 것을 좋아하는 만큼 우리는 느린 것 앞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한죠. 권태 아니면 불안! 자본주의에서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 '효율성'을 고려한다. 즉, 시간이 적게 걸릴수록 더 많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고는 단순히 이익을 창출하는 일을 넘어서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사람을 대할 때, 혹은 어떤 경험을 할 때도 작동하는 것 같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시간을 최소한으로 들이며 사물, 사람, 경험과 관계를 맺게 되니까 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고 그것이 나의 이익이다. '라는 전제에 자연스럽게 동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벤야민은 파리의 자본주의를 바라보며 '매춘'과 '도박'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노동은 모두 꾸준하고 정직하게 시간을 들여서 이루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매춘과 도박은 그 시간과 과정을 거세하고 쾌락이라는 결과만을 취하겠다는 행위이다. 자본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가 쉽고 빠르게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 욕망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압축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과정은 겪지 않고(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에) 결과만 취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과 동의어가 아닐까? 우리의 삶의 아우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난한 과정을 겪어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마치 벤야민이 파리를 거북이의 속도로 산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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