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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m Oct 16. 2024

악에게 서사를

"악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영화 <조커 2>를 보고 나오는데 이 문장이 떠올랐다. 문장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심에 이어 이 한 줄이 가진 의미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먼저 서사의 힘이 떠올랐다. 이야기 속 인물에 대한 이해를 넘어 동정심까지도 자극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 힐난과 증오의 대상에게 감정이 스며들어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악에게는 이해받을 권리가 없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를 부여할 가치가 없는’ 악은 과연 무엇일까? 인생이 이야기고 서사가 곧 삶인데 이것을 부여하고 말고를 정할 수 있는 걸까?



무엇보다 어떤 존재가 이해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의 서사를 누구보다 더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극악무도한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는 그가 겪은 잔인한 폭행과 차별을 세세히 그린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게 독사과를 준 마녀가 주인공인 <말레피센트>는 그녀가 인간에게 배신 당하고 상처 받은 서사를 보여준다. 이같은 작품들은 악인들을 심판하기 전에 심도 깊은 이해를 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물론 태생적이거나 개선과 반성의 여지가 없는 악, 서사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악도 존재한다. 대개는 연쇄살인마, 묻지 마 폭행범을 그런 류로 여긴다. 하지만 어떠한 분류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나는 과연 그러한 악랄함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선하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내 안에는 선하지만은 않은 것들도 존재한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경멸하는 눈짓을 내 얼굴에서 발견하고, 스스로 우월하다는 오만을 품은 속을 감지하고, 깨어있을 때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운 꿈을 꾸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내 안에 부끄럽고 추악하고 어두운 공간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을 나는 영영 마주하고 싶지 않고 평생 모른 척하고 싶으면서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내면의 가장 깜깜하고 고린내 나는 그곳 앞에 서서 바라보고, 그 속을 벗겨보아야 함을 직감한다. 



외면보다 직시를, 무시보다 이해를 선택해야 알 기회가 생긴다. 알아야만 받아들이든 극복하든, 결정할 수 있다. 결단을 내려야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악에게는 서사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대한 의구심을 끊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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