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치돈 Feb 14. 2021

우당탕탕 자가격리 이야기, <더 라이트하우스>

*2020년에 쓴 글

*스포일러 주의


<더 라이트하우스>는 자가격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위한 일종의 지침과도 같은 작품이다. 세대주 혹은 동거인과의 갈등을 피하고 싶다면, 그가 만든 음식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청소를 제때제때 할 것이고, 집에 술이 떨어졌다고 석유(?)와 꿀을 섞어서 마시지 않을 것. 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라이트하우스>의 주인공과 같이 아주 불행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허나 우리도 역시 주인공들과 별다르지 않은 2020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리스 고대 신화의 이카로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시시포스의 이야기에 호모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1890년대 직장 호러물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두 주인공은 뉴 잉글랜드의 어느 작은 바위섬에서 4주간의 등대지기 업무를 맡게 된다. 토마스는 아내와 아들로부터 구속받는 삶을 피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여 일종의 신이 되기를 선택한 인물이다. 에프라임이 등대지기가 된 이유는 영화의 후반부에야 공개되지만, 그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암시된다. 영화는 에프라임이 전적으로 토마스의 권력 하에 움직이는 랜턴을 한 번이라도 통제해보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올림푸스 산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와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이 둘을 이어주는 ‘등대’라는 공간은 지켜야 할 대상이자 진리의 주체로 작용한다. 이 절대성을 지닌 공간에서 비밀로 남겨져야만 했던 사실이 드러나자 에프라임과 토마스는 자신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고, 그 운명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끝없는 반복과 고통을 의미한다.


어느 날 밤, 토마스가 자위하는 모습을 보게 된 에프라임은 그를 경멸하지만 본인 역시 성적 욕망에 휩싸이고 만다. 토마스에 대한 애증은 토마스가 관리하는 랜턴, 즉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진리에 대한 집착을 반영하고 있다. 그전까지 에프라임은 늘 토마스를 올려다보고, 그의 움직임을 잡는 카메라 또한 에프라임과 토마스를 절대 상하관계 혹은 수직관계가 전복된 것으로 비추지 않는다. 오로지 위에 언급된 그 장면에서만 에프라임은 위에서 토마스를 내려다보게 되며, 그 순간 바위섬은 권력이 전복되고 관계가 어긋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바위섬이자 등대의 절대자로서 토마스는 에프라임을 소유하고 속박하는 주체지만, 그의 지시에 복종하던 에프라임은 그를 따르는 동시에 욕망하고 증오하게 된다.



<더 라이트하우스> 속 인간의 군상은 원죄를 지닌 상태로 세상에 놓여 거듭해서 속죄해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프라임이 뒤숭숭한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찾아온 바위섬은 어찌 보면 그에게는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을 겪고도 그토록 욕망해서 찾은 구원의 빛은 지나치게 밝고 강렬했다. 왜냐하면 지독한 숙취와 어둠에 잠식되어 버린 에프라임의 두 눈은 그 빛이 선사한 진리 혹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절대자의 권력 아래 놓인 인간에게 온전한 참회란 가능한 것일까?


토마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등대의 랜턴을 마주한 후에 추락하는 에프라임의 모습은 프로메테우스뿐만 아니라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 추락한 이카로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결말까지 고려한 <더 라이트하우스>는 두 가지의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 상당히 원형적이고 종교적 전통 서사의 방향을 따른다. 에프라임이라는 죄인이 동료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씻겨내기 위해 토마스라는 절대자에 몸과 마음을 의탁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와 그의 랜턴에 올라가지 말라는 진리에 대한 의심을 놓지 못하고, 결국 그 권력에 도전하다가 벌을 받게 되는 전형적인 ‘신 vs. 인간’의 충돌 패턴을 보여준다.


또 다른 해석은 바위섬에 도착하고 추락해 죽기까지의 이야기가 에프라임이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 저주라는 것이다. 이는 신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의 이야기까지 연상시킨다. 에프라임의 과거사는 구체적인 반면에 영화는 토마스를 상당히 피상적으로만 그려내는 점을 통해서 토마스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에프라임이 도착한 섬은 과거 동료 ‘에프라임 윈슬로우’를 죽인 것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일종의 지옥 혹은 연옥 같은 공간이고, 토마스는 에프라임으로부터 사실을 숨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랜턴은 이 공간이 에프라임의 지옥이라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며, 이 진리를 마주하는 순간 에프라임은 죗값을 치르게 된다. 다만 영원한 죄수의 화신인 시시포스와 같이 그 끔찍한 여정을 계속 반복해야만 한다는 운명에 갇혀 있다. 결국, 이 해석은 바위섬이 본인의 범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정신적 트라우마에 계속하여 시달리는 에프라임의 내면세계임을 의미한다.



어찌 됐든, 에프라임이 보지 말았어야 할 진리를 맞이한 자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필자는 로버트 패틴슨이 월렘 대포의 뒤태(…)를 보며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장면을 봤던 순간부터 올해는 무언가 괴상한 해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조금은 했다. 하지만 2020년은 여러 의미에서 믿을 수 없고 전례 없는 사건으로 가득 찬 해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경제 지수, 국방 지수 혹은 심하다면 협소한 시각으로 문화의 수준을 매기며 모든 국가에 등급을 부여하여 줄을 세우곤 한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가 두 손 모아 서양 국가에 부여했던 고매한 가치가 얼마나 허상으로 가득했는지 깨닫게 하였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국제 자본시장과 헤게모니를 쥐어 온 국가의 수장은 “코로나의 99%는 무해하다”라고 말하는 등 모두가 경악할 언행을 일삼는다(물론 재선에는 실패했다...) 박애와 관용의 민족임을 자처해 온 프랑스에서는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동양인은 바이러스라더니 “프레이 포 이태리”가 SNS 유행으로 번진 것은 참으로 씁쓸한 광경이다. 반면 ‘저개발국’이라 치부되던 쿠바는 풍부한 의료진 자원에 힘입어 코로나 극복에 선방하고 있고, 한국 또한 방역에 비교적 성공을 이룬 사례로 꼽히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흐름이 1세계와 3세계로 세상을 나누어 생각해 오던 견고한 편견을 와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각을 지녔지만 절대자의 권력을 자처하는 몇몇 국가에 의해 정립된 질서에 의존해 왔다. 수많은 메타포로 이루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일관적 해석에 집중할 필요는 없지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에프라임의 이야기는 마치 세계적 위계질서가 하나의 신화였음을 깨달은 2020년의 우리를 비추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2020년 초에 초안을 완성한 글이다 보니 2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신천지 감염을 생각지도 못하고 쓴 글이다. 가까운 미래를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던 때... 


작가의 이전글 화이트 러시안과 니힐리즘: <위대한 레보스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