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 목소리 2
“딸이 필요하다 해서 이 예금 좀 해지해야겠어. 미안해서 어쩌지?”
“필요하시면 쓰셔야 줘. 나중에 여유자금 생기시면 그때 또 많이 이용해 주세요. 따님 계좌번호 전표에 적어주세요. 제가 바로 송금 처리하겠습니다.”
“아… 현금으로 주면 좋은데… 그 송금 수수료가 있잖아?”
“에이 고객님은 수수료 면제되시는 우수고객이십니다. 수수료 걱정 마셔요.”
“아 참… 그래도 현금으로 부탁해요. 딸이 현금이 필요.. 한가… 싶어서..”
“엥? 어디에 쓰시길래 현금이 필요하다셔요? 요즘 현금거래 거의 안 하는데…?”
내가 입사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주신 우수고객님. 자주 금고에 방문하시고 상담도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집안 사정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사업하신다는 따님이 급하게 필요하다며 고객님께 부탁하셔서 예금을 해지하러 오셨다. 중간에 해지하시는 건 손해라 아쉽지만 그래도 자식이 필요 하다시니 망설임 없이 예금을 찾으셨다. 역시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도와주시는 든든한 내편이다. 부장님께 금고 열쇠를 받으며 간단하게 상황설명을 하고 금고로 향했다. 금액이 커서 봉투와 가방 등을 잘 챙겨 자리로 돌아오니 부장님이 고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자리에 돌아와 현금을 정리하는데 컴퓨터 화면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이스피싱 의심’. 엥? 이게 무슨 말이야? 메시지를 보내신 건 다름 아닌 부장님. 부장님이 고객님께 질문을 하시며 자금 사용처를 집요하게 물으신다. 그러고 보니 이 고객님 조금 이상하다. 날씨가 더워 객장 안에 에어컨을 최대로 가동하고 있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원하다고 하시고 아니 춥다고도 하시는데 계속 땀을 흘리신다. 또 부장님 포함 전 직원들과 친하셔서 이것저것 이야기도 편하게 하시는데 지금은 영 불편해 보이신다. 부장님께서 고객님 몰래 나에게 따님과 통화를 해보라고 지시하신다.
급하게 고객님의 자녀분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으신 자녀분은 부모님께 그런 큰돈을 부탁드린 적이 없다며 제가 한번 통화를 해보겠다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자리에 돌아와 부장님께 살짝 종이에 적어 상황설명을 드렸다. 그 순간 “ 고객님 지금 누구랑 통화하시나요? 저 좀 바꿔주세요. 저희가 따님과 통화했는데 지금 집에 잘 계시다고 하셔요.” 부장님의 말씀에 고객님이 화들짝 놀라신다. “따님 무사하시니까 고객님 전화 끊으셔요 얼른.”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부장님이 고객님의 전화기를 낚아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신다. 고객님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신다.
자녀를 납치하였으니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해치겠다는 협박을 하는 보이스피싱. 연령이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수법은, 납치된 자녀의 목소리까지 연기하며 돈을 요구하는 아주 질이 나쁜 수법이다. 자녀들과 통화를 못하게 전화 통화를 계속하며 은행이나 집에 있는 현금을 특정 장소에 숨기게 하는 방법으로 돈을 갈취한다. 고객님께서도 전화기 넘어의 여자 목소리가 딸인 줄 착각하고 헐레벌떡 창구로 오셨단다. 그런 고객님의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한 부장님이 고객님을 관찰하다 누군가와 계속 통화 중이라는 생각에 보이스피싱을 의심하셨단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알려준 방법으로 창구 직원인 내가 의심 없이 현금을 찾아주려 하니 부장님이 직접 확인을 하신 거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고 바로 걸려온 따님의 통화로 고객님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셔서 집으로 돌아가셨다.
창구직원이 의심하지 않게 예금 찾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줬다는 사기꾼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전세금을 올려줘야 한다, 부동산 세금이 많이 나왔다, 손주들의 학자금으로 급하게 줘야 한다는 등 아주 자세한 이유들을 알려줬다는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절대 속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다. 내 비록 네놈들을 직접 잡을 순 없어도 고객들의 자산을 쉽게 내어주지 않겠다. 절대로 범죄자들에게 돈이 들어가지 않게 하겠다 또 한 번 다짐한다.
“다음부터는 한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장님 어떻게 눈치채셨어요?” 부장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저 고객님 따님이 그냥 사업하시는 사장님이 아니야. 회사 대표라고. 그것도 엄청 잘 나가는 회사 대표. 급하게 필요하다는 사업자금이 애매하지 않아? 그리고 이 예금도 따님이 주신 용돈으로 모으신 거야. 그걸 다시 달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 아무리 본인 부모님이라도.” “ 아,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아셔요?” “나 창구직원일 때부터 저 고객님을 몇 년을 봐왔는데 그걸 모르겠냐. 하하하” 역시 경력 무시 못한다.
며칠 후 도착한 택배박스. 고객님의 따님이 금고로 보내신 커피다. 직원들에게 감사하다며 보내신 건데 몇 개가 아니고 몇 박스로 도착했다. 놀라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부장님이 장난스레 말씀하신다. “봐. 잘 나가는 회사 대표님이라니까.”자녀분이 보내신 커피를 바라보며 직원 모두 좀 더 관심 있게 고객님을 바라보기로 각자 다짐한다.
* 지급정지 피해신고 (경찰청) 112
* 피싱사이트 신고 (인터넷진흥원) 118
* 피해상담 및 환급 (금융감독원) 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