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키는 일상

by Emmm

비가 올 것만 같던 겨울밤, 청계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간간이 물살을 가르는 오리들과 다리 위로 행인 몇 명이 지나갈 뿐 산책로는 텅 비어 있었다. 새하얀 운무가 피어난 수면 위로 축축하게 젖은 풀향과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가라앉고 있는 밤이었다. 청계천 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마저 조곤조곤 속닥이듯 잦아들었다. 팔과 옆구리를 스치는 패딩 소리만이 잔잔한 음악이 되어 고요 속을 채웠다. 숨을 고르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걸으니 청계천 냇물처럼 평온한 미소가 절로 얼굴에 피었다.


희미한 불빛만으로 비친 산책로를 명상하듯 걷다가 멀리서 한 여자가 청계천으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산책 나온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 생각하며 고요한 산책로로 합류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두리번두리번 어디로 가야 할지 살피면서 물가에 내려오더니 내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나의 걸음이 빨랐던 탓에 우리 사이의 간격이 좁혀졌다. 내가 두어 걸음 뒤까지 다가갔을 때, 여자가 흠칫 어깨를 움츠리더니 홱 뒤를 돌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처하려는 결심이 눈빛에 비쳤다. 나는 얼른 뒷걸음질하며 안심하라는 마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경직된 여자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가고 치켜든 이마도 부드러워졌다. 긴장감이 풀리자 우리는 서로를 지나쳐 산책을 계속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늦은 밤에도 산책 나온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뒤에서 다가오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걸음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면 앞의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으로 길을 비켜주기까지 했다. 같은 시간, 같은 산책로이지만 전혀 다르게 서로를 스쳤다. 흠칫 놀랄 일이 없는, 편안한 청계천이었다. 내가 매일 보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다시금 나를 보고 놀란 그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매일 걷는 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게는 집과 같이 편한 곳이 누군가에겐 낯선 장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가로등 빛이 밝지 않는 거리를 지날 때면 한동안은 긴장을 하곤 했다. 다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집으로 가는 어둑한 골목, 늦은 밤 청계천 산책로도 마음 놓고 다니게 될 때까지 안전한 곳인지를 확인하는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사람들이 준 신뢰 덕이다. 아까 마주친 여자와 나의 긴장된 만남도 그런 신뢰가 오고 갔기에 우리 둘 모두 안심할 수 있었다. 밤길을 나온 이들이 서로를 경계하지 않는 것도 오랜 시간 쌓은 믿음이 있어서 가능했다. 낯선 여자와의 긴장된 만남을 통해 나는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안온함은 우리 모두가 함께 지키는 것이었음을.